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사랑의 난파선에는 등대가 없다.
지금 그녀는 두 번째 이별 앞에서 울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선 속수
무책이다. 이별은 예고편이 없다. 그리고 미리보기도 되지 않는다. 다시보기만 있을 뿐.
“야, 세상에 남자가 어디 그 놈뿐이냐? 알아서 떠나준 그 놈이 정말 고마운 놈이지.”
이 세상에 그 놈은 한 놈뿐이다. 이별의 당사자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알면서도 우리는 그런 똑같은
말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 매번 찾아오는 사랑이 똑같듯 이별 역시 똑같은 법이니까. 이 죽일 놈의
사랑이 낳은 이별자식.
“괜찮아, 괜찮아. 더 좋은 놈 만나면 돼. 그걸로 그 새끼 복수해주는 거야.”
사실 그걸로 복수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심은 부엌칼을 가지고 달려가서 그 놈의 기름진
배를 갈라놓고 싶은 것이다. 아니다. 지금의 내 진심은 그 놈의 마음을 다시 돌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노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젠장.
“뿌~웅.”
타이밍 한번 멋지게 들어맞았다. 순간 눈물범벅이던 지란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괜히 미안해지는
순간이긴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생리현상을 어찌하랴.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가끔 이런 참지 못할
현상이 필요한 법이다.
“하하하하, 나오는 방귀를 어쩌냐.”
그 순간에 지란은 울음을 멈추고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인생은 원래가 다 개그다.
“내가 너땜에 미친다 정말.”
지란이 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씨익 웃었다.
“그래, 그렇게 웃어라. 가끔 이놈도 쓸 만할 때가 있다 그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하자 지란이 코를 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약한 냄새는 어쩌고?”
지란이 종종걸음으로 욕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그녀는 자주 욕실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보곤 한다. 남자 앞에서도 저랬을까.
“이상하지? 난 울고 나면 항상 오줌이 마려.”
“그나마 오줌이라서 다행이다. 애쓸 필요는 없으니까 말야. 히히”
“서영아. 이 나이에도 사랑이 밥 먹여 줄까?”
변기 위에서 묻기엔 참으로 진지한 질문이다. 허긴 대부분 가장 중요하고 진지한 우리의 토론이
화장실 안이나 욕실 안에서 이루어지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원래 여자들은 비밀을 공유하기
위해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하게 화장실 안에서 나누는 모든 이야기
들은 매우 유혹적이다.
“그러게. 요즘 내가 그게 헷갈리고 있는 중이라니까.”
“그 자식이 그러더라구. 사랑이 밥 먹여준다고 아직도 착각할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잖아?
그 자식은 사랑이 아니라 밥이 필요하다더라.”
사랑과 밥. 그것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빵이 없는 사랑은 오래 가기 어렵고, 사랑이 없는 빵은 오래 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요즘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빵을 너무 맛있게 먹는다는 거지.”
변기 물을 내리는 지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없는 빵을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원한
다는 사실이다.
“어떤 음식도 물리기 마련이야. 사랑이 없는 빵도 자꾸 먹다보면 물리기 마련이지. 그래서 뒤늦게
빵이 없는 사랑을 그리워하게 된다구.”
“인간은 환경에 금방 익숙해져. 익숙해진다는 거,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물릴 것 같지? 아니,
유효기간은 전자보다 후자가 더 길어. 오래 갈 필요가 없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금방 끝내기를
원치 않아. 그래서 그 놈도 후자를 택한 거야.”
그럼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결코 아니란 말인가. 실연이 한 번씩 늘어날 때마다 우리는 정말
사랑에 관한 철학자가 되어 가는 기분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헤어져라. 난, 오늘만 우는 거야. 그 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난 내 사랑에
대한 예의로 말야. “
그러나 난 지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녀의 그 예의는 아마도 당분간은 길어질 게 뻔 하니까.
새로운 사랑이 다시 나타나서 그녀를 예의도 모르는 여자로 바꾸어 놓기 전까진 말이다. 원래 두
번째 실연까진 모든 여자들이 무너진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사랑을 환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후로 거듭 되는 실연을 맛보게 되면 여자는 비로소 냉철하게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수세미 같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어봐야 좋을 게 없다. 처량하게 낡아
버린 옛 추억을 곱씹는 일만 생길 뿐이었다.
“시원하게 울었으면 시원하게 자는 일만 남았다 친구야.”
지란과 나는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막상 자려고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진 않을 것 같았다.
암흑인 천장만 바라보며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걸린
정체불명의 건더기를 툭 튕기는 순간, 등 돌린 지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한 침대 속에 가까이
나란히 누워 있어도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먼 사람들일 수밖에.
심란한 마음으로 콧구멍 청소를 끝내고 뒤에서 지란을 안았다.
------------------------------------------------------------------------------
“내가 미쳤어, 미쳤어.”
우왕좌왕, 쿵쿵 거리는 소리에 실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지란은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빗질도 하지 못한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17평도 안 되는 실내를 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뭐 도울 거 있어?”
“나 대신 출근해줄 거 아님, 그냥 자던 대로 자.”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뛰어 나가는 지란의 모습은 칼을 든 망나니 같았다. 실연의 앞에서도 당장은
생존의 문제가 먼저다. 우선은 먹고 살아야 사랑도 있는 것일까.
“갔다 올게.”
달칵.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 다시 잠을 청하지만 매일 아침 지란의 소동에 잠은 멀찌감치
달아나고 말았다. 빌어먹을.
이틀째 감지 않았더니 머리 밑이 근질근질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씻어줘야 할 것 같다.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뜨는 낯익은 번호. 엄마였다.
“어.”
“회사 때려 치웠다면서?”
“어.”
“아니 멀쩡한 직장을 왜 때려 치워?”
“내가 멀쩡하지 못해서 그래.”
“시집 갈 것도 아니면서 회사를 때려치우면 뭐 할 거야?”
“시집가는 거 말고도 할 일 많아.”
“니가 할 일이 뭐 있어?”
“그렇게 말하면 정말 할 말 없고.”
“너 자꾸 말장난 할래?”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회사 그만두는 것까지 엄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허락 받아야 돼? 엄마,
낼모레면 나 삼십대 중반이거든?”
“나이 많이 처먹어서 좋겠다 이년아. 자랑이냐? 먹을 게 없어서 나이 많이 처먹은 게
자랑이야? 어디 자랑할 데가 없어서 지 애미한테 자랑을 해? 낼 모레면 니 애미가 환갑이 된다는 건
알고 있냐? “
항상 똑같은 싸움이다. 여자는 나이가 적든 많든, 잔소리가 참 많은 동물이라는 거, 인정한다. 이럴
땐 그냥 한 수 접고 백기를 먼저 드는 게 낫다.
“엄마. 내가 시집가기 싫어서 그러우? 나도 가고 싶다구. 안 가는 게 아니라, 없어서 못 가는 거야.
누가 날 보쌈이라도 해줬음 좋겠어. 꼭 이런 비참한 얘길 내 입으로 해야겠수?”
“그러니까 보라는 선이라도 꼬박꼬박 봐야 할 거 아냐. 니가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니? 집구석
에서 맨날 잠이나 퍼 자고, 뒹구는데 어느 미친놈이 지나가다, 현관문 열고 들어와서 나랑 결혼해
주슈, 그러냐고.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냐, 노력을.”
노력하지 않아도 내 친구들은 결혼하는데 별 어려움 없었다. 그런데 유독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 그녀들 말처럼 십대도 아닌 나이에 얼굴 반반한 거 너무 따져서? 이왕이면 다홍
치마. 누군들 그런 욕심 없을까. 이왕이면 두루두루 갖춰주는 게 고맙지.
“이번 주 일요일 약속 잡아 놨으니까 그런 줄 알어.”
역시 엄마는 강하다. 만세.
---------------------------------------------------------------------------------
서둘러 혜나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들의 모든 정보망은 혜나에게서 나온다. 나는 그녀에게서 혹시
라도 내가 빠뜨린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현관 벨을 눌렀다.
“으아아앙”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먼저 튀어 나왔다. 앙칼진 울음소리. 귀가 따갑도록
따따따 거린다.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한 녀석이 울어대는 소리인데도 한꺼번에 열 명의 아이가
울어대는 것처럼 정신을 쏙 빼놓는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녀석이다.
“똘똘이가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은가보네.”
슬쩍 똘똘이의 머리를 만지면서 귓불을 세게 꼬집는다. 얄미운 녀석. 가끔은 세 살인 똘똘이가 영악
하게 느껴져 미울 때가 있다. 울음소리가 더욱 거칠어지자 혜나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쥐어 준다.
역시 먹는 게 문제였다. 미운 세 살놈.
“지란이 헤어졌다며?”
혜나는 역시 빠르다. 초고속 인터넷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그렇대.”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줄 알았지. 걔는 나이만 먹었지 너무 철이 없어. 남자 볼 줄 모른단 말야. 내가 처음에 그렇게
말렸건만.”
“콩깍지가 씌면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다잖어.”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돼서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잖니.”
혜나는 언제나 엄살이다. 있는 자의 여유인가.
“별 문제 없잖아 니네 부부.”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란 말이야. 부부 문제는 당사자 외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러고 보니 혜나의 표정이 어둡다. 예전이라면 벌써부터 지란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이리저리 해댔을 터인데, 어쩐지 오늘은 칼도 잡지 않을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어?”
“강혜나 인생에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맥주 한 잔 할래?”
“낮술이라 좀 땡기네. 좋지.”
똘똘이는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먹어대느라 정신없다. 작은 술상을 차려 우리는 거실바닥에 퍼지고
앉았다. 맥주 거품이 입맛을 돋운다. 역시 낮술의 유혹은 거부할 수가 없다.
“결혼만하면 내 남자가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줄 알았어. 물론 남자들도 그런 착각 때문에 결혼이란
실수를 하게 되는 거겠지만 말야.”
“바람문제니?”
“석 달쯤 됐어. 기가 막히는 건, 상대 여자가 겨우 스물 네 살이다 얘.”
“하, 만만치 않네.”
“나 늙었니 서영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시네.”
“내 나이가 징그럽게 싫다 요즘.”
“자학하지 마. 피운 놈이 나쁜 거지, 니가 왜 자학을 해?”
“협박도 안 통해. 완전히 눈이 멀었어.”
“협박이 통하지 않으면 맞아야지.”
“그러기 싫어졌어. 내 거 뺏길까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발악까지 하는 내가 징그러워졌어 얘.
독하게 지켜낸 것이 나중엔 더 큰 불행을 가지고 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때문에 잠시 휴전
상태야.”
“사랑은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오랫동안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해.”
“세상에 수많은 여자들이 다 적이야. 그 많은 적들 속에서 내 남편 지켜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지.
중요한 건 내가 왜 그걸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야 하는 거야. 마음을 쉽게 다른 여자에게 줘
버린 남자를 굳이 그렇게 지켜내야 할까. 요즘 나 아무것도 먹질 못해. 말 그대로 휴전상태야.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아이만 아니면 이런 자학 같은 거 안 해. 그래, 너 잘났다. 니들끼리 어디
잘 살아봐라. 그러고는 헤어져 주고 싶어.”
“헤어지잔 말까지 나왔어?”
“사랑한대.”
“어?”
“사랑이랜다. 나랑 결혼 못하면 죽겠다던 오 년 전의 그이가 아냐. 사랑이 이런 거니? 수도 없이
다른 얼굴로 바뀔 수 있는 게 사랑인줄 몰랐다. 그게 다 사랑이라면, 그래서 그게 다 진짜라면
대체 가짜는 뭐니?”
사랑은 진짜만 있고, 가짜는 없다. 불행하게도 현실이 그랬다. 시시때때로 와서 자신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게 다 사랑일 수밖에. 가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듯 진짜 역시도 증명할 수 없는
모양이다. 대체 사랑은, 진짜는 어느 쪽일까.
“사랑에도 현실적인 감각이 필요해. 옛날 여자들의 약점이 그거야. 현실 감각이 없다는 것.
환상을 가지고 결혼을 하니까, 쉽게 깨지는 거야. 요즘 애들은 안 그러잖아.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 앙큼한 그 년이 뭐래는 줄 아니? 사랑과 엔조이도 구별하지 못하냐고
그러더라. 하하하,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 나.”
사랑은 교활하다. 아니, 인간이 교활한 것일까. 스물 네 살의 난, 사랑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
사랑을 잃게 될 위기에 있는 혜나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실연을 당하고 난 지란은
먹는 것에 집착한다. 피자 한 판을 혼자서 다 먹어치울 작정인가 보다.
“그래서, 이혼하겠대?”
동병상련의 기분일까. 침울한 표정과는 달리 입속의 피자는 지란의 턱운동으로 바쁘게 작살나고
있는 중이었다.
“휴전상태래.”
“결혼할 맛 안 나게 만드는 뉴스네. 이러다 정말 우리 연애만 하자고 드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세상에 믿을 놈이 하나 없다니까.”
“믿을 놈이 하나 없는 게 아니라, 믿을 사랑이 하나 없다는 게 문제지.”
어디까지 사랑을 믿어야 하는 걸까. 그 한없는 믿음 뒤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느닷없이 지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통을 붙잡고 먹을 것을 게워낼
심산인가 보다. 그러게 작작 좀 먹어대지. 그런다고 허한 마음이 채워질까.
“우웩.”
먹을 때와 뱉어낼 때는 정말 너무나 다르다. 사랑 역시 그럴까. 먹을 땐 이것저것 가리면서 조심
스럽게 맛을 음미하지만, 다 먹은 음식을 내뱉을 땐, 처음의 형태와는 다른 너무나도 엉망인 형태를
하고 있듯이. 사랑은 처음과 나중이 판이하게 다르다. 너무나 달라서 낯설 때가 많다.
“망할 새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지란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변기 물을 내리며 지란이 나왔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하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야.”
“나도 알아, 안다구. 구질구질 해. 영화면 이별도 멋지기만 하지. 왜 현실의 이별은 이렇게도
치졸하고, 역겨울까 몰라.”
“현실이니까.”
“그 자식, 실은 내가 가진 것 없고, 별로 이쁘지도 않아서 싫었던 거야. 사랑에도 등급이 있다면,
아마 내가 4등급쯤 될 걸. 그 자식 눈에는 말야. 데리고 놀기엔 좋은데 저 하기엔 싫은 거야.”
“너까지 자학이니?”
“꺼억.”
그 와중에도 나오는 트림은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그 자식 잘못한 거 없어. 그 자식은 처음부터 나하고 결혼할 생각 없었던 놈이야. 그거 나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나, 그 자식 놓치고 싶지 않았어. 내가 잡았어. 갈 때가 되면 그때, 보내주면
되겠다 싶었어. 보낼 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어리석었던 건, 마음을 너무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거야.”
“계산하고, 계획해서 행동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서영아. 나, 그 자식한테 전화하고 싶은 거 정말 잘 참고 있다. 어느 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참고 있는 중이야. 마지막까지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서.”
“전화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에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랑할 때 사랑하고, 헤어질 때 헤어져야 하는 것. 누군가 그랬다.
지란과 혜나는 지금 가장 어려운 시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 역시 어려운 시점에
있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별 앞에서는 누구든 두 번 다시 사랑하지 못할 것처럼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사랑이 오면 그들은 과거 속의 사랑을 더 이상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현재 내 앞에 있는 사랑에 눈이 멀기 때문이다. 지란은 아직 실연을 몇 번 더 겪어 봐야 할 것 같다.
혜나의 말처럼 아직은 초보수준이다. 갑자기 닥쳐온 사고 앞에서 쩔쩔매는 지란은 아직 초보다.
---------------------------------------------------------------------------------
일요일 오후.
맞선 보러 가는 날이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늑장을 부리게 된다.
침울한 지란을 두고 아파트를 나왔을 때부터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진다. 오 분, 십 분, 그리고 삼십
분쯤 늦게 되면 상대남이 지쳐 그냥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이런, 정말로 삼십 분이나
늦게 생겼다. 서둘러 뛰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쪽으로 뛰었다. 마침 도살장으로 인도할 빈
택시가 한 대 들어왔다. 손을 흔들며 택시를 세우고, 뒷좌석 손잡이를 잡는 순간, 겁 없이 앞좌석
손잡이를 덥석 잡는 낯선 사내와 마주쳤다.
“뭐에요?”
내가 확보한 택시를 뺏기지 않기 위한 쌍짐질을 키며 그를 쏘아 보았다.
“뭐가요?”
그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앞좌석 문을 덜컥 열었다.
“이것 봐요. 이 택시는 내가 먼저 잡은 거라구요.”
“증거 있어요?”
“뭐라구요? 하, 기 막혀.”
나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좌석에 올라타려는 그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이 사람이 정말. 예의 없이, 어디서 새치기야?”
“새치기라니? 반말하는 당신은 예의 있고?”
“그럼 내가 당신한테 지금 예의 차리게 생겼어?”
안하무인이다.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가 다시 차에 올려 타려 하자 나는 빈 택시를 쟁취
해야겠다는 일념에 무작정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아저씨, S호텔요.”
“S호텔요.”
동시에 같은 장소가 튀어나오자 기사 아저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합석하시죠 그냥. 그리고 아가씨, 이 차는 이 분이 오 분 전에 부른 콜택십니다.”
꼴깍.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의 뒤통수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 거렸다.
“아…….아니 그럼 진작에 말씀을 하시지. 사…….사람 이상하게 만드시네.”
무안한 마음을 숨겨 보고자 내뱉은 말인데, 자꾸만 혀가 꼬였다.
“아까 보니까, 아가씨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쏘아대드만 그러슈.”
“죄…….죄송해요.”
아, 쪽팔려. 역시 도살장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출발부터가 순조롭지 못한 것이 영 께름칙했다.
오늘따라 S호텔로 가는 침묵 속의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까. 그냥 중도에 확 내려버릴까
망설이다 한숨만 내쉬었다.
멀고도 먼 길을 온 것처럼 고단해진 마음으로 S호텔 앞에 내려섰다. 함께 동석을 했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걸었다. 남자가 쪼잔 하게 사과를 하는데 받아주지도 않냐? 뒤통수를 노려보다
서둘러 S호텔 1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서서 실내를 둘러보는데, 홀로 앉아 있는 사내 몇이 눈에 띄었다.
‘오 마이 갓트!’
창가 쪽에 앉아 있는 남색 니트 차림의 사내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오로라의 빛이 저러한가.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눈이 부셨다. 설마, 그가 오늘의 주인공일까. 휴대폰을 들고
엄마에게서 전해들은 남자의 연락처를 누르며 제발, 저 사람이길 기도했다.
“제발, 제발.”
신호가 몇 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는 동시에 창가에 앉아 있는 남색 니트가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앗싸. 하느님 감사합니다.’
“네, 오늘 약속한 이서영입니다. 입구에 와 있어요.”
폴더를 닫고 기분 좋게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남색 니트는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그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정체불명의 낯선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손을 흔들댔다. 남색 니트와 나
사이에 가로 놓인 저 불독 같은 남자라니. 또 한 번의 오 마이 갓트!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빈 택시를 두고 언쟁이 벌어졌을 때 그냥 돌아서 집으로 가야 했음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랑 찾아 삼만 리. 그 삼만 리를 걷는 동안 내 인생의 오류들을
어쩔 수 없이 거쳐 가야 하는 이 순간이 정말 끔찍하게도 싫다. 외모지상주의라고 누군가는 내게
돌을 던지겠으나, 외모도 외모 나름이다. 민둥산이 될 날이 머지않은 저 머리는 어쩔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이 순간 혀를 깨물고 기절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심정을 달래며 무시무시
한 칼을 든 망나니에게 내 목을 바치기 위해 무거운 걸음을 떼야만 했다. 빌어먹을.
스물네 번째 남자와는 딱 한 시간을 보냈다. 스물 네 명 중에 한 시간을 넘겼던 사람은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는 삼십초면 충분하다고 했던가. 그래서 우리들의
사랑이 금방 변질된다. 삼십 초 만에 사랑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별 역시 삼십 초 만에
끝날 수 있음을 왜 모를까. 삼십 초 만에 사랑이 시작된다면 스물네 번째 남자는 일찌감치 탈락
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이 로또 당첨보다도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일까. 한 시간 동안 상대남과 나눈 얘기는 그의 연봉과 직업과 가족사항들 뿐이었다.
마치 시장 한 복판에서 물건을 내놓고 흥정하듯. 굳이 내가 먼저 묻지 않아도 남자는 여자들의
관심이 당연히 그것일 줄 알고, 먼저 시시콜콜 늘어놓는다. 그럼 더 이상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자는 사랑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그동안 애써 가꾸어 놓은 정원의 정원사가
필요한 것이다. 결혼은 이제 비즈니스다. 더 이상 로맨틱한 사랑의 결실도, 혹은 사랑의 또 다른
출발도 아니다.
먹먹한 심정으로 호텔을 나와 큰 도로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늦가을의 샛노란 은행잎은 비애에
잠긴 나의 감성에 더 큰 자극을 주었다. 이렇게 서른 두 살의 인생도 지는 것인가.
“반말은 좀 심했죠.”
한 발 한 발 샛노란 은행잎을 밟고 있는데 그가 말을 걸어 왔다.
“선보러 나와서 그렇게 한 마디도 안하고 앉아 있으면 그것도 예의는 아니죠.”
“뭐에요 당신?”
조금 전의 일로 시비가 걸고 싶은 걸까. 맞선 자리까지 훔쳐 본 그에게 화가 치밀었다.
“일부러 본 건 아니고, 약속이 있어서 나도 거기에 있었던 것뿐이에요.”
“나, 알아요? 아까 일은 미안하게 됐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내 탓만은 아니죠. 어쨌든 초면인데 잘 아는 사람처럼 굴지 말아요. 나, 별로 그쪽하고 말 섞고 싶은 생각 없거든요.”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정말 별꼴이다. 택시를 타려다가 그만 버스정류장
까지 걷기로 한다. 생각난 김에 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 보러 갔다며?”
대뜸 혜나의 정보망에 먼저 걸려들었다. 아뿔싸!
“지란이니?”
“그럼 내가 누구한테서 듣겠니. 근데 왜 벌써 끝났어? 한 시간짜리였어?”
“그렇지 뭐.”
이럴 땐 그냥 모른 척 해줘도 좋을 텐데. 친구들이란 이럴 땐 사실 좀 부담스럽다.
“넌, 여전히 휴전상태니?”
“사랑 때문에 아파본 사람은 사랑 때문에 울지 않는다더라. 그래서 눈물이 말라버렸나. 그 계집애가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이야. 적당히 가지고 놀라고 충고했어, 어제.”
“뭐야 전면전이야?”
“그이한테도 충고를 했지. 적어도 너는 사랑이라고 하겠지만, 걘 아니라고. 자기 남편이 딴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는데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내가 독하대.”
“남자들의 이중성이란. 대체 뭘 원한대니?”
“사랑이겠지. 서영아, 니가 끝을 말해줘. 난 도통 모르겠다.”
“두 년놈 다 죽여 버려.”
흔들리는 버스에서 나는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증거가 필요해졌을 때, 그것은 헤어지라는 운명의
지시로 알라는 어느 글귀처럼 지란과 혜나가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가. 아니라면
당당히 증거를 보이고, 그녀들의 사랑을 용감하게 지켜내기를 원하는가. 사랑이란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우리는 몇 번의 난파를 당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누가 등대가 되어줄 것인가.
사랑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도울 수가 없다. 그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있는 이, 또한
오직 당사자뿐이다. 나는 그 동안 다섯 번의 사랑을 시작하고 끝내면서 몇 번의 난파를 겪었을까.
그때마다 나의 등대는 무엇이었을까.
버스에서 내려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았다. 조금 전의 그가 내 뒤를 바싹 따라 붙었다. 여전히
그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고 말이다. 정말 골치 아픈 인간이다.
“정말 왜 이러세요?”
앙칼지게 쏘아 붙이자 그는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제스처를 보였다.
“대체 왜 내 뒤를 졸졸 따라 오냐구요. 나한테 관심 있어요?”
정말 짜증스러운 인간이다. 오늘 일진이 왜 이렇게 사나운거지? 아, 짜증나 정말.
나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착각이 버릇인가봐요? 나, 저 아파트 살아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유롭게 내 곁을 스쳐 지나쳤다. 이런 젠장할.
조금 전 아파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모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착각이 정말
버릇일까.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나는 그만 창피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나는 오래전에 이미 등대를 잃은 모양이다.
-----------------------------------------------------------------------------
안녕하세요, 까미유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로설방에 왔는데.....아는 분이 몇 몇 아직도 계시네요.
그 전에 여러가지 일로 마음이 번다하여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약속을 어긴 건 어쨌든, 잘못이니....부디....ㅜ.ㅜ 용서하시기를.
앞전에 올렸던 글들이 몽땅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그 뒤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쉬다가 다시 쓰려니 막막하기도 했구요.
저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정말로 죄송합니다...꾸벅.
날이 너무 추워졌습니다.
부디 추운 날, 마음까지 추워지지 않게 단속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