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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까발리기(9화)NO처녀와 老처녀

까미유 |2006.12.14 11:39
조회 1,143 |추천 0

 제 9 화   NO처녀와 老처녀




NO처녀와 老처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아주 간단한 차이점 하나, NO처녀는 아가씨라

고 불리고, 老처녀는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라고 불린다는 사실. 결국 나이가 말해주는 처절

한 현실이다. 새해의 첫 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일찍 서초동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상가슈퍼에 들러 막대사탕을 하나 사가지고 나오다가 벙어리장갑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아줌마.”

 

꼬마 녀석의 목소리에 습관처럼 뒤돌아보았다.

 

“장갑 떨어졌는데요?”

 

내 나이가 부끄럽지 않다면서, 누군가 꼬박꼬박 내 나이를 잊지 않고 반복해서 일러주는 것에는

이상하게도 화가 치밀었다.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줍고 나는 그 녀석에게로 다가가 작고 검은 머리

통을 세게 쥐어박았다.

 

“아줌마라니? 얘, 내가 어딜 봐서 아줌마야? 쬐끔한 게 웃기네. 한 번만 더 아줌마라 해 봐.”

 

나는 어린 녀석을 상대로 쏘아주고는 홱 뒤돌아섰다. 아이는 억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 씨이. 왜 때려?”

 

맹랑한 녀석을 다시 때려 주기 위해 몸을 홱 돌리며 노려보자 아이가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아줌마보고 아줌마라 그러지, 그럼 할머니라고 불러요? 나는 세상에서 못 생긴 아줌마가 제일 싫어.”

 

그리고선 달아나는 아이를 보며 나는 씩씩댔다. 못 생긴 아줌마? 새해 첫 날부터 고작 초등학생에게서 들은 첫 마디가 못 생긴 아줌마였다. 마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소한 것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욕지기가 먼저 치밀어 올라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한다. 그 말이 끔찍하게도 싫지만, 사실 어느 부분에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끔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 히스테릭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오랜만에 한가한 오후의 쇼핑을 즐기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다. 삼층 여성의류매장을 둘러보며, 엄마에게 어울릴만한 모피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현재 백수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좀 적당한 가격을 찾기란 매우 힘들었다.

 

“서영언니.”

 

한참 갈색 빛이 들어간 밍크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불렀다.

돌아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동료였던 미진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

했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매끈한 긴 다리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선

윤기가 흐르고, 두껍지 않은 누드메이크업은 젊은 생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 나이가 아주 늙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삼십대에서는 느끼지 못할 이십

대의 젊음이 부러운 것이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여자가 삼십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미진씨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나, 월차 냈거든요. 이러지 말고, 어디 가서 얘기 좀 해요.”

 

눈웃음을 치며 그녀가 나의 팔을 휘어 감았다. 애교가 넘칠 나이다. 풋풋해서 그 애교도 이쁠

나이다. 이 나이에 저런 표정의 애교를 시도했다가는 농약이라도 마신 줄 아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

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저 무뚝뚝해져버린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11층까지 올라갔다. 생과일

주스를 가지고 온 그녀가 탁자 앞에 앉자마자 긴 다리를 꼬았다.

 

서른이라고 하면, 여자의 인생은 마치 황혼기를 맞이하는 것인 줄 알고, 몸서리치던 이십대 초반.

그러다 중반에 들어서고, 후반을 꺾어 돌아 갈 쯤이면 안정된 삼십대를 기대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뀐다.

 

“살 좀 찐 것 같은데?”

 

역시 여자는 예리하고 날카롭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보이며 빨대에 입을 가져다댔다.

 

“요즘 그냥 집에 있는 거예요?”

“그렇지 뭐. 다들 여전하지?”

“그럼요. 요즘 우리 부서만 해도 노처녀들이 얼마나 많은 지, 그 히스테릭을 다 받아주려면…….”

 

그제야 아차 싶은 생각에 입을 다물고 배시시 웃어버리는 앙큼한 그녀. 여우다.

 

“언니는 결혼 소식 없어요?”

“글쎄.”

“강대리, 아니 강과장님 아시죠?”

 

느닷없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온 그.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결혼하잖아요.”

 

순간 나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

“상대가 누군 줄 알아요? 우리 회사 사장님 둘째 딸이래요. 완전 땡 잡은 거죠. 그래서 회사 분위기

가 더 살벌해요. 우리들 모두, 감쪽같이 속았죠. 청첩장이 돌고서야 알았는걸요. 김차장님은 벌써부

터 강과장님 눈치 보고 살아요. 사람 팔자 알 수 없다지만, 강과장님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죠 다들.

승진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여자만 뒤웅박 팔자가 아니라, 요즘은 남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

아요. 강과장님한테 침 흘린 노처녀들이 몇 있었는데 완전 물 먹은 거죠 뭐.”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 시키며 과일주스를 마셨다. 아무런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태연해지자고 몇

번을 가다듬어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그는 비상에 성공한 것일까. 결혼이 두렵다던, 자신 없

다던 그의 말은 다 무엇이었을까. 그러게 사랑을 다 안다고 자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보는 건,

실질적으로 사랑의 한 단면뿐인 것을.

 

“언니도 이제 결혼해야죠. 나도 요즘은 집에서 선 보라구 난리에요. 내 나이가 몇 인데. 아직 노처녀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닌데두 벌써부터 걱정을 하시니.”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그녀와 어떻게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나는 코트를 벗지 않은 채, 거실 바닥에 퍼지고 앉아 있었다. 불과 한 달 전에 나를 찾아와 다시 시작

하자고 했던 그의 말은 다 무엇이었을까. 믿지 않는다 하면서도 나는 덜컥 믿어버린 것이었을까.

화도 나지 않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사랑의 약속을 증서로 교환했더라면 이 세상은 아마도 휴지

더미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인간들이 약속이란 것을 얼마나 쉽게 깨버리는가

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설마 어느 영화처럼 오래 전 연인에게 청첩장을 보내는 짓거리 따윈 하진 않

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의 청첩장이 궁금해졌다. 결혼식장에서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입장을 하는 지 정말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이 채 식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고집을 부렸어도, 나를 끝까지 잡았어야 했다는

것 또한 아니었다. 우리의 사랑을, 아니 내 사랑을 이용했다는 것이 분했다. 나의 진심이 그에게 농

락당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이별의 손은 내가 먼저 흔들었건만, 진작 그는 손수건까지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쪽같이 나를 속였던 그를 떠올리자 마음만 어지러웠다. 나는 세현에게

전화를 넣어 만날 것을 먼저 요청했다. 그리하여 그와 나는 한강 고수부지 근처에 차를 세우고 자판

기에서 뽑아 온 커피를 마셨다.

 

“남자의 욕망은 출세, 여자, 돈 세 가지지만, 여자의 욕망은 출세해서 돈이 많은 남자 하나다는 말을

아니?”

 

나의 말에 그는 피식 웃더니 종이컵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니 남자보다도 여자가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게 더 빠르지. 아마도 그래서 여자의 운명은 남자

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것 같애.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지. 그렇게 맥없이 남자 하나로 운명

을 결정지을 만큼 요즘 여자들, 어리석진 않지.”

“사랑의 집합 안에는 엑스, 와이라는 원소만 있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원소들이 많다는 사실을 요즘

부쩍 실감하게 돼. 아주 기본적으로 약속과 믿음이라는 것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

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경험하고 나서야 알겠더라구.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

만 말야.”

“무슨 일 있어?”

 

나의 말에 그가 몸을 돌려 물었다. 나는 그와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잠깐 숨을 골랐다.

 

“넌, 내가 왜 좋았니?”

“이별의 이유는 헤아릴 수가 없는데, 사랑의 이유엔 하나 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 누구나 똑같은 이

유인데도 그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앞으론 왜 좋았었냐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물어봐라.”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김새잖아.”

“시작에 대한 설렘이 없어서? 난, 너 말고 다른 여자들에게선 항상 긴장감을 느껴. 첫 사랑을 다시 만

난 것처럼, 설레기도 해서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져. 그런데 정작 첫 사랑이었던 너를 만났을

때는 긴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행동도 조심스러울 필요가 없었어. 언제나 다른 여자들에게서 극

도의 긴장감을 느꼈기 때문에 널, 만나면 그 마음이 다 풀어져서 편할 수가 없다. 넌, 내가 그 여자들

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의 말에 나는 그와 함께 사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럴듯한 그림이 나올까. 그 순간 느닷없이 그

가 나의 입술을 덮쳤다. 나의 어깨를 꽉 움켜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그의 손보다도 입술의

유혹이 더 컸다. 나는 체념한 채 그의 입술을 받아 들였다. 이 순간에 키스라니. 거칠지 않은 그의 입

술은 따뜻했다. 사실, 이게 얼마만인지. 그가 내게서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나는 눈을 감은 채, 남은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여전히 김이 새니?”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순간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

나이에 수줍음이라니. 이 서영, 너 여우다. 허둥대는 나의 손을 그가 살며시 잡았다.

 

“나는 출세, 여자, 돈은 필요 없다.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니가 필요할 뿐이야.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걸 이해해야 한다면 우리는 평생 사랑하지 못해. 우린 그걸 함께 알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거니까.”



NO처녀와 老처녀의 차이점 두 번째가 생각났다. 시간이 갈수록 NO처녀는 촉각의 느낌이 무뎌진다

는 것이고, 老처녀는 촉각의 느낌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 쪽일까. NO처녀는 분명하지만, 나는 아직 老처녀에 가깝다. 말 그대로 나는 그닥 젊진 않으니까. 그리고 그 촉감이 너무 그리워 미치겠으니까. 문득문득 그의 입술을 떠올리면 그 느낌들이 다시 살아나서 꿈틀대는 것이다. 나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실실 웃기도 하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며칠 후면 결혼한다던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스킨십의 위력이란 말인가. 정말 난 너무 오래 굶은 것 같다. 그런 나를 지란이 힐끔힐끔 쳐다 보다 화장대 앞에서 돌아앉았다.

 

“괜찮아?”

“뭐가?”

 

나는 여전히 실실 웃으며 물었다.

 

“아까부터 광녀처럼 자꾸 혼자서 실실 웃고 있잖아.”

 

그 순간 나는 웃음을 싹 걷어낸다. 지란은 갈수록 얼굴에 꽃이 핀다. 늦은 시간까지도 그 늙은 남자

와 전화로 밀어를 주고받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지란을 자주 본다. 지란은 마치 처음 사랑이란 것을

하는 사람 같았다. 모든 사랑은 진행될 때, 여자에게는 그 사랑이 과거고, 현재이며, 미래일 뿐. 그 사

랑의 힘으로 충분히 과거의 상처쯤은 흉터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사는 게 개그 같아서.”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때마침 늦은 시간인데도 잠든 똘똘이를 안고 혜나가 들이닥쳤다. 마치 한 밤중에 남편과의 주먹질

끝에 아이를 안고 도망 나온 여자 같았다. 똘똘이를 침대에 눕히고,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았다.

혜나는 비스듬히 누워 손을 턱에 괸 채 지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남자가 잘해주는가 보네. 얼굴이 핀다 펴.”

“사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혜나의 말에 냉큼 지란이 말을 꺼냈다.

 

“네이버 지식 검색창이 더 빠를 걸.”

 

나는 시큰둥하게 쿠션에 등을 기댄 채 툭 내뱉었다. 지란은 내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평소엔 얌전한 범생이 같은 남자가, 잠자리에선 야수로 돌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지란의 말에 나는 시큰둥하던 표정이 일순간 확 바뀌었다. 역시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모였다

하면 음담패설에 흥미를 느낀다.

 

“그 사람이 그래?”

 

혜나의 눈빛이 반짝 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솔직히 현우 만나면서도 나, 그런 느낌 못 느꼈어. 처음도 아닌데, 정말 처음 같은 기분이라니까.

난 아무래도 그 사람 만나기 전까진 처녀였나 봐.”

 

지란의 말에 나는 다시 세현의 입술이 떠올랐다. 상상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마구 돋았다.

 

“사랑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뭔 줄 아니? 바로 섹스야.”

 

혜나의 말에 지란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응시했다.

 

“배설의 욕구. 그게 가장 큰 쟁점이지. 욕정이란 것도 어차피 밖으로 분출해야 하는 거야. 삭힌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불행의 씨앗을 심는 거지. 아직도 우리 세대는 섹스에 대해선 너무 친절하고,

예의 발라. 도발적이면 그것이 곧 외설로 비춰지지. 하지만 우린 섹스를 예술로 승화하려는 게 아니

거든. 우리는 외설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런데도 타인의 시선에 예민해서 자꾸만 자신을 속이고, 예술

을 하려 든다는 거야. 아줌마가 되면 밝힌다고, 이 시대의 유부녀들을 그렇게 매도하는 인간들이

바로 남편이란 작자들이야. 그들이 왜 시시때때로 틈만 나면 밖에서 욕정을 채우고자 하는 것 같아?

아내 앞에선 고개 숙인 남자가 되면서도 밖에선 빳빳하게 고개 쳐들고 있는 거시기가, 약 먹었겠니?

여자도 마찬가지로 섹스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해서야.”

 

혜나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마치 이 시대의 여성과 섹스에 대한 강연장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젠 기다리기만 하는 시대가 아냐. 여자들도 당당하게 섹스에 대해 말할 줄 알아야 하고, 먼저 찾

아 나설 줄 알아야 해. 물론 요즘 애들은 그 기준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긴 하지만. 섹스에 대한 잘못

된 인식들 때문에 그런 부작용이 생기는 거야. 왜 니들을 노처녀라고 하는 지 알아? 늙은 처녀?

설마, 그런 예의 바른 생각에 그런 말을 붙였겠니? 처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집도 못가는 딱한

처자들을 그렇게 일컫는 말이라 이거지.”

“야, 너무한다.”

 

나는 발끈했다. 처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집도 못가는 딱한 처자라니. 이거야 말로 여성 비하적

인 발언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깊이 따져서 들어가 보면 분명 그런 뜻이 숨어 있다는 거야. 말이 엇나갔다. 그건 그렇고, 사실 생각

해 봐. 니들이 몸소 겪은 경험들이 그때마다 오르가슴에 이르게 했었니?”

“사실 난, 현우한테선 한 번도 느끼지 못했어.”

 

나는 어땠을까. 마지막 다섯 번째였던 그를 떠올리자 나는 표정이 상기 되었다가,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혜나와 지란이 생뚱맞은 표정으로 돌아 봤다.

 

“계속해.”

“너 무슨 생각 했어?”

 

혜나의 질문에 나는 망설이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

“토끼?”

 

그 순간 지란과 혜나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빠른 놈은 첨 봤어. 애국가 1절이 다 뭐야, 반절이면 그냥 쓰러지더라.”

 

사랑했기에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물론 그때의 생각이다. 그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했다면 문제가 될 지 안 될지에 대해선 장담할 수 없다. 혜나의 말처럼 섹스가 사랑의 반을

차지한다면 우리는 애초에 반쪽 사랑을 한 것이 된다.

 

“현우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너무 들이대기만 한다는 사실이야. 걘, 자기 물건에 대해서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나봐. 걘, 무식한 거시기만큼이나 섹스도 무식하기만 했어.”

 

지란의 말에 혜나는 눈물까지 찔끔 거리며 웃어댔다.

 

“섹스에 대한 인식이 바뀌려면 남자들, 물건 크기에 대한 인식부터 달라져야 해. 결혼하기 전에 우리

가 속궁합이란 걸 왜 보겠니? 보통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부부들, 알고 보면 다들 성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거야. 내 남편만 봐도 알잖니.”

 

이제는 너무 편하게 그녀의 남편을 얘기하는 혜나가 오히려 다행스럽다.

 

“정작 마른 곳을 파서 물꼬를 트게 할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곳에서만 자꾸 삽질을 해대니.

오르가슴이 다 뭐야, 섹스 자체가 짜증스럽지.”

“예전엔 정말 몰랐는데, 섹스의 문제가 잘 풀리니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아. 요즘

내가 색녀라도 된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니까.”

 

지란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섹스는 고사하고, 몽정으로도 잘 해결 되지 않는 이 욕구

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부부는 현명해서, 섹스를 꼭 두 사람의 행위에서만 찾지 않는다잖아. 남편이 멀리 출장을

가게 되면, 아내에게 자위기구를 하나쯤 사주고 간다더라. 이런 말하면 내숭녀들은 아마 그럴 걸.

미쳤어, 그런 걸 어떻게 해? 지저분하게. 웃기지 말라고 해. 그게 서로의 배려야. 그리고, 그 배려가

곧 앞으로 닥칠 바람의 위기를 막아주기도 하구. 나도 좀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성에 대해서 너무 노골적인 것 같아. 그래서 성에 대한 분란이 끊이지 않는

게 아닐까.”

“섹스가 바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걷잡을 수 없이 어긋나게 된 하나의 예지. 내가 말하는 건,

섹스에 대해 좀 당당해지자는 거지, 그것을 아무데서나 잘 활용하라는 건 아니잖아. 먹는 것만큼 중

요한 것이 배설이다. 항문에만 힘 쓰지 말 것. 아랫도리에도 힘을 좀 쓰고 살자.”

 

혜나의 말에 지란과 나는 마구 웃어댔다.

 

“세상엔 老처녀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게 NO처녀라는 사실이야. 그 원인이 뭐겠니? 사랑을

너무 함부로 믿어서 그래. 그리고, 함부로 믿는 사랑을 너무 쉽게 농락하는 게 문제야. 그러나 이제

NO처녀라는 사실을 굳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은 NO처녀가 그만큼 사랑에 대해 진실했고, 최선을 다 했다고 믿고 싶어. 그저 성문란으로만 본다면 NO처녀들이 너무 억울해지잖아.”

 

혜나의 말이 끝나자 나는 오래 전 두 번째 남자를 떠올렸다. 그와 처음 한 침대에서 잠을 자던 날, 그가 물었다. 당신, 설마 처음은 아니겠지? 그의 말 뜻은 무엇이었을까. 처음이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처음이 부담스럽다는 뜻이었을까. 나는 물론, 처음이었다. 첫 사랑에게는 입술의 순정을, 그리고 두 번째 사랑에게는 순결을. 그렇게 따지면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남자들은 억울했을까. 어쨌든 나는 지금, NO처녀에요 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그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나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사랑의 순도를 측정하진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외면당하지만, 그 순도의

측정은 바로 다섯 번째 남자에게 농락당했던 내 진심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 때만 해도 나는 작정하지 않았다. 굳이 가자고 결심하지 않았던 건 사실인데도, 호텔 입구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애초에 내 발걸음은 정해져 있었던 걸 깨달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다 다시 돌아갈까 싶은 생각에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보고 싶었다.

아니, 당당하게 봐주고 싶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호텔로 들어갔다. 입구엔 신랑 강 현수라고 큰

글자가 찍힌 예식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예식이 곧 진행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계단을 이용하여 그가 있는 식장

을 향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허우적대며 그의 모습을 찾았다. 실내 입구에 서서 나는 곧 입

장할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혹시라도 회사 사람들의 눈에 띌까 몸을 사리며 비겁하게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신랑 입장.”

 

드디어 그가 걸어 나갔다. 길고 긴 실내를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은 한 달 전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날개를 접었을까. 아니라면 그와 결혼할 그녀에게 날개를 빼앗겼을까. 그가 당당하게 걸어서 이편으로 몸을 돌리고 섰다. 말끔한 얼굴. 비상에 성공한 표정이 저러할까.

나는 갑자기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신부 입장.”

 

드디어 그녀가 입장을 시작했다. 나에게 한 번도 저런 웃음을 보인 적이 없던 그가, 그녀를 향해

활짝 웃고 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나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사랑만 하면 안 되겠니 라고 묻던 그는 정말 나와는

사랑을, 그녀와는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만 퇴장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몸을 돌리려

는 순간,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싹 사라졌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다 덜미를

잡힌 사내처럼 그의 표정은 순간이었지만 굳어졌다. 나는 그제야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미련 없이 돌아섰다.


호텔에서 나온 나는 밖에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비상할 만 했다. 그와 내가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하여, 그를 원망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그와 결혼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어쩌면 그에게 진심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사랑과 결혼을 별개로 둔 그 사람의 방식이었을 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자책할 필요도 없다. 원망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아주 사라지는 게 결코 아닌 것인데 말이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뜬 세현의 번호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 나야.”

“어디야?”

“지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분 좋게 말했다.

 

“너에게로 가는 길.”



 

눈을 떴을 땐, 그가 옆에 없었다. 차가운 볕이 창을 뚫고 내 심장쯤에 와서 박혔다. 나는 기지개를 켜다 가만히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나는 어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멀쩡한 정신에 사고를 쳤다는 것. 사고? 남녀가 한 방에 함께 있다면 그것은 사고를 예감하는 것이다. 아니지, 밤늦도록 함께 한다면 사고 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알몸인 채로 그의 침대 속에 누워 있었다. 나는 이불을 들춰 내 몸을 확인한 후, 스스로 대견한 듯 수줍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 더 이상 몽정을 꿈꾸지 않아도 된다. 때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들었다.

 

“잘 잤어?”

 

그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왔다.

 

“어.”

 

난 마치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 당겼다. 정말 놀구 있다.

 

“깨우기 그래서 그냥 출근했어. 식탁에 아침까지 챙겨 놨으니까, 국 데워서 꼭 챙겨 먹고 가.”

“고마워.”

“너, 어제 이쁘더라. 나중에 연락할게.”

“어제, 정말 꿈을 꾼 것 같아. 너무 황홀한 밤이었어.”

 

나는 끊어진 전화에 그렇게 속삭였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지만, 어쩐지 이 말은 아껴둬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몸이 나의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오래전의 상처로 남은 흉터들을 하나하나 핥아

깨끗이 씻어주는 기분이었을까. 나는 너무나 멀쩡하고, 깨끗해진 내 몸을 보기 위해 침대에서 빠져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내 몸은 생각만큼이나 늙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상하리

만큼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욕실에서 나와 알몸으로 거실을 빙빙 돌며 혼자만의

왈츠를 추었다. 사랑은 기쁜 것이다.

후에 오는 상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두려워 지금의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NO처녀든, 老처녀든 지금의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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