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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알약19

임마누엘 |2006.11.25 10:53
조회 509 |추천 0

 

*

알 약



1

 수현은 7호선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군자역에서 내려 갈아타는 곳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걷는다. 도착하자 이미 전철이 도착해 있었고 간신히 문이 닫히기 바로 전에 탈 수 있었다. 자리가 없어서 처음에는 서서 가다가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리면서 자리가 생겼다. 앉으려고 보니 임산부가 옆에 서 있어 웃으면서 자리를 양보한다. 작은 일에도 뿌듯함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느꼈기 때문인지 오늘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발이 아픈 와중에도 자리를 양보했다는 뿌듯함이 수현을 즐겁게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임산부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  보는 것을 느끼고 있는 수현은 그 여자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자리 한 번 양보 한것 가지고 너무 자신을 빤히 보니 민망할 수밖에.

“ 저기... 혹시... 최수현씨 아닌가요? ”

이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놀라서 빤히 본다.

“ 최수현씨 맞으시죠? ”

“ 네. 이름은 최수현이 맞는데.. 저를 아시나요? ”

“ 아~ 맞군요. 저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 되서 기억을 못할 수 있겠네요. ”

혼자 질문하고 답하면서 반가워하는 이 여자 앞에서 수현은 난감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은 생각보다 난처한 일이었다. 자신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 승우선배요. 승우선배 같은 과 후배였잖아요. ”

“ 승우오빠요? ”

“ 네. 민정이라고. 왜~ 4년 전 쯤에 수현씨가 아르바이트 하는 커피숍에도 놀러가고 그랬었    는데. 기억 안나요? ”

“ 아~ 기억나요. 안녕하세요? 오랜 만이네요. ”

그제 서야 기억이 난 수현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라서 정말 반가워하고 있었다. 승우의 단짝 친구인 민섭이 데리고 왔을 때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여전히 지금도 아름다웠다. 물론 지금은 임신을 한 상태라 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더 빛나 보였다.

“ 결혼 하셨구나. ”

“ 네.. 수현씨도 아는 사람이에요. ”

“ 네? 제가요? 누구..혹시..민섭씨요? ”

“ 후흣. 네.. 맞아요. ”

놀랍고 반가운 일이었다. 승우가 떠난 뒤로 민섭과 마주칠 기회도 없어서 은근히 소식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뜻하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두 사람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어서 수현은 마냥 즐거웠다.

“ 그럼. 민섭씨 아이군요. 얼마나 된 거에요? ”

“ 이제 7개월 됐어요.  ”

“ 우와~ 신기하다. 정말 축하드려요. 승우오빠도 알면 기뻐할 거에요. ”

“ 승우선배랑 다시 만났군요? ”

“ 네.. 얼마 전에요. ”

“ 우리 그이도 승우선배 소식 궁금해 하던데. 수현씨 연락처 좀 핸드폰에 찍어 줄래요? ”

민정의 핸드폰의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저장하는 수현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전철에서 가는 동안 서로 간의 즐거운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2  

 수현의 핸드폰에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하는 소리가 울린다. 확인하고는 웃는다.

[나 지금 너의 집으로 가는 길이야.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달려갈게. ]

승우가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승우는 회사 일을 하느라 항상 바쁜 사람이지만 매일 밤이면 늦게라도 집까지 찾아와 얼굴을 보고 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더 부지런히 일을 마치고 저녁을 같이 먹을 생각으로 한층 기분이 고조되어 있었다. 잠시 후 승우에게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고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오는 수현. 신사답게 차 문을 열어주고 숙녀답게 다소고시 운전석 옆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매주고 차를 출방시키는 승우가 도착한 곳은 백화점 앞이었다.

“ 여긴 왜? ”

“ 밥 먹자. 오늘은 아주 맛있는 걸로 ”

수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린 곳은 전통 한식집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승우는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수현의 옷까지 걸어준다.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은 음식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얼굴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듯 보인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이제 막 사랑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풋내기 연인들처럼 말이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고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웃고 있었다.

“ 여기 음식 맛있더라. 그래서 너 데리고 꼭 오려고 했었거든. 많이 먹어~ ”

“ 응. 많이 먹을게. 아참.. 오빠. 내가 어제 누구 만났는 줄 알아? ”

“ 누굴 만났었어? ”

“ 오빠도 알면 반가워 할거야. 민정씨 만났다. ”

“ 민정...민정이...? ”

“ 응. 오빠 학교 같은 과 후배..민정씨. ”

“ 아~ 그래? 민정이를 만났어? 이야~ 잘 지낸대? ”

“ 응. 그런가봐. 그리고. 임산부던걸? ”

“ 이야~ 벌써 결혼해서 아이까지? 우리도 빨리 분발해야겠다. 그치? ”

“ 오빠도. 참~ 그 아이 아빠가 누군지 알면 더 놀라울걸? ”

“ 아이 아빠가 누군데? ”

“ 오빠 베스트 프랜드. 민섭씨. ”

“ 뭐어~? 저..정말? 둘이 결혼을 했어? 하..하..하하하하하. 우와~ 잘됐다. ”

“ 그치? 너무 행복해 보였어. 민섭씨도 오빠 소식 궁금해 한다던데. 그래서 내가 내 번호     알려주고 왔어. 나중에 연락해서 한 번 보자~ ”
“ 그래그래. 한 번 봐야지. 진짜 많이 변했겠다. 수현아. 편식하지 말고 이것도 좀 먹어봐. ”

승우가 생선을 집어 수현의 입 앞에 가져다주자 수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가 펴진다.

“ 음. 생선은 정말 싫어. 진짜 못 먹겠어. ”

“ 생선이 얼마나 뼈에 좋은데. 여긴 냄새도 안나.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지. 자.아~ 해봐 ”

내키지는 않았으나 승우가 주는 음식이니 안 받아 먹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미워서 싫어하는 음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편식을 고치자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니 안 받아 먹을 수 없었다. 마지못해 받아먹고는 눈을 감고 씹기 시작한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 보다 먹을 만 했다.

“ 뭐~ 잘 먹네. 잘 먹으면서 그 동안 왜 편식을 하고 그래? 어린애처럼. ”

“ 어렸을 때 먹을 때는 정말 못 먹을 것 같았는데. 지금 먹으니까 괜찮네. ”

“ 암튼.. 완전 어린애라니까. 그러니 내가 돌봐야지. 푸하하하하 ”
그렇게 서로의 밥에 여러 가지 반찬을 얹어 주면서 즐거워하는 두 사람.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인다. 저녁을 다 먹고 나와 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갑자기 의류 매장으로 들어가는 승우. 그것도 여성 의류매장에. 그리고는 이 옷 저 옷을 수현의 몸에 대보고는 혼자 측정하는 승우.

“ 이 옷 예쁘다. 아니..이게 더 예쁜가? 수현아. 이거 한 번 입어봐. ”

“ 오빠...? ”

승우의 손에 밀려 탈의실로 들어간 수현은 옷을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승우의 눈에는 어떤 옷을 입어도 예뻐 보였지만 가장 예쁜 옷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게 이 옷 저 옷 입어 보고는 두벌의 정장과 한 벌의 케쥬얼에 옷을 골라 돈을 지불하는 승우. 그리고 이번에는 2층 아래로 내려가 구두를 고르고 핸드백도 고르고 머리핀이 화장품이며 골라서 구입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이지 이 백화점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다 살 분위기였다.

“ 저기 오빠. 이제 그만 사자.. 너무 많이 샀어. 오빠도 그거 다 들고 다니기 힘들잖아. ”

“ 그래. 이정도면 되겠지? ”

“ 이정도면 되겠지? 라고? 너무 넘치게..많아. ”

“ 그럼 이제 집에 가자. 걸어 다니느라 힘들었지. 이따가 다리 주물러 줄게. ”

승우의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차에 타는 두 사람. 수현의 집 앞에 도착하여 짐을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앉아서 다리를 주무르는 수현을 보는 승우.

“ 자~아~ 내가 얼마나 발 마사지를 잘 하는지 오늘 공개하겠어. 기대해도 좋습니다. ”

“ 오빠. 아니야 오빠가 더 힘들었으니까 내가 안마해줄게. ”

“ 기다려. ”

그리고는 방을 나가더니 잠시 후에 세수대하를 들고 들어오는 승우. 그 모습에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보는 수현.

“ 오빠? ”

“ 힘들어서 발 씻기도 귀찮지? 그래도 씻어야 하니까. 내가 씻어줄게. ”

“ 아우~ 아니야. 오빠. 난 괜찮아. ”

수현이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현의 발을 조심스럽게 씻기는 승우. 그런 승우 침대에 앉아서 바라보는 수현은 이 남자가 너무 사랑스럽기만 하다.

“ 히.히.. 헤..오빠.. 간지러. 헤헤. ”

“ 참아야지~ 밖에 나갔다 오면 이렇게 반신욕이라도 해야 몸이 풀리는 거야. ”

“ 그래도..너무 간지러워. 헤헤헤. ”

“ 수현아. ”

“ 응? ”

“ 나는 오늘 너무 행복했다~ 나 오늘 첫 월급 탔거든. 예전에 너한테 이 것 저 것 사주고    싶었거든. 아버지한테 용돈 받으면서 그 돈으로 사주는 것보다 지금처럼 내가 일하면서     직접 버는 돈이니까. 너한테 예쁜 옷도. 신발도. 모두 다 사주고 싶었어. 내 힘으로 번 돈    으로 너한테 제일 먼저 사주고 싶었어. 그리고 지친 너의 발도 마사지 해주고 싶었거든.    지금까지 널 아프게 했던 모든 것들도. 널 지치게 만들었던 그 시간들도. 내가 모두 씻어    주고 싶었어. 그래서 내 옆에서는 항상 네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웃기만 해준다면 나는 아    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

“ 오빠.........”

너무나 진실 된 승우에 말은 수현의 눈시울을 젖어들게 만들었다. 자신의 발을 마사지 해주고 있는 이 손이 왜 이토록 따뜻하고 부드러운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승우의 정성어린 손길이기에 따스하리라. 승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를 하는 수현.

“ 이마에 키스를 하는 건 말야.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 라는 뜻이래. ”




3

  집으로 돌아온 승우는 거실에 앉아 있는 한 회장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바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다. 그런 승우의 태도에 썩 기분이 좋지 않은 한 회장도 조금은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가버린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물기가 마르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는 승우는 핸드폰을 열어 1번을 길게 누른다. 바로 수현의 번호가 화면에 떴고 신호음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

“ 지금 머해? ”

“ 마무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하고 있던 중이었어. 오빠는? ”

“ 샤워하고 막 나왔지. 목소리가 또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

사랑의 빠진 연인들이 모두 다 그렇듯이 언제나 보고 싶은 수현과 승우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온 선우는 승우와 같은 층에서 생활하는 선우가 승우의 방을 지나치다가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목소리를 듣는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분명 수현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듣고 싶지 않은 소리이지만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 수현아. 사랑해. 사랑한다. ”

다정하게 부드럽게 사랑 고백을 하는 승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선우는 가슴이 심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너무도 슬픈 표정으로 한참을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선우. 아까부터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심장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자 안절부절 못한다. 처음에 수현이 사랑했던 남자가 승우라는 것을 알고 알 수 없는 배신감에 휩싸여 힘들었다. 하지만 선우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난 과거에 매여 자신이 찾은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수현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안 그래도 JD그룹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인 승우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승우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다 죽어가듯 울면서 쓰러지는 수현을 보면서 쓴 웃음을 삼켜야 했었다. 도무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이다.




이사회의가 있어 동작지사를 방문한 선우는 오늘 아침 송 비서에게서 오늘의 일정을 듣는 순간 또 다시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사회의가 동작지사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제일 먼저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았던 얼굴이었는데 어쩌다가 이토록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얼굴이 되었는지. 더 가슴을 죄어 오고 있었다.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 위해 차에 오른 선우는 또 다시 심하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제는 수현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에서 나오는 떨림보다는 가슴이 시려서 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수현이 무거운 서류대장을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먼저 발견했고 순간 무거워 하는 수현에게로 당장 달려가 대신 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몸을 움찔했지만 본능적인 행동을 이성적인 행동이 저지하여 막아서고 있었다. 여전히 힘들게 무거운 서류대장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걸어오는 수현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잠시 후에 요란한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안 그래도 위태위태해 보이던 서류대장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균형을 잃고 다 떨어뜨린 것이었다. 당황하는 수현은 주위를 살피다가 빠른 속도로 챙긴다. 하 나 하 나 차곡차곡 쌓아 올리려고 하지만 계속 무너지고 또 다시 들어올리기가 쉽지 않자 힘들어 하는 수현을 보고는 이제는 이성적인 행동을 누르고 본능적 행동으로 달려간다. 서류대장을 챙겨 자신이 들어 버리는 선우를 보자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수현.

“ 이...이사님. ”

“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

“ 아닙니다. 제가 들게요. ”

“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습니다. ”

“ 아....홍보 마케팅부에요. ”

서류대장을 들고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선우를 따라 수현도 오른다. 엘리베이터 안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에게는 어색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 지금.. 행복하니? ”

갑작스런 선우의 질문에 놀라서 선우를 쳐다보지만 선우는 수현을 여전히 바라보지 않는다. 사실 볼 자신이 없었다. 마음이 흔들릴까봐서.

“ 나한테는 기회가 전혀 오지 않는 거지? ”

선우의 두 번째 질문에도 수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아는데 그 자리에서 행복하다느니. 기회가 없다느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이사님... 저는.. ”

“ 아니다... 말하지 마. 사실 들을 자신 없어 나. ”

그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오른다. 좀 전보다 거리가 더 가까워진 두 사람.

“ 이제 주세요. 제가. 들게요. ”

가는 곳까지 들어다 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지나친 배려가 수현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서류대장을 수현에게 넘겨준다. 다음 층에서 문이 열렸고 간단하게 고개로 인사하고 헤어지는 두 사람.



4

 오늘 아침에 자신의 핸드폰으로 도착한 문자 메시지에는 [저번에 내가 선물한 옷 입고 오늘 오후5시까지 회사 앞으로 와~ ]라는 내용이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한 회장에게 인사를 시키려는 것이리라. 이제는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승우가 이끄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승우를 믿고 있으니 처음 그 문자를 확인했을 때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장롱을 열어 승우가 자신에게 선물한 단아한 정장을 입고 거울 앞에 서는 수현의 표정은 그 무엇도 다 이겨낼 수 있다는 굳은 의지가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시간 안에 맞춰서 회사 앞에 도착한 수현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핸드폰을 꺼내 승우에게 전화를 건다. 몇 번에 신호음이 있은 뒤에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승우의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수현아~ 도착했어? ”

“ 응 오빠. 지금 회사 앞이야. ”

“ 일찍 왔네? 역시 부지런하다니까~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하하하 ”

“ 누가 그래? 오빠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 헤헤헤. 너무 보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오긴 했    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 시간 맞춰서 전화할까 하다가 그냥 했어. ”

“ 응~ 아니야~ 잘했어~ 내가 지금 1층 로비로 나갈게. 로비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가씨~ 돌쇠가 곧 모시러 가겠습니다. ”

“ 하하하. 응 알았어. ”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지. 전화가 끊길 때 나는 ‘툭’ 하는 소리마저 경쾌하게 느껴진다. 집에서 회사까지 올 때부터 조금씩 뛰기 시작한 심장박동 소리는 점점 더 빠르게 그리고 크게 뛰고 있었다. 이제는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왕 이렇게 결정하고 사랑을 지키겠다고 약속도 했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내고 이겨낼 것이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누군가에 손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이 느껴졌다. 승우일 것이다.

“ 누구지? 음.. 손을 만져보니까 남자 손인 거 같은데~ 누굴까? 이야~ 손도 크고 멋있네.     가만..근데 이 손이 누구지? 모르는 남자 손인 거 같은데~ 헤헤헤 오빠. 이제 그만 해~     회사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

수현의 말에 기분 좋게 손을 풀어주는 승우는 장난 끼 가득한 얼굴로 바라본다.

“ 지금 아버지 만나러 갈 거야. 오늘 정식으로 인사드리자. ”

“ 응. 근데 나 조금 떨려. ”

“ 우리 아버지. 어쩌면 너한테 아픔이 되는 말 하실 수도 있어. 내가 미리 사과할게. 그래도    내가 다 막아 줄 거야. 나만 믿고 따라와. ”

“ 응 오빠. 나 하나도 안 무서워. 오빠가 옆에 있을 거니까. ”

엘리베이터에 오른 두 사람은 잠시 본부장실에 들려 승우가 미리 준비해 둔 꽃바구니를 들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수현은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고 손에 땀이 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수현의 마음을 알았는지 승우는 조용히 수현의 손을 잡아 준다. 부드럽게. 그리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수현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회장실 앞에 선 두 사람. 승우가 회장실에 문에 노크를 한다.


 회장실 문이 열리고 문 사이로 승우가 들어온다. 그 뒤를 따라 반갑지 않은 사람이 따라 들어오자 한 회장에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한손은 수현의 손을 잡고 한 손에는 꽃바구니를 든 채 너무도 당당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들 승우를 보자 말문이 막혀버리는 한 회장.

“ 아버지 수현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고 결혼할 여자입니다. ”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최수현입니다. ”

“ 너...지금 네가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게냐? 여기가 어디라고 저런 물건을 함부로 들    이는 게야? 당장 나가라. 당장 . ”

“ 수현이는 물건이 아닙니다. 수현이는 제가 결혼한 여자란 말입니다. ”

“ 누가.. 누가 너희 둘에 결혼을 허락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

“ 아버지께 결혼 승낙 받으러 온 거 아닙니다. 아버지가 승낙을 하시면 더 좋겠지만 안 하    셔도 상관없습니다. 저희는 반드시 결혼 할 테니까요. ”

“ 너..이 녀석... 나가..당장 나가.. 윤 비서. 윤 비서 ! ”

화장실 문을 열고 윤 비서가 들어왔고 호통을 치는 한 회장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승우와 수현은 회장실을 나와야만 했다. 한 회장도 흥분해 있었지만 승우 역시 수현 앞에서 소리치시는 아버지의 행동에 실망하여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승우의 호흡이 고르지 못하다는 걸 느끼고 수현은 일부러 승우 앞에서 웃어 보였다.

“ 아~ 이제야 좀 긴장이 풀리네. 오늘 오빠 멋졌어~ 너무 믿음직스러워요~ 헤헤 ”

수현의 앞에서 소리치시는 아버지에게 실망도 했지만 혹여나 수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 때문에 얼굴조차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승우의 마음을 알고는 이렇게 배려해주고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을 보고 웃어주고 멋지고 믿음직스럽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이 여자가 너무 사랑스러워 당장이라도 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 장소가 회사라는 것 게다가 회장실과 가깝다는 것도 입은 채 수현을 잡아끌어 자신의 품안으로 밀어 넣고 따스하게 안아주는 승우.

“ 힘들었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



5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명동. 모두가 기다리는 주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그 어느 때보다 절정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작지만 아담한 공간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카페의 의자에 앉아 각기 취향에 따른 차를 마시는 경미와 수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 정말? 하하하. 근데..너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한거야? ”

 “ 글쎄. 작정하고 숨기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오빠가 나 때문에 걱정하고 혹여나 회장님과 트러블이 생기는 게 겁나서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된 것 같아. 요즘은 머리가 너무 복잡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와. 휴. ”

“ 그래도 너 지금 행복하잖아? 다른 거 생각 하지마. 그냥 이번엔 너만 생각해. 이런 거 저런 거재고 따지지 말고 그냥 너하고 승우씨만. 응? ”

“ 그래도.. 되는 걸까? 나..? ”

“ 그래. 넌 그래도 돼. 히히. ”

 남들은 사랑을 하면 행복해 하고 즐거운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수현은 사랑도 쉽지가 않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요즘 들어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지 수현의 얼굴은 피죽하나도 못 얻어먹고 사는 사람 같으니 말이다.

“ 나가자~ 오늘은 내가 저녁 멋지게~ 쏜다~ ”

힘차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 경미와는 달리 머뭇거리는 수현을 보고 재촉한다.

“ 뭐해? 안 일어나?  여기서 살려 구요?  히히 ”

“ 아.. 저기 경미야. 나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는데. ”

그제 서야 눈치를 챈 경미는 얄밉다는 표정으로 본다. 카페를 나오는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헤어져 서로 다른 길로 향한다.

 수현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승우에게로 가는 그 길이 행복하게만 느껴진다. 버스를 도착하자 승차하는 수현. 승차하여 자리를 잡기도 전에 출발해서 심하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순간 균형을 잃고 주춤하고 옆 사람을 밀친다.

“ 죄송합니다. ”

간신히 손잡이를 잡고 균형을 잡은 수현은 상당한 오랜 시간을 어지러움 속에 버스를 타야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수현은 아직도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머리를 잡고 차에서 하차한다. 요즘 자주 있는 현상이기에 약국을 발견하고도 무심하게 지나쳐버린다.

 백 미터 안팎으로 승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지러움 증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의 미소를 보이며 승우에게로 달려간다.

“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이렇게 허겁지겁 뛰어오게? ”

“ 치~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오래 기다렸어? ”

“ 아니~ 나도 온 지 얼마 안됐어~ 들어가자.  ”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하루 일과를 나누며 즐거운 두 사람. 시간이 이대로 멈춰만 준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다. 스테이크를 썰어 자신에 것과 바꿔서 재배치하는 승우.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먹여주기도 한다.

“ 근데. 수현아. ”

“ 응 ? ”

“ 너 오늘 왜 이렇게 못 먹어?  입맛에 안 맞아? ”

“ 아..아니. 맛있어. 아까 경미 만나서 커피를 마셔서 그러나? 아니다. 나 멀미하잖아. 버스 오래 타서 그런가봐. 속이 좀 안 좋네. ”

“ 어? 그래? 그럼 소화제 사다줄까? ”

“ 어우. 아니야. 그 정도는 . 오빠 많이 먹어. 오빠 먹는 거만 봐도 배가 불러요. ”

“ 정말? 하하하하.  아~ 쑥스럽다.  ”

둘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 수현의 집 앞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차를 몰고 출발하는 승우. 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밝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드는 수현. 마침내 차가 눈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수현의 자세는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승우를 만나러 가기 전부터  시작되었던 어지러움 증은 그 시간까지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스피린 하나 정도의 힘을 빌려 잠을 청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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