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정군이 지금까지 보내왔던 크리스마스 중 가장 인상적인(?) 크리스마스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2006년은 정군에게 정말 험난한 겨울이었습니다. 한번 갔다 온 군대를 다시 갔다가 난데없이 망막이 떨어져 평생 입은 적 없는 환자복을 입고 긴 병원놀이를 해야 했었고, 레이저 치료도 수없이 받았으며, 이로 인해 사관학교를 휴학하게 됐습니다. 더군다나 남몰래 좋아했던 님은 지난 달 유부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도 우울하길래 무슨 생각을 해야 즐거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봤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전혀 떠오르지 않더라는 거죠. 내가 이렇게 삭막한 사람이었던가 반성하며 잠이나 자보자는 생각을 했을 때, 불현듯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때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유치원을 다닐 나이였거나 유치원을 갓 벗어난 나이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산타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정군은 그날 밤에도 작년처럼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뭐, 어릴 때는 그런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지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즐거운 일이라고는 생각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착한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매일 골탕 먹였던 기억, 친구를 때려서 울렸던 기억, 심부름하라고 주신 돈을 횡령했던 기억, 피아노 학원에서 탈주를 일삼았던 기억 등등. 각종 범죄들이 뇌리에 되살아나 어린 정군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정군의 눈에 동생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항상 정군에게 맞고 골탕 먹기만 하던 동생은 선물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계모와 새언니들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결국 출세하고 말았던 신데렐라가 생각났을 겁니다. 아, 그 위기의식이란.
착한 일을 하지 않은 아이는 선물을 받지 못한다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광신하고 있던 정군은 드디어 일을 꾸밉니다. 느닷없이 동생에게 착한 일을 했느냐고 물어보는 어린 정군. 미처 동생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그쳤습니다. “없지, 없지, 없을 거야, 그렇지!?” 그리고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을 범죄의 구렁텅이에 끌어들입니다.
그날 정군이 했던 이야기를 요약하면, 어차피 선물 받기는 다 틀린 성탄절, 함께 산타 할아버님을 털어보자는 이야기였습니다. 황당한 소리였지만, 지금도 정군이 팥으로 메주 쑨다고 하면 곧이 듣는 동생은 정군의 공범이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이미 한탕주의를 본능적으로 마스터하고 있던 정군. 이번에 한번만 성공해서 산타 할아버님의 선물짐을 몽땅 턴다면 앞으로 계속 선물을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결국엔 이득일 것이라고 주판알을 튕깁니다. 임금님에게 가는 봉물짐을 터는 홍길동도 그런 계산을 했을지 모르지요. 이제 더 이상 정군에게 있어 산타 할배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타도해야 할 악당일 뿐이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착하게만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그래,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어. 그동안 숨죽였던 반군 기질이 눈을 떴습니다.
작전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요를 펴고 베개를 대신 눕힌 뒤 이불을 덮어 자는 것처럼 위장한 다음, 연장(?)을 챙기고 적의 주요 침투 예상지점에 매복을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문방구에서 구할 수 있었던 1000원 짜리 아더왕 플라스틱 모형 검으로 무장을 했습니다. 굴뚝이 없는 관계로 창문을 통해 들어올 것이 확실하다는 전략적 판단 아래, 창틀 밑에서 두 형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죽였습니다. 조용히 밤이 깊어갔습니다. 한밤중에 창문이 열리면... 열리면!
형제는 긴장한 나머지 숨도 한번 참았다가 다음번에 몰아서 쉴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주저앉은 채 잠들어 버린 동생 옆에서 크리스마스 특선만화 시청에 쌓인 피로로 쏟아지는 잠과 결연히 맞서고 있을 무렵,
조용히 방문이 열렸습니다.
굴뚝이 없다고 창문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대한 그림자. 비상사태였습니다. 정군이 허둥지둥 동생을 깨우고 있었을 때, 살그머니 방문으로 침입한(?) 산타 할배 역시 잠자리에서 자고 있어야 할 형제가 창틀 밑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광경에 움찔, 굳어버렸습니다.
“너 뭣하냐 지금?”
순간, 산타 할배의 선물짐을 털기 위해 대기중이었다는 말을 하면 혼이 날 거라고 염두를 굴렸던 정군. 말을 더듬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용감한 척 비장한 목소리로-어린애 주제에- 단순 호기심을 가장합니다. 허허허. 크리스마스이브에 거짓말을 하는 나쁜 어린이.
“...하하. 싼타 얼굴 좀 볼려구요.”
‘산타가 아니었구나,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던 정군. 아마도 ‘졸려 죽겠는데 왜 깨우는 거야.’ 라고 생각했을 정군의 동생. 그리고 돌처럼 굳어계셨던 아버지.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어색한 정적이 어두운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정적을, 10년도 더 지난 오늘까지 생생히 기억합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들어오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조용히 나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바로 산타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산타라는 건 없으니 그냥 자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으셨나 봅니다. 하긴 정군이 그 자리에 대신 있었다고 해도 아무 말 못했을 것 같습니다만.
어쩌면 지금도 아버지는 정군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단, 이번에는 옆방이 아닌 하늘나라에서. 음, 크리스마스 선물... 예쁜 여자 친구도 좋겠지만 이왕이면 번호 여섯 개를 정확하게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 하하하하. 이제 순진했던-산타를 믿으며, 그 선물 보따리에서 기꺼이 짐을 덜어주려 했던- 정군도 나이를 먹었군요.
아, 결국은 동생도, 어린 정군도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다음날 잠자리에서 눈을 뜬-어째서!?- 정군과 동생의 머리맡에는 로봇 장난감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의 머리맡에도, 산타는 선물을 두고 갔습니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정군이 그 뒤로도 산타 할아버님을 습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겠지만,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후로 산타 할아버지 습격시도는 없었지만, 그건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라 ‘착하게 살지 않아도 선물은 받는구나.’ 라는 중요한 경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악당)
하지만 그 크리스마스 이후로는 한 번도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지금 생각하면 선물 못 받아도 싸지만, 어릴 때는 정말 슬펐답니다.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던 건, 그 날로부터 몇 해 뒤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웃음이 많지 않으셨던 아버지셨지만, 그때는 제가 부끄러워 할 때까지 소리내어 웃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긴 그런 짓을 하는 아이가 흔치는 않았겠죠. 그때 선물이라도 가지고 들어갔다면 아들 손에 변을 당했을 것이라며, 무서워서 어디 살겠냐 하시던 아버지. 그 이후로 크리스마스만 되면 항상 그 때 일로 저를 놀리시곤 했습니다. “쟤는 산타가 선물 안 준다고 산타를 털려던 애야.” 이렇게 말이죠.
여러분은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으신가요?
아버지 없이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올해로 벌써 3번째가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이제 체험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임을 부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내일이면 다시 정군은 청소 안 한다고 어머니께 혼날 것이고, 또 말 안 듣는다고 동생을 팰 겁니다. 동생은 정군의 압제에 항거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할 테지만 잠들기 전에는 다시 화해를 하겠죠.
저는 산타가 아니지만, 이 글 읽는 여러분께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아직 솔로부대의 구성원이지만-26년 동안 정말로 군생활을 했다면 연대장(대령)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커플 여러분의 염장질도 뭐, 좋겠습니다. 크리스마스잖아요. ^^
아무쪼록 이번 크리스마스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의미 있는 시간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 즐거운 크리스마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