『3월에서 4월 사이』 - 안도현(1961~ ) -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3월에서 4월 사이' 전문
눈 덮인 2월에 3월을 생각한다. 3월에는 꽃이 핀다. 꽃이 피면 우리나라 천지사방에 봄이 온다. 꽃은 들판에도 피고, 강변에도 피고, 시멘트 보도블록과 육교의 계단 틈새에도 핀다. 하늘에도 피고 바람 속에서도 피고 음악과 구름과 된장찌개 속에서도 핀다. 지난 겨울의 삭풍과 눈보라를 견뎌낸 따뜻한 생의 이력들이여. 우리들 가슴의 가장 허름한 구석에도 향기 자욱한 봄꽃 한 송이 피어라. - 곽재구<시인> -
『할머니와 손녀』 - 양원식(1932~ ) - 러시아말을 잘 모르시는 할머니 제 고려말을 모르는 손녀이긴 하나 고려말을 하시는 수밖에 얘, 나자야! 너 저기 건너편을 보느냐? 늙은이가 바로 눈앞에 서 있는데도 못 본 척하고 앉아 있는 저 젊은이들 넌 그런 애는 아니겠지? 그러자 소녀는 펄떡 일어나 멀찍이 가 서서 간다. 할머니의 타이름 때문이 아니었다. 제 고려말을 하시는 할머니와 한 자리에 앉아 가기 부끄러워서였다. '할머니와 손녀' 전문
알마티에서 비슈케크를 거쳐 사마르칸트로 여행하는 동안 많은 고려인을 만났다. 나와 같은 얼굴 형상을 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수십만명의 사람이 중앙아시아의 도처에서 김치와 된장을 담가 먹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처음엔 쉬 믿어지지 않았다. 이들 중 다수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무국적자가 돼 유랑민의 삶을 산다. 민족국가로 독립할 수도 없고 원적지인 한국이나 북한에서도 그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양원식은 고려인이다. - 곽재구<시인> -
『첫사랑』 - 진은영(1970~ ) - 소년이 내 목소매를 잡고 물고기를 넣었다. 내 가슴이 두 마리 하얀 송어가 되었다. 세 마리 고기떼를 따라 푸른 물살을 헤엄쳐 갔다. '첫사랑' 전문
푸른 물살을 헤엄쳐 가는 물고기의 숫자를 셈한다. 다섯 마리 같기도 하고 여섯 마리 같기도 하고 그냥 한 마리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소년은 목소매에 물고기를 넣었을까. 양털로 짠 벙어리장갑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땐 겨울이 아니라 봄이었을까. 두마리의 하얀 송어도 송어일까. 그런데 두 마리의 송어는 왜 세 마리의 고기떼를 따라 갔을까. 물고기들은 그 강에서 또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을 만났을까. 물고기의 나라에도 전쟁과 굶주림이 있을까. 물고기들은 어디까지 헤엄쳐 갔으며, 물고기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보라색의 수초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알을 뿌렸으며, 물고기들은 어디쯤에서 헤엄치기를 멈추었을까. 헤엄치기를 멈춘 물고기는 물고기가 아닐까…. 생각하다 보니 소년이 목소매에 물고기를 넣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 곽재구<시인> -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 장석주(1955~ ) - 항아리 물에 얇은 살얼음이 끼는 입동(立冬) 아침에 집 밖에 내놓은 벤자민 화분 두 개가 저녁에 나가 보니 행방이 묘연하다. 누군가 병색 짙은 벤자민을 쏟아놓고 화분만 쏙 빼 가져간 것.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이다. 아직도 간장을 달여 먹다니! 그렇게 제 생을 달이고 있는 자도 한둘쯤은 있을 터. 검정 고양이가 아직 불 켜지지 않는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다수(多數)의 저녁이 침울하게 지나간다.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전문
해 저무는 시각, 간장 달이는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 간장 달이는 냄새가 마당을 채우고 골목길을 채우고 골목 밖 신작로 길을 다 채울 것 같은 시각, 누군가 절뚝이며 마을길을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뼈 위에 걸친 입성은 다 낡았으나 안광은 혁혁한 그가 마을의 집들과 돌각담을 스칠 듯 걸어 들판으로 가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린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모습이 두려워 대문 뒤에 숨고…. 수십년이 지난 뒤 비로소 안다. 아, 그가 제 생을 달이는 중이었구나… - 곽재구<시인> -
『고산족』 - 정철훈(1959~ ) - 삽백 예순날을 피로 밥을 짓는 네팔 사람은 매일 아침 조약돌 같은 까만 똥을 눈다. 먹는 것이 사막의 생태계와 같다. 공동우물 옆 풀섶에 뒹구는 네팔의 똥은 그래서 은빛이다. 단백질을 먹지 않아 육질이 나무껍질 같은 얼굴의 주름은 언제나 아이 같은 미소에 덮여 가을의 낙엽처럼 진다. 키버르 밀밭의 여인들은 시집을 가도 처녀처럼 맑다. (중략) 평생을 하늘만 보고 살다보니 눈동자에도 하늘만 고인다 그들은 히말라야를 먹고 히말라야는 그들을 먹는다. '고산족'부분
네팔에서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끝없이 펼쳐진 설산의 파노라마를 보며 하루 이틀 사흘 걷다보면 이곳이 생의 풍경인지, 생의 경계를 아득히 넘어선 풍경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이어진다. 월급봉투, 카드빚, 중도금, 로또복권, 연체율, 신용불량자, 광우병에 걸린 소와 새들이 옮기는 독감…. 뒤엉겨 함께 살아야 할 이승의 시간들의 이름을 잠시 망각하며 걷는 사이 눈앞에서 한 네팔 소녀가 웃는다. - 곽재구<시인> -
『길의 세탁소』 - 이찬(1967~ ) - 길을 만나고 돌아온 날은 세탁소에 들러야 한다 지나온 길들을 빨아야만 길 위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길들을 만나는 일은 죄를 짓는 밤 길들에게 죄를 짓는 밤은 세탁소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아예 육체를 다시 헹구어야 하는 불안의 밤이다. 불안의 밤을 세탁소에 맡겨 씻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몸에 악착같이 달라붙은 길들의 먼지 먼지들의 영혼을 다림질해야 하는 것이다. 길의 세탁소는 늘 불안히 깜박거리고 네온의 침들을 질질 흘리고 있다. 길 안의 영혼 길 밖의 세탁소에게 너무 오래이 맡겨 왔다. '길의 세탁소' 전문
오랜 세월, 모든 예술작품 속에서 길은 삶의 은유였다. 길은 삶의 시작과 끝이었으며 그 사이의 과정이기도 했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길 위에서 자신의 생의 업들을 하나씩 풀어 놓았다. 길 위에서 장미들은 피어났고 길 위에서 사과들은 여물어 갔으며 길 위에서 새들은 자신의 허공을 노래했다. 길 위에서 지천인 돼지들이 먹이를 찾았으며, 까마귀와 하이에나들이 돼지의 먹이를 빼앗아 갔으며, 그 길 위에서 아침풀밭은 무량한 영혼의 이슬방울들을 맺기도 했던 것이다. 어찌 그 길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길 위에서 영혼의 세탁소를 찾지 못했다 해도, 세탁소 안의 신부에게 진실한 고해성사를 할 수 없다 해도… - 곽재구<시인> -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 장석남(1965~ ) - 나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을까? 불임으로 엉킨 햇빛의 무게를 견디는, 때로는 고요 속에 눈과 코를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내서는 서러운 허공중들도 감싸안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클레멘타인을 부르던 시간들을 아코디언처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가 계절이 지칠 때 꽃 피는 육신으로 다시 허밍하는 그 집 지붕의 단란한 처마들 나는 걸음에 젖어서. 그 갸륵함에 대해서.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전문
겨울날 낙안읍성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볼 수 있다. 새 이엉을 올린 샛노란 초가지붕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아, 하는 탄성이 절로 스며나온다. 지붕들은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기도 하고 서로의 거친 발바닥을 두드려 주기도 하고 어젯밤 못다한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지붕들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불로 인간의 모든 삶과 꿈을 덮어준다. 그 갸륵함의 깊이라니…. - 곽재구<시인> -
『입김』 - 나희덕(1966~ ) - 구름인가, 했더니 연기의 그림자였다 흩날리는 연기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아직 훈기가 남아 있었다 그 중 한 줄기는 더 낮게 내려와 목련나무 허리를 잠시 어루만지고 올라갔다. 그 다문 입술을 만지려는 순간 내 손이 꽃봉오리 위에서 연기 그림자와 겹쳐졌다. 아, 이것은 누구의 입맞춤인가. '입김' 전문
콜카타(옛 캘커타)의 하우라역 앞을 흐르는 강변에 꽃시장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꽃시장 길은 형형색색의 꽃들과 꽃들이 피워낸 향기로 천국만 같았다. 한 상인이 내게 꽃을 보여 주었다. 연잎으로 싼 포장을 몇 겹 벗기니 안개 속인 듯 꽃의 얼굴이 보였다. 노란빛의 목련을 닮은 꽃…. 그렇게 평화롭고 아늑하고 우아한 빛과 형상의 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상인이 그 꽃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쫌빠플라워. 스무살 무렵, 타고르의 시 속에서 구름처럼 피어나던 꽃. 라마야나 이야기를 읽는 엄마의 곁에서 꽃이 된 아기가 향기를 뿌려주던 꽃. 엄마와 아기의 입맞춤 속에서 환하게 피어나던 꽃…. - 곽재구<시인> -
『봄』 - 최윤진 (1955~ ) - 문빈정사 섬돌 위에 눈빛 맑은 스님의 털신 한 켤레 어느날 새의 깃털처럼 하얀 고무신으로 바뀌었네. '봄' 전문
강 건너 마을에 청매화꽃 필 때는 눈색이 도랑물에 흰 구름 흘러갈 때. 산 너머 마을에 홍매화꽃 필 적이면 돌각담 비집고 스며드는 샛바람 한 올에도 연분홍 꽃향기가 꿈결 같은 때… 난봉산 자락에 매화꽃이 피다. 꽃향기를 따라 천천히 걷다가 문득 한 무리의 새떼를 만나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새들은 바지런히 날아다니고 매화꽃 향기들은 이승의 어두컴컴한 시간들을 출렁출렁 흔드는데, 다음 구례 장날엔 꽃 필 적 신을 흰 고무신 한 켤레 사 두어야겠다. - 곽재구<시인> -
『지하철에서 1』 - 최영미(1961~ ) -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지하철에서 1' 전문
스무살적 나는 커피를 좋아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실존하는 커피보다는 관념으로서의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의 맛과 향기, 따뜻한 감촉들이 너무 좋았지만 내게는 그 마술적인 음료를 사마실 돈이 없었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허공 중에 손가락으로 쓰곤 했다. ㅋ ㅓ ㅍ ㅣ. 자음과 모음을 하나 하나 적어나갈 때마다 세상의 모든 길 위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건물들, 나무들, 먼지낀 유리창들, 구름들, 김이 솟아오르는 만두가게의 검정솥과 버스 안내양의 오라잇!, 하는 발차소리…. 오감에 걸리는 모든 풍경들 속에서 따뜻한 커피냄새가 났다. 두 손을 모아 허공 속에 공손히 내밀고는 한참을 서 있다가 입에 가져가면 그 관념적인, 행복한 음료 마시기는 끝이 났다. 그 무렵엔 하루 한끼를 먹고 열 편이나 스무 편의 시를 썼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사치였던 그 시절, 적어도 그 시절에 우리 모두는 끔찍한 밥벌레가 아니었음을…. - 곽재구<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