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화 사랑이란 대학은 재수생의 전당.
그는 요리를 곧잘 하고, 그것을 즐기며, 맛있게 먹는 것도 너무 잘 안다. 그가 해주는 음식을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좋아하고, 함께 사소한 수다를 떠는 것도 좋아한다. 그의 좋은 모습들이 하나하나
마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것이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해물 탕이다. 그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 앞에서 나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오늘 해물이 너무 좋더라. 어때?”
수저로 국물을 떠서 먼저 맛을 보는 내게 물으며 그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국물이 끝내줘요.”
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그는 그제야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너랑 살면 평생 굶어 죽진 않겠다.”
“너랑 살면 평생 지루하진 않겠다.”
내 말에 그가 대꾸하며 웃었다. 그가 웃으면 나도 즐겁다. 그의 웃음이 이제는 정말 즐거워졌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수저를 놓고 나도 뒤를 따라 나갔다. 현관문을 열자 낯이 익은
여자가 불쑥 안으로 들어서며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 세현.”
“니가 어쩐 일이냐?”
어디서 본 듯한 낯이 익은 여자는, 예전에 마트에서 그와 함께 있던 그녀였다.
“자네가 보고 싶어서 왔지. 어? 손님이 계셨네?”
신발을 벗으려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멋쩍듯 묻자 그가 내 손을 잡고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 그때 말한 내 첫사랑. 인사해.”
“최 하경이에요.”
그녀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며 말하자 나는 얼결에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서영이에요.”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근데, 나 좀 들어가면 안 돼요?”
그녀의 말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제야 그녀가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식사 중이었나 봐?”
“어, 전이면 함께 먹구.”
“좋지. 안 그래도 배가 고프거든. 제 것두 있어요 서영씨?”
그녀는 넉살 좋게 웃으며 내 팔을 잡았다.
“네, 그럼요.”
그녀의 넉살에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우리는 함께 식탁 앞에 앉았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수저를 들며 말했다.
“원래 불쑥불쑥 찾아오진 않는데. 오늘만 봐주세요 서영씨.”
“네.”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야?”
나의 대답이 끝나자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틀 뒤에, 나 출국해. 이 땅 뜨기 전에 너 한 번 보고 가려고 왔지.”
“어딜 가는데?”
“이태리. 젊고, 패기 있는 애들이 자꾸 치고 올라오니까, 한계에 부딪힌 거지. 경쟁이 아니라, 이젠
질투에 눈이 멀어서, 능력은 고사하고 비참한 모습까지 보이는 것 같아서 유학을 결심 했지.”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언제 결혼해요?”
뜬금없이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말에 웃음만 지을 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원래 눈치가 좀 없어요.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이번만 봐줘요 서영씨. 세현이가
하두 서영씨 얘길 많이 해서 남 같지가 않아요.”
“그래요?”
나는 웃으며 세현을 바라 보았다. 그는 멋쩍은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옛 애인과 함께 하는
식사라니. 묘한 질투심이라도 생겨야 할 판국에 나는 조금씩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결혼 선물로, 특별히 내가 서영씨 웨딩드레스는 만들어 줄게요.”
“나야, 고맙죠. 그럼 난, 하경씨 결혼 선물로 뭘 하죠?”
“결혼요? 아직은 화려한 솔로이고 싶소이다. 골 아파서 싫어요. 확고한 독신주의가 아니라서 언젠
가는 결혼을 하게 되겠지만, 마흔이 넘어서 더 이상 화려한 솔로가 아니라면, 한 번 생각해보죠 뭐.”
그녀는 생각보다 시원시원했다. 그녀의 그 발랄함이, 그리고 그 당당함이 어쩐지 부러웠다.
타인에 대해 경계부터 하자고 드는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여자였다. 우리는 유쾌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마치 오래 전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가 한 때 사랑했던 여자가, 그녀란 사실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가 현재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과거속 사랑이 초췌하고, 암울한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주차장을 가로 질러 가는데, 막 집으로 돌아오는 혜나를 만났다. 그녀는 많이도 지쳐 보였다. 나는
혜나에게 팔짱을 끼며 우리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나 한 잔 하구 가라.”
“그러자.”
집으로 들어와 나는 커피를 두 잔 뽑았다. 그녀와 나는 식탁 앞에 마주 보고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똘똘이는?”
“시댁에 있어.”
“시댁에서도 알게 된 거야?”
“어. 어제 다녀왔었어.”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 사람,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그 사람?”
“박 수찬.”
그녀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나는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너라도 나, 혼내지 마. 마음이…….무척 안 좋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기어이 떨어졌다. 그녀는 태연하려는 듯 눈물을 손으로 대충 훔치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하구, 아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야. 뭐, 시작한 것도 없지만, 개운해.”
개운하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다독이고 있을 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라리, 하룻밤의 바람이었다면 좋겠어. 그런 거라고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야. 그런데도 난,
남편에게 돌아가려고 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실수였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
“살 수 있을 거야. 누구나 다 그렇게 살어. 그리고 실수라고 한다면 그건 배신이야.”
“그렇겠지.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냥 살아지더라구. 이번에도 그렇게 되겠지. 남편이랑 아이와
함께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어. 시댁으로 들어오래. 내일 당장 집을 내놓게 생겼어.”
“병희씬, 뭐래?”
“걔하구 정리 했나 봐. 시어머님이 그 앨 만났다 그러시더라구. 평생 그 죄 받고 살겠다 그러더라
그이가. 그래서 재수하는 기분으로 다시 시작해보려구. 아이가 첫 번째 이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이도 나두, 우린 권태기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한 것뿐이야. 그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애.”
나는 그녀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야. 당분간은 평지겠지. 살다보면 또 하나의 산을 넘어야 할 시기가 올
거야. 그때를 잘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학점을 올려놔야겠지? 평생, 졸업이란 건
없겠지만.”
“우리 모두 재수생이잖어. 좋은 점은, 경험이 많다는 것. 그거 하나로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운 내, 친구.”
우린 모두 사랑이란 대학에 다닌다. 입학한 이상, 평생 졸업은 없다. 재수, 삼수, 사수만 있을 뿐.
사랑에 있어서 초범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 실패
하면서 다시 사랑하니까.
그 날 밤, 지란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그녀가 우리들 앞에서 결혼을 신고했다.
“유 지란은 이천칠 년 이월 십일일부로 화려한 솔로 탈출을 임명 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드디어, 나도 꿈에 그리던 유부녀가 된단 말씀이야.”
지란은 호들갑스럽게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나는 그런 지란을 한심한 듯 올려다보고, 혜나는
박수를 쳤다.
“아줌마가 되는 게, 뭐가 그렇게 신이 나니?”
툴툴 거리는 내게 지란이 웃으며 말했다.
“야, 우린 이미 아줌마 나이였어. 그리구, 아줌마가 어때서? 젊은 여자들, 아줌마 무시하지만 지들도
아줌마 되고 싶어서 환장하잖어. 그리구, 아줌마 무시하는 남자들은 또 어때? 아줌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종자들이잖어. 그들이 죄다, 아줌마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 거야. 난, 정말 멋진 아줌마가 될 거야. 아줌마 만세.”
지란의 말에 혜나는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근데, 준비할 게 너무 많어. 아줌마 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애.”
“애까지 낳아야 완전한 아줌마가 되는 거야. 참, 결혼하면 시댁에 들어가서 사니?”
혜나가 웃음을 멈추고 지란에 물었다.
“적당히 신혼 좀 즐기다가 들어가기로 했어. 사실, 시댁 식구들 편한 건 아니잖어. 나도 요즘 애들
처럼 사실, 개운치는 않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싫은 거 무조건 하지 않고, 좋은 것만 하려고 한다면
그게 사랑이 아니더라구. 그이를 사랑하는 만큼 시댁 식구들을 사랑하기로 했어. 좋은 날만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해. 사람 사는 곳이면, 시끄럽고 정신없을 수밖에 없잖어. 일단은 피하지 않고,
부딪혀 보려구. 그 뒤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
“대견하네. 지란이 이제 철 다 들었다. 미리 고민하고 걱정할 거 없어. 그러다가 사랑 자체가 고민
거리가 되고 마니까. 어쨌든 축하해.”
“어, 고마워. 그리고 미리 일러두는데, 서영이 너, 나 결혼하기 전에 먼저 가기 없기다. 내 부케, 니가
받아야 된단 말야. 아무나 줄 순 없지.”
“내 생각 해줘서 퍽도 고맙다. 눈물까지 나려 그러네.”
사실 난 지란과의 이별이 아쉬웠다. 당장 결혼 날짜를 잡은 그녀는 신이 나 있었지만, 나는 그런
지란을 보내야 하는 마음에 울적했다. 그래도 오 년을 함께 했던 동거인이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모르고 신이 나 있는 그녀가 얄미웠다. 우정이 사랑보다 진하다고 내가 언제 그런 실언을 했던가.
취소다. 역시 사랑이 우정보다 진하다. 젠장.
혜나가 돌아가고 우리는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지란이 나를 안으며 말했다.
“아주 헤어지는 거, 아니잖어. 평생 널 못 보고 살아야 한다면, 결혼 같은 거 안 해. 우리 다 같이
웃고, 울고, 싸우면서 앞으로도 평생 그렇게 살자. 잠자리만 바뀔 뿐이야. 언제든 전화하면 달려갈
수 있는 곳에 살 거야. 해외로 나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속상해 하니? 평생 내가 너랑 살길
원했던 건 아니지?”
“웃기셔. 미쳤니? 난, 세현이랑 살 거야.”
나는 흐르던 눈물을 훔치며 등을 돌렸다. 그러자 지란이 뒤에서 나를 가만히 안으며 속삭였다.
“잘 자, 사랑하는 내 친구.”
사랑을 도둑맞는 기분이 이런 걸까. 아니라면 애지중지 키워 놓은 딸자식 시집보내는 부모의 심정
이 이런 것일까. 사랑과는 별개의 우정도,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행복해서 슬프다.
올케의 임신 소식은 지란과의 슬픈 이별을 잊게 해줄 만큼 기뻤다. 나는 작고 앙증맞은 아기의 신발
을 꺼내 보이며 흔들었다.
“계집애일지 사내일지 모르지만, 그냥 핑크로 샀어요. 이쁘지?”
“세상에, 이렇게 작아?”
올케는 손가락을 신발에 넣어보며 웃었다. 오랜만에 엄마는 아주 밝았다.
“계집보다는 사내가 낫지. 남편 먼저 보내고 나면, 그 큰 나무 대신할 사내가 있어야 돼.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하고, 든든하잖어.”
엄마다운 생각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엄마의 어깨에 기댔다.
“그래두 딸이 이쁘잖어.”
“이쁜 딸, 하나 더 있었다간 내 목이 지금까지 붙어 있게?”
“오늘부터는 내가 이쁘게 보일 텐데?”
올케와 엄마는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남자 생겼어 아가씨?”
“농이야, 정말이야?”
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엄마가 서둘러 물었다.
“생기긴 했는데, 결혼은 아직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보면 아니까, 데리고 와. 내 앞에 앉혀 놓고 나서 얘기하자.”
역시 우리 엄만 성급하다.
“나중에, 나중에 꼭 데리고 올게.”
“나중에 언제? 시간 끌었다가, 니 맘 또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으이그, 내가 이래서 말 안하려고 했는데. 조만간 데리고 올게. 좀 기다리셔. 지금은 손주 볼
생각만 하셔요 엄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고, 거울 속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로 살아가면서,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는 것을 함께 보며,
주름이 늘고, 백발이 무성해질쯤이면 아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을 보고, 또
그 아이가 아이를 낳아, 손주를 볼쯤이면 우리는 그때서야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 순간 주름이 패이고, 백발이 무성한 내가 거울 안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먼 미래의 내 모습에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더 이상
두렵지가 않았다.
서초동으로 그가 데리러 왔다. 그의 차에 오르자마자 그는, 매너 좋게도 안전벨트를 손수 채워 주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평생,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그러지 마.”
“뭐든 다 해주겠다는 말한 적 없어. 게으름이 길어지면, 때릴 거야. 싸워서 이겨도 볼 거구, 화도 낼
거고.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쫓아내기까지 해볼 거야. 난 특별하지 않아. 세상의 모든 남자들과 하나
다를 게 없어.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뿐이야.”
“많이 싸우자. 그래서 미운 정이라도 많이 키우고 살자.”
나의 말에 그가 낯설 듯 바라보았다.
“남자와 여자, 그것은 신의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했었어. 인간을 어찌, 이렇게도 불완전하게
만들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완전해지려고 노력만 하다 인생이 끝장
난다고 생각했어.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 신은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던 대신, 사랑이란 것을
함께 주었거든. 그 사랑이란 것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인간이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신은
알고 있었던 거야.”
“이성은 모르면서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이라는 말이 떠오르는군.”
“사랑하는 모습은 다 똑같은 것 같아.”
나의 말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랑에는 무조건 공격적이던 애가, 많이 유순해졌네.”
“그랬던 것 같어. 혜나 말처럼 우린 모두, 재수생들이잖어. 다시 일학년부터 시작해야겠지? 이번엔
좀 더 열심히 해보려구.”
“요리두?”
그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요리두.
“재수생들이 다 모였네.”
혜나와 지란, 그리고 나는 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자기엔 좁은 침대지만, 오늘만큼
은 불편을 감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혜나, 넌 내일 들어가지?”
“응. 일은 계속하기로 했어. 애는 어머님이 봐주시기로 했거든.”
지란의 말에 혜나는 다소 안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잘됐다 정말.”
내가 대견스러운 듯 혜나를 보며 말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요즘 드라마에 흔히 다루는 소재가 불륜이란 게 맘에 안 들었어. 채널을 돌리면, 온통 불륜을
사랑이란 공식에 넣어 그것을 로맨스로 만들거나, 희생자의 억울함을 호소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싫었어. 세상이 온통 반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로맨스를 꿈꾸는 것처럼 느껴졌으
니까. 근데, 이번에 깨달은 게 있어. 최고의 사랑을 받을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
이라는 거.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그래서 그들이 제 자리로 무사히 돌아가는 해피엔딩을 보여줬으
면 좋겠어. 다른 새로운 사랑을 찾아 가는 것이나, 복수로 끝나지 않고 말야.”
“사랑은 구체화 될수록 속박을 더 한다 그러더라. 나두 이번에 그걸 깨달았잖아. 니들 덕분이야.
아니었다면, 현우에 대한 내 사랑을 구체적으로 계속해서 파고들고 있었을지도 몰라. 걔도 아마
피곤했을 거야.”
지란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보니까 말야, 그동안 우리는 사랑에 대해 너무 진지했고, 심각했어. 그래서 너무 어렵게 돌아
온 것 같아. 마흔을 넘기면, 우리에게 그때도 사랑이 진지하게 다가올까? 그땐, 그러겠지. 살아봐라,
살아봐야 아는 거지. 세상에 공이 어딨어? 그것도 다 제 가슴 뜯으며, 눈물을 쏟아봐야 알아지는 거
지, 처음부터 공으로 가르쳐 주는 줄 아느냐.”
나의 말에 우리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의 사랑에 동이 터오듯 창 너머로 동이 틀 때까지 우리의
수다는 끊어질 줄 몰랐다.
절망하라, 절망하라
절망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기까지.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 그 자체가 절망에 이르기까지.
새해의 첫 달이 그렇게 흘렀다. 우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개개인의 역사에 기록될만한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긴 것이다.
혜나는 직장생활이 체질인 것 같다며, 일에 대한 성취감에 빠져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예전
보다 더 당당해졌고, 강해졌다. 매일 아침 아이에게 입맞춤을 하고, 남편과 함께 나란히 출근하면서
혜나는 그 일상이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은 별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다.
지란은 결혼준비에 정신을 빼고 있었다. 갈수록 그녀는 빛이 났다. 가끔 혼수 문제로 의견이 대립
되어 남자와 다투는 날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해서 그의 흉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마저
도 행복해 보였다. 세 개의 꼭짓점이 만나는 순간, 우리는 이러한 날을 기억하며 추억이라 부를
것이다. 사랑의 독후감을 쓸 때쯤엔 우리 모두, 추억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겠지.
그의 손을 잡고 겨울의 끝물에 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아직은 춥다. 그러나 멀지 않은 봄이 올 것
이다. 나는 괜히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팔을 흔들었다. 그가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함께 걷는 길이
즐겁다.
“너, 손이 왜 이렇게 차?”
“왜, 하경씬 손이 따뜻했나보지?”
그의 말에 나는 일부러 토라진 듯 물었다.
“뭐?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와?”
“하경씨가 이뻐, 내가 이뻐?”
“못 살아.”
“피하는 것 좀 봐.”
“니가 훨씬 이뻐.”
“당연하지. 미인은 원래 손이 차. 대신, 자기 손이 따뜻하잖어.”
“그래, 이 손으로 찬 손을 따뜻하게 해줄게.”
“나, 지금 입술도 차가운데.”
“그래? 고맙네 그 입술.”
“어, 어…….왜 이래? 사람들 다 보잖아.”
“원하던 바잖아.”
“싫어, 저리 가.”
때마침 달아나는 나의 머리 위로 겨울의 마지막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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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