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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24

수호천사 |2006.11.16 14:58
조회 406 |추천 0

 

 

 

『토란』 - 이원규(1962~ ) - 밤이슬 다 모으고도 모자라 비를 기다리는 토란을 아십니까?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최고의 우산은 토란잎이었지요. 잎 하나의 우산을 쓰고 삼십오년 세상의 빗속을 뛰어다닐 때 속까지 젖는 것은 언제나 나였습니다. 지리산이 젖고 섬진강이 젖은 오늘. 이제서야 나는 한 잎의 토란입니다. (후략) '토란'부분

 

 

 

비 오는 날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토란잎 하나씩을 들고 빗속을 걸어간다면…. 그 토란잎들이 서로 눈빛을 나누며 나는 진부령 토란잎이요, 섬진강 토란잎이지요, 묘향산 토란잎입니다, 서로 웃으며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따뜻한 일이겠는지…. 이리하여 서른다섯해 동안 자신을 지탱해준 것이 토란잎 우산 한 장이라는 시인의 진술은 진정성을 얻게 된다. 그 토란잎 우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한 알의 토실한 토란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곽재구<시인> -

 

 

 

 

 

 

 

『구두』 - 송찬호(1959~ ) -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중략)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후략) '구두' 부분

 

 

 

모든 발은 마음의 화신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쪽을 발은 함께 바라본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발 또한 여유롭고 마음이 들끓으면 불쌍한 발 또한 들끓는다. 한평생 그러하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편에서 당신 또한 당신의 늙고 고집 센 발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우련 일지 않는가. - 곽재구<시인> -

 

 

 

 

 

 

 

『십우도』 - 권대웅(1962~ ) -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를 끌고 가네. 길은 멀고 날은 저무는데 돌아보니 첩첩 빌딩이네. 빨리 가려다가 더 늦게 가는 자들이여 오토바이를 타고 간 사람이나 비행기를 타고 간 사람이나 모두 오리무중이네. '십우도' 전문

 

 

 

당신도 흰 소를 찾아 나선 적이 있는가. 흰 소가 어디 있을까, 흰 소가 어디 있을까, 중얼거리며 세상의 이곳 저곳을 뒤진 적이 있는가. 사막과 공장, 바다와 산맥을 가리지 않고 헤맨 적이 있는가. 꽁무니에 기나긴 빌딩의 숲을 달고 허우적대며 힘들게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들…. 길은 멀고 날은 저무는데, 문득 옆 차선의 운전자가 하품을 한다. 하품을 하다 눈이 마주치자 한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비빈다. 핍진한 그 모습이 형제처럼 사랑스러운데 벗이여, 그대 또한 흰 소를 찾으며 한 세상을 보냈겠지…. 욕망과 아집, 이기(利己)의 강물 속에서 첨벙첨벙, 종래는 흰 소의 이름조차 잊었겠지. - 곽재구<시인> -

 

 

 

 

 

 

 

『사막에서 만난 꽃』 - 문정희(1947~ ) - 눈부신 맨살 드러낸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몇 년째 묵언 중인 스님을 만났다. 햇살 부서져 흰 것뿐인 벌판에 기괴하게 몸을 튼 사라쌍수나무 기쁜 웃음 만발한 바위로 앉은 청화스님, 눕지 않고 그대로 십수년이라. 서울서 간 나에게 백지 내밀던 사막에 핀 한 송이 꽃, 오늘 아침에 그 꽃을 태우는 다비 소식 실렸다. 그야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사막에서 만난 꽃' 전문

 

 

 

콜카타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라즈다니 열차 안. 맞은편, 두 명의 인도인 중 한 명이 나와 동갑이었다. 세상의 어디를 가도 동갑끼리는 반갑다. 그가 자신이 수행한 나이 든 인도인을 소개해 줬는데 왕족이라고 했다. 이름 끝에 쿠마리라는 왕족의 혈통이 붙어 있었다. 78세. 노인의 입성은 허름했다. 가부좌를 한 채 잔잔하게 웃던 그는 그 자세로 밤을 샜다. 노인은 눕지 않고 생을 보낸다고 동갑이 말했다. 메마른 그의 몸, 맑고 강렬한 눈빛, 잔잔한 미소…. 열차 안에 푸른빛이 그 밤 내내 머물렀다. - 곽재구<시인> -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 손택수(1970~ ) -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전문

 

 

 

해저무는 순천만. 개펄 위에 도요새의 발자국 몇개 찍혀 있다.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 생의 문양들. 그 곁으로 짱뚱어 한마리 몸을 비틀며 다가선다. 부드럽고 천진한 저녁햇살 수북수북 쏟아지는데 짱뚱어는 새의 발자국 곁에 주저앉아 동그랗게 몸을 움츠린다. 무슨 사연이 깊었음인가… 새의 발자국과 짱뚱어의 몸이 함께 밀물 속으로 사라지는데…. 새여 그대가 남긴 발자국 몇개, 파도에 잠겨서도 한 젊은 시인의 노래가 되었음을 아시는가. - 곽재구<시인> -

 

 

 

 

 

 

 

『취나물국』 - 박남준(1957~ ) - 늦은 취나물 한 움큼 뜯어다 된장국 끓였다. 아흐 소태, 내뱉으려다. 이런, 너 세상의 쓴 맛 아직 당당 멀었구나. 입에 넣고 다시금 새겨 빈 배에 넣으니 어금니 깊이 배어나는 아련한 곰취의 향기. 아, 나 살아오며 두번 열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얼마나 잘못 저질렀을까? 두렵다 삶이 다하는 날, 그때는 또 무엇으로 아프게 날 치려나. '취나물국' 전문

 

 

 

시인은 지리산 자락 막걸리맛이 일품이라는 악양면 산골마을에 산다. 별빛이 초롱초롱 맑고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봄밤 내내 소소하니 곰취의 향내 또한 얼마나 깊을 것인가. 심산유곡 홀로 맑게 자랐음에도 제 몸의 향기를 쓰디쓰게 간직했음은 아름다운 일. 웃자란 취나물 된장국 끓여 소태의 국물 훌훌 들이켜는 시인의 마음이여. 한 세상 쓰게 살았으나 그 향기 먼 별의 마을까지 이를 수 있음이여. - 곽재구<시인> -

 

 

 

 

 

 

 

『님』 - 김지하(1941~ ) -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 저녁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손님 오시거든 마루 끝에서 문간까지 마음에 능라비단도 널찍이 펼치소서. '님' 전문

 

 

 

아침 풀밭…. 광대나물꽃 곁에서는 광대나물꽃 향기가 나고, 꽃마리꽃 곁에서는 꽃마리꽃 향기가 난다. 금창초꽃 곁에서는 금창초꽃 향기가 나고, 별꽃 곁에서는 하르르 웃는 별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바람이여, 아주 작은 숨결로라도 이 마을에서 하루 종일 머무르시게. 임 오시는지, 임 오시는지…. 고개 일제히 쳐드는 저 작은 꽃들의 마음 곁에 머무르시게. - 곽재구<시인> -

 

 

 

 

 

 

 

『이름이 그 남자를 밀고 간다.』 - 한명희(1965~ ) - 그 남자는 키가 크다. 그 남자는 신발도 크다. 그 남자의 이름은 신발과 키를 합한 것보다 크다. 전에는 신발이 그 남자를 밀고 갔다. 신발이 없으면 그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이름이 그 남자를 밀고 간다. 큰 이름이 큰 신발을 신은 큰 남자를 밀고 간다. 잘도 간다. '이름이 그 남자를 밀고 간다' 전문

 

 

 

꽃 핀 이팝나무 그늘 아래 선생과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 시를 읽었다. 선생이 물었다. 남자, 혹은 여자를 밀고 가는 힘은 무엇인가. 스무살, 혹은 스물 몇 살인 학생들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 첫번째 학생이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답변을 듣고 선생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번째 학생은 눈이 맑은 여학생이었다. 그 답은 첫번째의 학생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세번째 학생의 답 또한 같은 것이었다…. 그날 오후 내내 선생은 술을 마셨다. 지혜도 사랑도 명예도 정의도 시도 아닌, 젊은 꿈들의 대답은 돈이었다. - 곽재구<시인> -

 

 

 

 

 

 

 

『고백』 - 최영욱(1958~ ) - 나는 자꾸 바람을 더듬거렸습니다. 머릿속 한편으로는 많은 별들이 흘러갔습니다. 중심을 놓치고 꽃을 바람이라 발음하다 슬그머니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눈치 채지 못한 새들은 젖은 날개를 허공에 묻었습니다. (중략) 이마에 몰래 돋은 낮달을 끌어내리며 세상의 제일 낮은 땅 위에 피어난 겸손한 꽃 한 송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고백' 부분

 

 

 

바람에게 꽃에게, 혹은 바로 곁에 머무는 누군가에게 고백을 한 순간이 있는지요. 그 순간이 너무 설레고 아름다워 꽃을 바람이라고 얼결에 말해버린 적이 있는지요. 새를 노래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는지요. 이마에 송송 돋은 땀방울들을 닦으며 마음 안에는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요. 벗이여, 바로 그 순간 우리들 마음 안의 정원에 못생긴 탑 하나 우뚝 섭니다. 못생겨서 더 보기 좋은 그 탑 곁에 맑은 구름 한 송이 머무릅니다. - 곽재구<시인> -

 

 

 

 

 

 

 

『모시조개』 - 현담(1955~ ) - 당신은 어청도로 가자고 한다. 먼 데 어느 깊은 섬으로나 가자고 한다. 주인 없는 그곳에다 집 하나 지으러 가자고 한다. 이미 눈발 가득한 목소리로 섬에는 동백꽃 섬에는 등대불 빨갛게 불을 밝힌 눈빛으로 서해 먼 곳으로 가자고 한다. 당신의 고운 노을 아래 잔잔히 빛나던 바다는 어린 게들처럼 모래 속에 숨어 들었는지 자꾸만 눈물 속에서도 모래알이 묻어나오는 먼 서해에 가자고 한다. 작은 배 하나를 만들어 당신의 하염없는 등대불을 물결쳐 가자고 한다. '모시조개'전문

 

 

 

떠나기 좋은 철이다. 신록들 도처에서 푸르고 새들 나무 이파리 빛깔로 종일 운다. 발길 이르는 땅 위에 꽃들 맹목으로 눈부신데…. 지평선 가까운 곳 황사바람 인다. 눈물 속에 모래알 묻어나오는 길목에 서서 당신은 어청도로 가자고 한다. 그곳에 토굴 하나 짓고 게들처럼 모래 속에 숨어 살자고 한다. 당신과 나, 등대불과 노을, 작은 배에 실려가는 파도의 인드라망을 보고자 한다. - 곽재구<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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