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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속
1
항암치료를 받고 승우의 부축으로 간신히 몸을 이끌고 병실로 돌아온 수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다. 많이 힘들어 하는 수현을 보면서 안쓰러운 승우. 자신이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대신 치료를 받아 줄 수 없어 괴로울 뿐이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수현이 갑자기 반사적으로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간다. 화장실로 들어간 수현은 문을 잠가버린다. 변기에 구토를 한다. 괴로워하는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수현아. 수현아 문 좀 열어봐. 오빠가 등 두들겨 줄게. 수현아~ 수현아? ”
“ 괜찮아...하..하... 나 혼자 할게...하..욱........ ”
“ 수현아.....하........ ”
괴로워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올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저렇게 힘들어 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주는 것이 좋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굴린다. 항암치료 기간에 흔히 나타나는 증상으로 인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구토증상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그렇고 싶었다. 그 병이 자신에게 옮겨져 수현이 더 이상 저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어디까지 인지 알 길도 없었다. 모든지 서로 나누고 싶었는데 기쁨도, 아픔도. 그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물소리가 들리더니 화장실 문이 열리고 수현이 힘겨운 모습으로 나온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서 걷는 도중 다리에 힘이 빠져 쓰러지려는 수현을 승우가 부축한다. 수현을 안아서 침대에 눕히는 승우. 겨우 잠을 청해 잠이 든 수현을 보면서 참았던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수현을 안아서 들어 올릴 때 승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가벼워진 몸이 돼버린 어린 아이 같은 수현을 보며서 눈물을 흘린다.
회사의 본부장 직분을 비서에게 대신 맡기도 며칠 휴가를 내버린 승우. 하루 종일 수현의 옆에서 간호를 하며 지켜주고 있었다. 간신히 잠이 든 수현을 간호하다 깜박 잠이 든 승우. 잠결에 신음소리가 들렸고 놀라서 깨어보니 수현의 신음소리였다. 온 몸에 땀범벅이가 되어 있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심했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응급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다 못 기다리겠는지 안내실로가 간호사를 불러온다. 간호사와 의사가 뛰어와 수현의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고 몸 상태를 체크한다. 너무 놀란 승우는 경미에게 전화를 건다. 그 사이에 의사는 수현을 중환자실로 옮기라는 말을 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된다. 중환자실에 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는 수현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승우.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경미가 들어온다.
“ 승우씨.. 어떻게 된 거에요? ”
“ 체온. 맥박이 급격히 떨어졌대요. 오늘...오늘 밤이...고비래요....하...하.......... ”
손으로 입을 막는 경미.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승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같이 우는 두 사람.
병원 주차장에서 차를 끌어 나오는 승우. 빠른 속도로 주행을 계속한다. 잠시 후 승우가 도착한 곳은 자신의 집 앞이다. 초인종을 누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들어간다.
거실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한 회장. 현관문을 지나 거실로 들어오는 승우를 보자 못마땅한 표정이다.
“ 네가 여긴 무슨 일인 게냐? ”
“ 아버지. ”
“ 누가 네 애비라는 게야? 난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당장 나가거라. ”
“ 아버지... ”
“ 내가 널 끌어내야 나갈 테냐? 오냐. 김 기사! 이 녀석을 당장 끌어내! ”
보고 있던 신문을 집어 던지고 일어나버리는 한 회장.
“ 나가시죠. 도련님. ”
김 기사가 승우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고 하자 뿌리치며 한 회장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는다.
“ 승우..네 이 녀석. 지금 무슨 짓이냐? ”
“ 아버지... 제가...잘못했습니다.... 아버지께 못되게 굴어 못나게 굴어 잘못했습니다... ”
“ 승우..너.... 용서라도 빌려고 다시 들어온 거냐? ”
“ 제가 다...잘못했어요....하...하... 아버지가 하라는 데로 다 하겠습니다. ”
“ 음.. 네가 이제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구나. 그래. 여자한테 빠져 있었던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게지? 그렇지? ”
“ 수현이가.. 수현이가..많이 아파요....하하... 아버진.. 뭐든지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요즘은.. 의학도 발달해서 돈만 있으면 어떤 병이든 치료 가능하다는데.. 아버지가.. 수현이 좀 살려주세요. 아버지.... ”
“ 하하... 그러면 그렇지. 네 녀석이 그렇게 나올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김 기사! 당장 이 녀석 끌어내~ ”
“ 아버지~!!!!! 부탁입니다. 수현이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래요.. 수현이만 살려주시면.. 수현이와 헤어지겠습니다. 다신 만나지 않겠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이 세상에..살아 숨 쉴 수 있게만 해주세요. 아버지..아버지~!!! ”
한 회장에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질게 떼어내고 방으로 들어 가버린다. 한참을 무릎 꿇고 울면서 애원하다가 힘없이 집을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우. 소리 없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자신의 아들인 승우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한 여자 때문에 저렇게도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도 애타게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가며 자신에게 애원하던 아들 승우의 모습이 생각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2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수현.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그 날 밤은 무사히 넘겼으나 문제는 수현이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수현아... 제발.. 일어나..응? 이러지 마.. 나..놀래 키지 마.. 장난 이제 그만해라..제발... ”
손을 잡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애원하는 승우. 며칠 사이에 승우의 모습 또한 환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이러다가는 승우 또한 몸 져 누울 것만 같았다. 수현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승우. 그 때 수현의 손이 살짝 움직인다. 놀라서 수현을 보고 잠시 후 수현의 눈도 서서히 떠지기 시작한다. 응급버튼을 누른다.
“ 수현아? 수현아. 정신이 들어? ”
승우를 보는 수현은 웃어 보인다. 그 미소를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손을 들어 승우의 눈물을 닦아 주는 수현. 곧이어 의사들이 오고 수현의 몸 상태를 체크한다. 안도의 숨을 쉬는 의사들이 표정을 보고 그제 서야 안도의 숨을 쉬는 승우. 다시 병실로 옮겨진 수현.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잡고 있는 승우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 오빠.. ”
“ 응.? ”
“ 왜 이렇게 야위었어..? 마음 아프게. ”
“ 치...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야? 너 때문이잖아. 내 얼굴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하..하.. ”
“ 또...또 운다... 오빠 이제 울보 다 됐네? ”
“ 치... 너....다시는.. 나 놀래 키지 마..알았어? 그럼 혼날 줄 알아. ”
“ 알았어.. 근데 오빠... ”
“ 응? ”
“ 나.. 퇴원하면 안돼? ”
“ 퇴원? ”
“ 응..여기..답답해... 나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오빠. ”
담당 의사 사무실을 찾은 승우.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 안녕하세요.. ”
“ 앉으시죠. ”
“ 선생님... 수현인...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
“ 음... 이런 말씀 드리기 힘들지만 이미 뇌종양 말기 판정을 받은 환자인데다 위험한 고비를 한번 넘겼으나.. 아직도 많은 위험성을 가지도 있습니다. ”
“ 아....하...네..그렇군요..그래요..음.. 저기 선생님? ”
“ 예. 말씀하십시오. ”
“ 수현이가 병원을 답답해합니다. 퇴원해서 집에서 치료를 받는 것은 힘들까요? ”
“ 음.. 환자가 답답해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도 괜찮습니다. 정신 건강에도 더 나을 것이구요. 그렇게 하십시오. 대신에 약은 제 시간에 먹이고 투여하셔야 합니다. ”
“ 예. 알겠습니다. ”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수현. 다시는 이곳에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병 치료만 하다가 병원에서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안은 너무도 낯설었다. 오랜 시간 집을 비웠기에 사람의 온기도 없고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보일러를 키고 수현을 침대로 부축해서 눕히는 승우. 짐을 풀면서 방 정리를 한다. 침대에 누운 수현은 잠이 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깨어났을 때 승우가 없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가니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승우를 발견한다. 조심스레 걸어가 승우의 허리를 껴안는 수현.
“ 수현아... ”
“ 이대로...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이렇게 행복한 시간만 계속 되게.. ”
연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이겠지만 두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였을까. 오늘따라 수현의 작은 희망의 목소리는 더더욱 힘이 없어보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를 하고 있는 승우. 그런 승우를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는 수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수현을 보면서 웃음이 절로 난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기도 한다.
“ 수현아. 그만 봐. 너무 보니까 손이 막 떨린다. 떨려. 히히. ”
“ 싫어. 볼 거야. 잘생긴 우리 오빠 얼굴 볼 거다~ ”
“ 아~ 민망한데.. 앞치마 입고 설거지 하는 모습 ..히히. ”
쑥스러운지 멋쩍은 표정으로 설거지를 하는 승우는 수현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이기에. 한시도 눈을 떼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신의 기억 속에 머릿속에 이 남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내야만 했다. 빠른 시간 안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다른 연인들처럼 천천히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가는 그럴 여유가 수현에게는 없었다. 그 사람이 어떤 습관이 있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에 대해서도 너무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행동 하나 하나도 담아내고 싶었다. 자신의 눈을 통해. 마음을 통해. 기억을 통해. 설령 자신이 죽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고 아무런 흔적 없이 떠난다 할지라도 혼자서 가야하는 외로운 길을 이 기억만으로 외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속으로는 아프지만 겉으로는 웃어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 있기에. 그렇게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띵동. 띵동 ’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고 욕조에 물을 받고 있는 승우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현관문을 열었고 그 앞엔 낯선 남자가 한명 서 있었다.
“ 누..구세요? ”
“ 여기가 최수현씨 집 맞습니까? ”
“ 네.... 맞아요..제가 최수현인데...누구시죠? ”
최수현이라는 말에 갑자기 수현을 덥썩 끌어안는 낯선 남자.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방어할 틈도 없었다.
“ 아이구.. 수현아... 이제 서야 널 보는 구나.. 아이구.. 아이구.. 형님...이제 서야 수현이를 만났습니다. 이제 죽어도 형님 얼굴 뵐 면목이 생겼어요. 아이구 수현아. ”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자신을 보자마자 끌어안더니 이제는 형님이라면서 울기까지 한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수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거실로 나온 승우는 모르는 얼굴의 남자가 수현을 끌어안고 소리 내서 우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 수현아? 지금 머 하시는 겁니까? ”
승우의 단호하고 굵은 저음 소리에 놀라 수현을 놓아주는 남자. 수현을 자신의 뒤로 숨기고 방어 자세를 보인다.
“ 누구십니까? 누군신데 수현이한테 이러시는거냐고요? ”
“ 아.. 나는 수현이 삼촌 되는 사람인데. 그러는 당신은 누굽니까? ”
삼촌?! 삼촌이라는 말에 동공이 커지는 수현. 그리고 멍해진다.
“ 수현이한테 삼촌이 계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잘못 알고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수현. 우리 조카 맞아요. 어렸을 때 봤지만 그때 얼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잘 보면 알아 볼 수 있구만. 수현아. 삼촌이야. ”
“ 저기요.. 이러시면.. ”
“ 아버지 성함 아세요? ”
그 새 눈시울이 붉어진 수현이 매섭게 질문한다.
“ 아..그거야 당연히 알지 수현아~ 형님 성함을 어떻게 모르겠니. 최정훈. 그리고 내 이름은 최정수.. 들어봤지? 내 이름? ”
최정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제는 수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얼마나 그리웠던 이름이었는지. 최정수. 당연히 들어봤던 이름이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께는 남동생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고 4년 전에도 어느 날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한 조폭들이 찾아와서는 삼촌이라는 작자가 빌려간 돈을 갚으라면서 자신의 옥탑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던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 자신의 삼촌이 맞았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 서야 자신을 만나러 찾아 온 것이다.
“ 수현아... 보고 싶었다.. 형님과 형수 돌아가시고 너 혼자 고생 많았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찾아오고 싶어도 내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럴 수가 없었어.. 미안하구나.. 아이구.. 많이도 컸네..그 동안. ”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그런지 어지러움을 느끼고 비틀거리는 수현. 승우가 침대까지 부축한다. 빠르게 약과 물을 가지고 와서 수현에게 먹이고 눕히는 승우. 그리고 잠이 든 수현. 그 모습을 지켜 본 최 정수. 잠든 수현을 확인하고 거실로 나오니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마냥 거만하게 앉아 집을 두리번거리는 최 정수를 발견하고는 승우의 미간이 찌그러진다. 수현이 눈물 흘리고 저 낯선 남자의 행동을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분면 삼촌이라는 사람이 맞는 것은 분명한데 어딘가 이상했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지만 수현의 부모님이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이제 서야 뜬금없이 나타난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승우는 최 정수라는 사람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3
잠든 수현을 옆에서 간호하던 승우는 거실에서 나는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에 짜증이 절로난다. 참다못한 승우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다. 거실에서 편안하게 누워 텔레비전 시청을 하고 있는 최 정수를 보자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수면 중인 수현의 휴식을 방해할까 진정시키려고 노력한다.
“ 저기요.. TV 볼륨 좀 줄여 주시죠. 수현이가 아직 잠든 상태라. ”
“ 아.. 소리? 그래그래.. 그러지 머. 하하하하... 이거 재미있네. 자네도 와서 . 같이 봐. ”
“ 아닙니다. ”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건방져 보이는 자세와 목소리 톤으로 말하는 최 정수.
“ 수현이 애인이라고 했나? ”
“ 네... ”
“ 그럼 조카 사위구만. 하하하. 난 작은 아버지가 되겠구만. ”
최 정수의 말에 비위가 뒤틀렸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며칠 째 수현의 집에서 묶고 있는 최 정수이라는 사람 때문에 수현이 혼자 놔두고 어디를 갈 수가 없었다. 왠지 이 사람 느낌이 안 좋았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수현의 몸을 편안하게 간호하기 위해서는 안정이 필요하고 쾌적한 환경이 필요한데 며칠 전부터 고요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이 집이 소란스러워졌다. 최 정수라는 사람이 오고 나서부터였다. 마음에 드는 면이 없었지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승우. 수현이 잠든 사이 책상 앞에 앉아 회사 일을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가 심하게 깨지는 소리가 난다. 놀래서 거실로 나간 승우. 싱크대 아래에는 유리조각들이 널려져 있고 음식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 하..하..하.. 출출해서 뭐 좀 먹으려고 했는데.. 하하.. ”
깨진 유리조각이며 떨어진 음식들이며 깨끗하게 정리한다.
“ 저 좀 잠깐 보시죠. ”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자신이 차로 태운다. 승우의 차를 보자마자 입이 벌어지는 최 정수. 외제차를 보니 입이 안 벌어 질 수 없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대쯤 끌어 다니고 싶어 하는 차를 조카의 애인이라는 사람이 끌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 이야~ 조카사위. 돈 많이 버나봐. 나이도 그렇게 안 많아 보이는데. 벌써 이런 좋은 차를 끌고 말야. 하하. ”
“ 수현이 삼촌이라고 하셨으니.. 작은 아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 그래그래.. 듣기 좋네..하하. ”
“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수현이는 지금 많이 아픈 상태입니다.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하고 편히 쉬어야 하는데.. 작은 아버님이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신다면.. ”
“ 아파? 수현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건데? ”
“ 음... 뇌종양을 앓고 있어요. 많이 힘들어 합니다. ”
“ 뇌...뇌종양? 그.. 암 덩어리가 머리에 있는..그거 말하는 건가? ”
“ 네.. 맞습니다. ”
“ 아이구... 그렇게 어린 나이에..암이라니.. 아이구..형님.. 어쩌면 좋겠습니까..아이구.. ”
정중히 부탁하려고 밖으로 나온 것인데 온갖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고 있었다. 최정수라는 남자.
모든 빛이 사라진지 오래 된 새벽2시. 모두가 잠이 든 그 시간에 수현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시간 전에 잠에서 깬 뒤로 잠이 오지 않았고 1시간 전 쯤 부터는 또 다시 극심한 두통이 괴롭히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수현은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거린다. 스위치를 찾고 누르자 불이 켜진다. 갑자기 어두웠던 방안이 환하게 바뀐다. 자신의 침대 아래 바닥에서 얇은 이불을 의지해 잠을 자고 있는 승우를 발견하고는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픈 머리를 잡고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승우에게 덮어준다. 그리고 다시 불을 끈다. 시간이 지날 수록 통증은 더 심해져오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뎌낸다. 자신을 간호하느라 회사 출근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고생하는 승우가 안쓰러워. 너무 고마워서. 그리고 미안해서. 아픔과 고통. 통증까지도 속으로 참아낸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수현. 승우. 정수. 암환자에게 좋지 않은 식단을 제외하고 몸에 좋다는 식단으로 편성하다 보니 일반인들에게는 맛이 있을 리 없었다. 입맛이 없는 수현을 위해서라도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밋밋한 음식들을 먹으면서도 며칠씩 굶은 사람처럼 맛있게 먹는 승우와 손 갈 곳이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정수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잠시 후 정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옆에 있던 승우는 정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그리고 눈치를 준다. 수현이 다 먹을 때까지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또 식사가 끝났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승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수현.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정수. 승우가 설거지를 끝내갈 때 초인종이 울린다. 현관문을 열어 보니 경미다.
“ 경미씨. ”
앞치마 차림으로 문을 열어 주는 승우의 모습을 보고 처음엔 웃음부터 나온다. 그래도 너무 보기 좋고 예쁜 모습일 것이다.
“ 이제 살림해도 되겠어요?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
“ 아~ 그래도 되겠어요? 하하하 들어오세요. ”
“ 경미야.. ”
“ 오늘 정기검진 있는 날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왔지~ ”
“ 바쁜데 뭘 그렇게까지 했어. ”
“ 치~ 좋으면서 기집애는~ ”
웃으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낯선 얼굴이 눈에 띈다. 놀라는 경미를 보고 설명해주는 승우. 그러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 안녕하세요? 수현이 친구에요. ”
4년 전에 이 삼촌이라는 작자 때문에 수현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돈을 갚느라 수현이가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성질이라도 부리고 싶지만 이 사람이 이 집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의 착한 친구가 이해하고 용서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 빠른 경미는 자신 또한 무마하기로 한다. 수현의 정기 검진은 2주에 걸쳐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이다. 수현의 외출 준비를 돕던 경미는 얼굴색이 많이 안 좋아진 수현의 얼굴이 마음 아팠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어 보이고 농담 또한 잘 한다. 외출 준비가 끝나고 모두가 밖으로 나온다. 이제는 걷는 것조차 어지러움 증에 시달리느라 누구에 부축 없이는 힘들 만큼 수현의 몸은 쇠약해져있었다. 추운 겨울임을 알리는 찬바람이 불고 사람들의 머리는 사방으로 휘날린다. 추위에 약한 수현을 위해 두꺼운 옷에 목도리 장갑까지 갖추고 나온다.
“ 아~! 체크 리스트.~! ”
길을 가던 승우가 가던 길을 멈춘다.
“ 의사 선생님한테 꼭 보여드리야 하는데. 경미씨. 제 차 알죠? 수현이 데리고 차에 먼저 가 있어요. 빨리 다녀올게요. ”
“ 알았어요. 가자 수현아. 삼촌도요. ”
빠른 걸음으로 집까지 뛰어 가는 승우.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있는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한다.
“ 아. 여깄다. 헤.헤.. ”
그 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의아한 얼굴의 승우.
“ 이 시간에 누구지? 문 열렸습니다. 누구시죠? ”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 두 명이 서 있다.
경미의 부축을 받으며 승우의 차 앞에 도착한 일행. 리모컨으로 차 문을 열고 수현을 뒷 자석에 태운다. 승우의 차를 보자마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차를 뱅뱅 돌더니 운적 석에 앉는 정수.
“ 이야~ 역시. 착용감이 좋단 말야. 비싼거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하하하하. ”
“ 삼촌이 운전하시게요? 승우씨가 할 텐데. ”
“ 아~ 그냥 조카사위 오기 전에 기분 좀 내보려는 거지 . 하하하 이야. 좋구나 좋아. ”
“ 여기가 최수현씨 집. 맞습니까? ”
“ 아..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
“ 아. 예. 저희는 보험회사에서 나왔습니다. ”
“ 보험회사요? ”
“ 네. 우선 최수현씨 안에 계십니까? ”
“ 아..아니요. 지금은 없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
“ 실례지만 최수현씨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
“ 결혼 할 사람입니다.. ”
결혼 이라는 말에 두 사람의 눈빛이 흔들린다.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는 남자들.
“ 아. 그러시군요. 그럼 혹시 최수현씨가 어떤 병을 앓고 계신지는 알고 계십니까? ”
“ 네.. 알고 있습니다. ”
“ 그렇군요. 최수현씨 부모님 되시는 최정훈씨께서 종합 보험을 들어 놓으셨는데 최수현씨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고 하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희가 이미 병원에서 확인한바 있고요. 보험지급금이 있을 예정입니다. 지금 치료하시는 모든 비용은 전액 저희 회사에서 지원됩니다. 그리고 혹여나 최수현씨가 투병 중에 잘못되었을 때는 최고 6천만원까지 보장됩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계신 최수현씨 친인척들 중에는 딱 한 분이 계시더군요. 최정수씨라고. ”
“네...잘 알겠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죠. ”
보험회사 사람들을 보내고 다시 차로 걸어가는 그 시간동안 너무도 많은 생각이 승우의 머리를 괴롭혔다. 그리고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험회사라. 그리고 보험지급금이라. 그것도 수현의 목숨을 담보로. 하.하.하. 어의없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사람들이 한말 중에는 한 남자의 이름이 거론됐다. 최정수. 그 사람들의 말을 요약하자면 만약 수현이 죽기라도 한다면 위로금의 차원에서 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돈은 수현의 친인척 중에 선별해서 받게 된다는 것인데 단 한 명밖에는 없으니 아마도 그 돈은 최정수라는 사람의 차지가 되겠지. 하.하.하.
차안에서 노래도 틀고 DMB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즐기고 있는 정수. 또 다시 두통이 찾아와 눈을 뜨기 힘들어 경미에게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수현. 갑자기 운전석 문이 열린다.
“ 아이쿠! 깜작이야. 놀랬구만. 살살해. 응? 조카사위. 하하하. ”
“ 내리십시오! ”
승우의 단호한 목소리에 놀라서 눈을 뜨고 지켜보는 수현. 너무도 차갑고 냉정한 말투였다. 그런 승우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멋쩍은 표정을 하고는 운전석에서 내려 다시 승우의 옆자리에 앉는 정수.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따라 승우가 이상했다. 병원에 도착한 일행은 접수를 하고 수현은 바로 검사에 들어갔다. 검사를 받고 있는 수현을 따라다니며 수발을 드는 경미와 승우. 그 와중에도 정수는 병원에 간호사들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런 정수의 모습을 결코 좋게 볼 수만은 없었다. 검사가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영양제를 맞으러 수현이 들어가자 뒤따라 경미가 들어간다.
“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
수현이 영양제를 맞는 동안 승우는 담당 의사를 찾았다. 그 뒤를 따라 어슬렁 어슬렁 정수가 들어온다.
“ 어~ 한승우씨. 그래요. 요즘 수현양은 생활에 지장 없이 잘 지냈습니까? ”
“ 네. 비교적 잘지냈습니다. 저한테 잘 말은 안하지만 두통이 심해 힘들어 하는 것 같긴 합니다. 통증을 줄여 줄 수는 없을까요? ”
“ 음.. 통증을 줄이려면 이보다 더 독한 약을 써야 합니다. 수현양의 몸이 많이 쇠약해졌던데 견뎌줄지...음.. ”
“아...그렇군요...”
“ 네..근데.. 여기 이 분은? ”
의사가 정수를 가리키며 말한다.
“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수현이 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하하.. ”
“ 삼촌이시라면.. 보호자..”
“ 네.. 맞아요. 보호자. 제가 수현이 보호자입니다. ”
보호자라는 말에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승우.
“ 네. 그러시군요. 앞으로는 수현씨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아주세요. 마지막 남은 시간은 보다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주위 사람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
“ 마지막이라니요? 우리 수현이가 죽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하... 아이구..형님... 어쩌면 좋습니까.. 아이구 형님. 수현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 수현이 살려주십시오. 선생님..꼭 살려주십시오. ”
이미 승우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슬프기고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가 절망스럽기까지 한 의사의 말 한마디였다.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한 명의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죽는 다면 이보다 더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절대자라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거둬가고 수현이를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벌써 몇 번째고 의사에게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말이었다. 죽음이라는 무서운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진 않았으나 마지막이라는 말로 순화시켰을 뿐이었다.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교차되고 있을 때 옆에서는 정수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적어도 승우 눈에는 호들갑 떠는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담당의사에 방에서 나온 두 사람.
“ 잠시.. 저 좀 보시죠. ”
영양제를 다 맞고 나온 수현. 경미는 잠시 화장실에 가고 옆에 없었다. 담담의사의 방에서 나오는 승우와 정수를 발견하고는 웃으면 부르려고 하는데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어두웠던 것이 걱정스러워 뒤 따라 간다.
비상계단으로 정수를 인도하는 승우. 어두운 표정의 승우를 보면서 내심 겁을 먹고 따라 온 정수. 뒤를 돌아 뒤따라오던 정수의 목덜미를 잡아 벽에 내려친다.
“ 아..아니.. 조..조카사위.. 갑자기 이게..무. 무슨.. ”
“ 당신 눈엔 사람 목숨이 그렇게 하찮은가? 사람 목숨보다 그까짓 돈이 더 중요해? ”
“ 아니..이봐. 조카사위. 이것 좀 놓고 얘기하지.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흥분을..응? ”
“ 수현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당신이라는 사람 말로 듣기만 하고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았던 애야.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도 돌아가신 후에도 당신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그랬던 사람이 뜬금없이 삼촌이라면서 나타나서는 .. 부모님 돌아가시고 혼자서 힘들었던 수현이 앞에...이제 서야 나타나서는 보호자 행세를 하는 게 이상했어. 처음부터 이상했었다고! ”
“ 왜 이러시나? 아니..정말..왜 이러는 거야? 응? ”
“ 보험금.. 당신의 최고 목적이지! 평생 조카 같은 건 돌아보지 않고 살려고 했을 테지만 수현이 앞으로 부모님이 들어 놓으신 보험 때문에! 그리고 수현이가 뇌종양이라는 사실을 어디선가 듣고 그까짓 보험금 타겠다고 수현이 앞에 다시 나타났잖아!. 아닌가? ”
“ 아.. 그..그건.. 오..오해라고.. 오해하지..”
“ 당신이 인간이야?! 인간이냐고?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친 조카 딸이 죽기를 바랄 수 있지? 6천 만원이..뭐라고,,, 그게 뭐라고! ”
“ 조카사위.....저기.. ”
정수의 목덜미를 잡은 승우의 손의 힘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수현. 뺨에는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어디에도 자신의 핏줄을 만날 수 없을 것이고 혼자 남았다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4년 전에 돈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건 이미 과거에 불과했다. 이미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돼버린 자신이지만 삼촌을 만났다는 것이 절망과 죽음의 고통과 싸우는 수현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 앞에 나타났던 거라니!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가는 수현.
“ 좋아. 돈 때문에 수현이 찾은 거라면. 그 돈 내가 주지!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다시는 수현이 앞에 나타나지 마! 나중에 따로 연락 할 테니 기다리라고.! ”
그제 서야 잡고 있던 목덜미를 놔주고 나가버리는 승우. 오랫동안 목덜미를 잡혀있던 지라 괴로웠다. 한 동안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정수.
힘없이 걸어오는 수현을 발견하고는 경미가 뛰어온다.
“ 수현아? 어디 있었어? 찾았잖아. ”
“ 어? 어.. 의사선생님 좀 잠시 뵙고 왔어. ”
“ 너.. 울었어? 눈이 ..”
“ 어? 아...응... 그냥. 좀. ”
승우가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누구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이었던
승우였지만 수현 앞에서는 누구보다 순하고 밝은 얼굴을 보인다.
“ 수현아. 영양제는 다 맞았어? ”
“ 응? 응. ”
“ 그럼 이제 집에 가자. ”
“ 오빠. 삼촌은..? ”
“ 아.. 작은 아버지는 볼 일이 좀 있으시다고 먼저 가셨어. ”
“ 아... 그렇구나... ”
“ 자~ 아. 집에 가자. 오늘 검사 받느라 우리 수현이 힘들었지? 가자. ”
“ 응. ”
승우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 밖은 나오는 수현. 그리고 경미.
4
침대에 누워있는 수현. 수현의 오른팔을 걷어 링겔을 손수 놓고 있는 승우. 이제는 간호사 못지않게 주사를 놓는다. 바늘이 살을 지르고 들어가자 수현의 미간이 주름이 잡힌다. 그렇게 수현이 힘들어 할 때마다 똑같은 아픔을 느끼는 것은 승우도 마찬가지였다. 약이 정확히 투여 되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수현을 보며 웃어 보이는 승우. 수고했다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날로 체중이 줄어가는 수현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밤마다 통증이 찾아와 괴로워하는 수현을 보면서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통증을 덜어주기 위한 진통제를 놓아 주는 일 밖에는.
“ 수현아. 마트에 좀 다녀올게. ”
“ 응. 오빠. ”
승우가 나가고 수현은 화장대 앞에 앉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 사이에 자신의 얼굴이 변화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갑자기 서러워진다. 승우 앞에서는 차마 마음껏 울지도 못했는데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그제 서야 쏟아지기 시작한다. 소리 내서 울어 본 기억도 희미해졌었다. 아파도 힘들어도 속으로만 울었던 자신이 오늘따라 한 없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 때 어디선가 폰 울리는 소리가 나고 주위를 돌아보다 침대에 놓여 있는 승우의 핸드폰을 발견한다. 발신번호를 확인하니 선우였다. 아직도 남아 있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손으로 뺨을 훔친 뒤 전화를 받는다.
“ 승우형! 그게 ..그게 정말이야? ”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들려오는 선우의 다급한 목소리. 순간 놀라서 자신의 승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힐 타이밍을 놓친다.
“ 그게 사실이야? 사직서를 냈다는 게? ”
사직서? 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휴직계가 아니고 사직서를 냈다는 것이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선우씨? 오빠가 사직서를 냈다고요? ”
“ 아... 수현아... ”
통화를 마친 후 얼굴이 굳어버린 수현은 한참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승우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에 물건을 함부로 만진 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나름대로 수현에게도 이유가 있었으니 미안해하지 않기로 생각하기로 한다. 열심히 가방을 살피다 못 보던 흰색 통을 발견하고는 꺼낸다. 겉에는 아무런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았다. 뚜껑을 열어 안에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알약이 들어 있었다. 똑같은 모양과 같은 크기에 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자신이 항상 먹는 약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승우의 가방에서 나왔으니 승우가 복용하고 있을 텐데.
“ 수현아! ”
마트에 간다던 승우가 언제 돌아왔는지 수현에게 뛰어와 들고 있던 약통을 낚아챈다.
“ 오빠.? ”
“ 맛있는 거 많이 사왔어. 오늘은 특식 많이 만들어 줄게. ”
“ 오빠 어디 아파? 무슨 약이야? ”
“ 영양제.. 피곤할 때 먹으면 효과 있다면서 선우가 챙겨주더라. ”
“ 아~ 영양제구나. 그럼 나도 가끔 먹어줘야 겠다. ”
“ 안돼~! ”
“ 아우. 깜짝이야. 너무 하는 거 아니야? 혼자 건강해지려구? ”
“ 하하하. 그런 거 아니네요. 수현이 너는 영양제도 의사 선생님께 물어봐야해. ”
“ 알아. 치~ 히히 ”
웃으면서 농담 주고받는 넘겼으나 수현은 이상했다. 영양제라고 말하는 이 약통의 약들이 심상치 않았다. 너무도 격렬하게 반응하는 승우의 행동에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는다. 승우가 낚아채기 직전에 약통 안에 있던 알약 하나를 손에 쥐고 주머니에 넣는다. 승우가 모르게. 그날 저녁에는 경미가 찾아왔고 저녁을 먹으면서 한가롭게 보내고 있었다. 승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경미에게 그 알약을 꺼내며 작은 소리로 말한다.
“ 경미야. 이 약 무슨 약인지 좀 알아 봐죠. ”
“ 약을? 누가 먹는 건데? ”
“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
경미가 돌아간 후에 수현의 잠자리를 봐주는 승우. 그런 승우를 침대에 누워서 바라보는 수현. 승우가 침대 옆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려고 하자 수현이 승우의 손을 잡는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승우 앞에서 밝게 웃어 보인다.
“ 나..잠버릇 안심해. ”
“ 응? ”
“ 오늘..내 옆에서 자면 안 돼? ”
“ 네 옆에서? 안 불편하겠니? ”
“ 응.. 오빠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
“ 그래~ 옆에서 팔베개 해줄게. 오늘 내 팔이 엄청 저리겠지만 말야. ”
“ 뭐 어~ ? ”
“ 하하하하. 장난이야. 장난. 자아~ 이리로 누워봐, 꽉 안아 줄테니. ”
침대에 누워 팔을 펴는 승우. 기분 좋게 승우의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이렇게 나란히 누워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추운 겨울인 만큼 잘 때로 몸이 움츠러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거나 두꺼운 이불을 덮음으로서 추위를 이겨낸다. 그러나 승우의 품은 보일러의 따스한 온도보다도 두꺼운 이불보다도 따뜻하고 포근했다. 오늘은 왠지 잠을 깊이 잘 수 있을 것만 같다.
병원을 찾은 경미. 집안의 담당 의사를 맞고 있는 김 박사를 찾아간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 어~ 경미야. ”
“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
“ 요즘은 네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이니 반가워해야 하는 거냐? ”
“ 하하. 그런가요? 그래도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제가 요즘 바빴거든요. ”
“ 바쁘기는.. 뭘, 바쁜 사람이 오늘 여기는 웬일로 온 거지 ? ”
“ 하하. 아.. 저기.. 이거요. 이 약... 무슨 약인지 좀 알아보려고요. 약국을 가도 알 수 있겠지만 김 박사님도 뵐 겸 해서 일부러 찾아왔어요. ”
수현에게서 받은 알약이었다. 알약을 건네받은 김 박사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한 참을 보다 입을 여는 김 박사.
“ 이 약.. 어디서 난 게냐? ”
“ 네? ”
“ 이 약.. 어디서 난 것이냐고? ”
“ 제 친구가 갖고 있더라고요. 왜요? 박사님? ”
“ 친구가 이 약을 가지고 있었어? 일반 약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약인데. 많이 가지고 있든?”
“ 글쎄요. 한 알밖에 안 주던데요. 무슨 약인데 그러세요? ”
“ 이 약은. 일종의 수면제야. 수면제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잘 알지? ”
“ 그럼요.. 잠을.. ”
“ 그런데 이건.. 일반 약국에서 구하기 힘든 수면제라는 말이다. 특제로 제조하는 것이고 일반인에게도 잘 안 팔지. 한 알 정도면 몰라도 다섯 알 이상을 복용하게 되면 위험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친구가 이 약을 가지고 있다니.. 참.. ”
김 박사의 방을 나오자마자 수현에게로 전화를 거는 경미.
경미의 전화를 받고 난 수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방문을 열고 승우가 링겔을 들고 들어온다.
“ 자아~ 주사를 맞을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마음에 준비를 하시지요. ”
웃으면서 다가오는 승우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수현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승우. 또 다시 웃으면서 수현의 팔을 잡는다.
“ 자아~ 아가씨. 팔을 주시지요. ”
승우의 자신의 팔을 잡자 빠르게 빼버린다. 수현의 행동의 조금은 놀란 승우의 동공이 확대된다.
“ 수현아? ”
“ 주사 안 맞아! ”
“ 어? 그게 무슨 소리야? ”
“ 주사 안 맞는다고! 귀 먹었어? ”
“ 수..수현아? 왜 그래? ”
갑자기 일어나 승우의 가방을 뒤져서 그 알약 통을 꺼내든다.
“ 이 약..... 뭐야? ”
“ 저..번에 말했잖아. 영양제라고.. ”
“ 영양제? 영양제! ”
뚜껑을 열어 알약을 수현의 입속으로 넣으려고 하자 재빠르게 수현의 손을 저지시킨다.
“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막아? ”
“ 왜 막긴.. 넌..의사.. ”
“ 영양제라면서! 영양제는 몸 좋아지라고 먹는 거잖아. 그럼. 나도 먹어도 되는 거 아냐? ”
“ 수현아.... 왜 그래? ”
“ 왜 그러냐고? 지금 그 걸 몰라서 물어? 이거.. 수면제잖아! 일반 약국에서도 판매 안 하는 독한 수면제잖아! 이걸 이렇게나 많이 왜 가방에 넣고 다니는데? 왜? ”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것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승우.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회사에 사직서 제출 했다면서...? 휴직계가 아니고..사직서를 !! ”
“ 수현아..그건. ”
“ 왜 그래? 갑자기 오빠.. 왜 그래?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니까. 내가 얼마 못 산다니까. 오빠도 살기 싫어서 그래? 그래!? 그래서..회사도 때려 치고 수면제도 미리 챙겨뒀어? 나 죽으면 따라 죽기라도 하려고! ? 그래? ”
큰 소리조차 내기 힘든 체력이 되 버린 수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너무 속상하고 아파서 인정하기 싫어서 발악을 하고 있었다. 양 손에 주먹을 불끈 쥐는 승우. 참고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 이럴 거였음.. 오빠 내 옆에 두지 않았어! 이렇게 나약하게 마음먹을 사람이라는 거 알았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오빠 밀어 냈을 거라고~! 지금도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나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가~! 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가란 말야! ”
수현을 끌어안는 승우. 그런 승우를 밀어내려고 발버둥치는 수현. 그럴수록 더욱 더 세게 안아버린다.
“ 수현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러지 마. 오빠가... 잘못했어.. ”
“ 놔...놔!! 놓으라고! 이렇게 바보 같이 굴 거면 가라고..하.하.하...앙.앙.. ”
한참동안을 안고 울다가 조금은 진정이 된 두 사람. 더 이상 승우를 밀치며 소리치며 발악하지 않았다. 안고 있던 승우의 손이 점점 풀린다. 수현이 승우를 바라본다. 승우도 수현을 바라본다.
“ 오빠... ”
“ 으...응.? ”
“ 사..랑해.... ”
“ 하....사랑한다. 수현아.. ”
“ 오빠.... 나하고 약속해. ”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수현의 눈은 무엇인가 진지하다.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 언제가 될지는 모...음....모르겠지만... 만약에... 내가 오빠 곁을 떠..나면..반드시... 잘 살겠다고.... 씩씩하게...밥도 잘 먹고 잘 자고..잘 살아가겠다고. ”
“ 수현아....... ”
“ 빨리... 약속해.. ”
“ 그래... 약속...할게. ”
“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잘못 되도.. 절대로.... 절대로.... 따라 죽겠다는 생각은... 안하겠다고... ”
이번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승우. 눈물만 흘린다. 그런 승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의 대답을 재촉한다.
“ 빨리.. 약속해.. ”
“ 하...수현아... 수현아... ”
“ 오빠~ 약속할거지? ”
“ 그래...약속해... 나쁜 생각 같은 건....하지 ..않을게.. 수현아.. ”
5
JD그룹 회장실. 윤 비서는 한회장의 하루 일과 스케줄을 설명한다. 줄줄이 설명하는 윤 비서의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회장의 시선은 공허했다.
“ 그 아이 말일세. ”
“ 누구를? ”
“ 최수현이라는 아이 말이야. ”
“ 예. ”
“ 뇌종양 말기라고 했나? ”
“ 예. 담당의사말로는 살기 어렵다고 했답니다. ”
“ 음.. 승우 그 녀석.. 마음고생이 심하겠군..”
“ 아마도 그럴 거 같습니다. ”
“ 승우가 사직서를 냈다지? ”
“ 예.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
“ 그래. 잘 했어. 수리하지 말고 놔두라고. ”
“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
회장실을 나오는 윤 비서는 한회장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공과 사는 무서울 만큼 구분하고 자신의 자식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지 않으면 가차 없이 무시해버리는 한 회장이었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윤 비서 자신이 한 회장의 비서로 일하는 동안에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들어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일이 자식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한 여자를 사랑한다며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을병에 걸린 여자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아들 승우를 보면서 예전 같았다면 ‘못난 녀석 ’ 이라든지 ‘ 쓸개 빠진 놈’ 이라는 말을 할 법도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승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한 회장은 속으로 걱정했으면 했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회장실을 나오는 윤 비서.
‘ 회장님도 이제는 많이 늙으셨군 .. ’
온 세상이 하얀 세상이 되는 추운 겨울임을 알려주는 듯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수현은 창문에 부딪히는 눈송이를 만져본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에게는 침묵이 흐른다.
2주가 어느 덧 지나 항암 치료를 받기위해 병원을 찾은 두 사람은 내내 표정이 어둡기만 하다. 누가 환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승우의 얼굴 또한 야위어있었다. 환자의 보호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이기는 했지만 누구라도 이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독한 약물을 투여하는 일이라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는 항암 치료라는 것은 극심한 고통과 통증을 동반해야 하는 일이었다. 간호사의 말과 함께 무참하게 주사바늘을 꽂는 모습을 보다 눈으로 보기 힘든지 밖으로 나와 버리는 승우. 승우의 두 손은 땀이 흐를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약하게 수현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듣는 것이 가슴 아파 밖으로 나온 것인데 이곳까지 수현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승우는 이제 울보가 다 되어버렸다. 어떤 장소이든. 어떤 상황이든 눈물이 나는 게 먼저였다.
“ 한승우씨. ”
“ 아~ 선생님. ”
“ 환자의 보호자는 더 잘 먹고 잘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힘들죠. 힘냅시다. 우리. ”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는 그 손길. 그 위로의 말들이 승우의 눈을 더 촉촉하게 만든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약을 받아 병원을 나오는 두 사람. 병원을 다녀오면 더 힘들어 하는 수현을 부축하며 차로 이동한다. 차에 탑승하고 출발하려고 하자 수현이 승우의 팔목을 잡는다.
“ 오빠. 우리 거기 가자. ”
“ 거기?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선유도 공원이다. 4년 전 수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로 이곳을 찾았었다. 그 뒤로는 두 사람이 이곳에 함께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선유도에 도착하자 수현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요즘 들어 찾아 볼 수 없었던 오랜만에 밝은 웃음이었다. 사실 승우는 이러다가는 수현이 웃음마저 잃어버리고 좌절할 것이 걱정되고 영영 예전처럼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할게 될 것이 가슴 아프기만 했었다. 그러나 4년 만에 찾은 선유도 공원에서의 수현은 모든 시름과 아픔을 잊어버리기도 한 사람처럼 행복한 웃음 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너무도 소중한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자신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자신에게 그럴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걱정 없이 아무런 아픔 없이 마냥 두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느낌 그 마음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4년 전 자신의 생일 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었다. 그리고 바로 이 장소. 이곳에서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시가 벽면에 예쁘게 쓰여 져 있었고 예쁘게 물든 붉은 하트 장미 속에 달콤한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미 4년이나 지났고 추운 겨울이라 하트 장미는 없었지만 벽면에 사랑의 시는 4년 전과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벽면에 쓰여 진 글씨를 하나 하 나 만져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승우.
“ 오빠. 우리 사진 찍자. ”
“ 사진? ”
“ 응. 우리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잖아. ”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벽면을 배경을 삼아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셀 카를 찍는다.
“ 치~즈 ”
벽면에 기대어 벤츠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두 손을 꼭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 수현아. 춥지는 않아? ”
“ 아니. 안 추워. ”
갑자기 일어난 수현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승우에게 매주기 시작한다.
“ 수현아. 네가 하고 있어. ”
“ 아니야. 해주고 싶어. 오빠 안 춥게..히히. ”
“ 아~ 멋있다. 우리 오빠. ”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수현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는 승우. 천천히 다가와 승우의 이마에 키스하는 수현.
“ 이마에 하는 키스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라는 뜻이라고 하길래... 당신을 존경합니다. ”
그리고는 다시 승우의 옆 자리에 앉는 수현. 이번에는 승우의 넓은 어깨에 살포시 기댄다. 그런 수현의 마음을 알았는지 오른 팔을 펴 수현의 어깨를 감싸 안아 준다. 수현의 왼손과승우의 왼손은 접착제를 붙여 놓은 것처럼 붙어 있었다.
“ 오빠.. ”
“ 응? ”
“ 오빠... ”
“ 응? ”
“ 승우 오빠.. ”
“ .....응..? ”
승우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로 계속 해서 부르는 수현. 그런 수현의 마음을 알기에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는 승우.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서로의 이름을 부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 승우 오빠.. ”
“ ......으...응.. ”
“ 나... 졸려.... ”
“ ...... 그...그래... 우리 수현이 졸리구나.... ”
“ 으....응...나.잘게. 이따가 ...집에..갈 때 깨워........줘.... ”
접착제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꼭 붙어 있던 수현의 왼손이 힘없이 풀려 떨 구어 지려고 할 때 잽싸게 승우가 잡는다. 가슴이 처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온 세상의 시간이 갑자기 멈춰버린 것처럼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이 세상에는 자신과 이 여자만 있는 것처럼. 좀 전부터 심하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수현의 심장 소리마저도. 숨을 쉬는 소리마저도.
“ 수..수현아,,,? 자니..? ”
하.하.하. 들리지 않는다. 수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제 서야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내린다.
6
눈송이가 휘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수현의 부모님이 계신 곳. 그 나무.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는 승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선우와 경미. 검은색 정장 차림에 어두운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이곳에 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현의 유골을 들고 있는 승우는 부모님이 계신 곳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수현의 유언 아닌 유언 때문에 이곳까지 왔으나 뿌릴 수 없었다. 이렇게 수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 시간이 넘게 서 있기만 하는 승우를 보며 가슴 아파 하는 선우와 경미.
“ 형..... 이제... 수현이 보내줘야지. ”
아무런 대답도 없는 승우. 유골이 든 상자를 더 꽉 껴안는다.
“ 승..승우씨.... ”
승우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수현이 죽었다는 사실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 옆에 있었는데 같이 밥도 먹고 웃고 대화도 했었는데 한 순간에 없어졌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곳에 유골을 뿌린다면 그 죽음을 수현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이니 더더욱 보낼 수 없었다. 상자를 끌어안고 털썩 주저 않아 소리 내서 울기 시작하는 승우.
“ 안돼....안돼 ..수현아....이렇게.....안돼... 수현아..... ”
수현의 죽음 앞에 눈물 흘리고 애도하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온 산 곳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현이 떠난 후 방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은 지 5일이 지났다. 그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는 승우. 마치 죽기라도 할 사람처럼. 모든 것을 잃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우.
“ 형.. 아주머니가 죽 좀 끓여 주셨어. 먹어봐. ”
아무런 대답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승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선우의 마음 또한 아려온다.
“ 형! 일어나! 형 이러다가 병난다고. 일어나서 좀 먹어봐. 응? ”
“ 놔둬라! ”
“ 아버지.. ”
“ 죽은 여자 하나 때문에 저렇게 못난 행동하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아줌마는 죽까지 끓여 받쳐? 놔둬!! 배가 고프면 알아서 먹을 거다! ”
“ 아버지..하지만.. ”
“ 놔두고 거실로 나와라. ”
한회장이 나가고 선우도 뒤따라 나간다.
거실에 앉아 신문을 보는 한 회장.
“ 아버지. 형 저러다 무슨 일낼지도 모릅니다. 이 박사님 부를게요. ”
“ 그럴 필요 없어. ”
“ 형? ”
승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수현이 떠난 후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게다가 외출 복장으로.
“ 어디..가는 거야? ”
“ 응. ”
그리고는 인사도 없이 현관문을 나가버리는 승우. 그런 모습이 못 마땅한 한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차도 없이 시내까지 걸어 나온 승우. 아무런 표정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걷기를 두 시간. 주위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람들 많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승우를 밀치고 지나가자 뒤틀 거리는 승우. 조금은 정신이 들었는지 주위를 두리 번 거린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멀리 가버렸는데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연인들을 보니 행복해보였고 직장인들도 바쁘게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한 것 없었다. 아무것도.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또 다시 수현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오자 자동적으로 눈물이 난다.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차도로 걷기 시작하는 승우. 그 때 승용차 한 대가 커브를 돌아 고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신나게 달리던 운전수는 자신의 눈앞에 차도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인다.
“ 빵빵!! 빵빵!! ”
큰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승용차의 소리를 듣지 못하다가 옆을 보는 승우. 차가 자신에게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서 피하라는 다른 사람들의 손짓이 보였고 달려오는 차에서는 듣기 싫을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피하지 않는다.
“ 끼이익~!!!! ”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승우의 코앞에 간신히 멈춰선 승용차.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나가던 행인들도 안도의 숨을 쉰다. 승용차가 자신의 눈앞에서 멈추는 순간 마취에서 깨어나듯 무엇인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 왜 그래? 갑자기 오빠.. 왜 그래?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니까. 내가 얼마 못 산다니까. 오빠도 살기 싫어서 그래? 그래!? 그래서..회사도 때려 치고 수면제도 미리 챙겨뒀어? 나 죽으면 따라 죽기라도 하려고! ? 그래? ’
‘ 약속해... 내가 잘못 되도.. 절대로.... 절대로.... 따라 죽겠다는 생각은... 안하겠다고... ”
그제 서야 정신이 드는 승우. 갑자기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진다. 승용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차에서 내려 승우에게 다가온다.
“ 당신 미쳤어?! 죽을 려고 작정했어? 응? 누굴 살인자로 만들려고 작정했냐고! ”
목덜미가 잡힌 상태로 추궁을 당하는 승우. 주위사람들의 만류에 진정하고 다시 길을 가는 운전수. 힘없이 걸어가는 승우.
‘ 수현이...너..밉다... 널 따라갈 수도 없게 만드는구나... 너 없는 세상이.. 나에겐 어떤 세상인지....넌 모르지...? 그렇지..? ’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있는 승우. 카페에 앉아 생각한다. 대학시절 수현과 처음 만났던 때부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던 그 순간들. 수현과 함께 했던 시간을 되새겨 본다. 웃음이 나기도 하다가도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한 수현이와 함께 한 그 시간을 어떻게 잊겠는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가겠지.
“ 승우씨. ”
“ 아~ 경미씨. 왔어요.?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사람 온지도 모르고. ”
“ 아...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단절된다. 수현을 통해 연결된 관계라 두 사람이 만나면 한 여자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 오늘 승우씨 보자고 한건. 전해 줄게 있어 서에요. ”
“ 저한테요? ”
“ 네... 이거요.. ”
경미가 봉투 하나를 꺼내 민다.
“ 이게 뭐에요? ”
“ 이틀 전에 저한테 편지가 도착했어요. 주소도 없고 이름만 달랑 써 있어서 간신히 저한테 온 편지라는 걸 알았죠. 그 편지는 수현이가 저한테 보낸 마지막.. 편지였어요. 저한테 보낸 편지 말고도 한통의 편지가 더 있더라고요. 수현이가 승우씨 한테 보내는 편지 말이에요. 걱정은 안 해도 되요. 승우씨 편지는 안 읽어 봤으니까요.”
집으로 돌아온 승우. 거실에서 신문을 보며 차를 마시는 한 회장.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 너는 애비를 봐도 인사 할 줄 모르냐? ”
“ 다녀왔습니다. ”
“ 이제 너도 그렇게 시간 낭비만 하지 말고. 다시 회사 나와! 그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니지나 말고 말이다! ”
“ 싫습니다. ”
“ 뭐~어? 싫어? 싫다고?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냐? 응? 어린애들이 하는 불장난 그 만큼 했으면 됐지. 또 뭐가 남았어? 이젠 그 아이도 죽어서 불장난 할 상대도 없을 텐데. 무슨 고집을 그렇게 부려?! ”
불장난이라는 말에 울컥하는 승우. 뒤를 돌아 2층으로 올라가려다 멈춰 선다. 뒤를 돈다.
“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큰 아들을 잃으셨습니다. 잊으셨습니까? ”
“ 뭐? 뭐라고? ”
“ 그리고..하나 더.. 아버지가 말하시는 그 불장난...그리고 그 상대가...절 살렸다는 거 알아두십시오. ”
“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
“ 그 사람 아니었음. 아버지는 절 평생 가슴에 묻고 사셔야 했을 겁니다. 부모 보다 자식이 먼저 가면 부모는 자식을 땅에 묻지 않고 가슴에 묻고 산다는 말 아시지요? 그 사람이 절 살렸다는 말입니다. ”
“ 아니..저..저.저.. ”
그리고는 2층으로 올라가버리는 승우. 방으로 돌아온 승우는 가방에서 편지 한통을 꺼낸다. 수현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 사랑하는 승우오빠.
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
길 가다가 부딪혀서 내가 오빠 옷에 커피 흘렸었잖아. 그래서 아버지 유품인 만 연필 담보로 맡기고..그 만 연필 때문에 우리가 연결될 수 있었어.
그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어.
우리 부모님이 나 혼자 두고 떠나시는 게 가슴 아프고 나한테 너무 미안해서 오빠 같은 사람을 내 곁에 보내 주신 게 아닐까..하고 말야.
오빠를 사랑했던 그 시간들...
그리고 오빠에게 사랑 받았던 그 시간들은..
나는 평생...영원히...잊지 못 할 것 같아.
오빠...사랑하는 승우오빠.
나는 이 기억. 이 사랑..
다 끌어안고 떠날게.. 내가 다 가지고 떠날게..
오빠는..오빠는 말야... 내 생각에도 눈물 나지 않고 아프지 않을 정도만..
그 정도만 가지고 있어줘..
나 먼저..가도..용서해주라..
오빠 옆에서 평생 사랑스런 아내가 되어 오빠 닮은 아이도 낳고 예쁘게 살다가 ..
오빠하고 같이 떠나고 싶었는데.. 나에겐 그럴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나봐..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오빠...승우오빠......
나 없어도.. 잘 지내야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나중에..정말 나중에.. 다시 만나자..
오빠... 이 세상에서 날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줬던 오빠를...
너무나 사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