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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최은수가 이하나를 처음 만난 날은 작년 팔월 이십삼 일이었다. 그녀를 만난 날,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의 눈엔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다.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어느 별나라의 공주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이십여 년 전인 사춘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 날 친구 두 명과 함께 일반 음식점에서 소주를 마신 최은수는 취기가 오르자 향락의 유혹을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술이 취하면 가끔 찾아가던 무교동의「아방궁」이라는 룸살롱으로 갔다.「아방궁」은 여느 룸살롱보다 규모가 크면서도 술값이 부담 가지 않을 정도로 저렴했고, 특히 미모가 뛰어난 아가씨들의 접대가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을 맞이한 정지영 마담이 단골손님에게 특별대우를 한답시고 최은수에게 그곳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아가씨를 소개시켜 줬는데, 그 아가씨가 바로 이하나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다른 아가씨들과 마찬가지로 양선아라는 본명을 숨기고 이하나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최은수는 어떤 광고 모델들보다도 감각적이고 빼어난 몸매를 지닌 이하나의 미모와 그녀가 풍기는 향기에 흠뻑 빠져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그녀에게서 시종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많았지만,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답고 지성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다른 어떤 여자와 비교할 수 없는 여자였으며, 특히 꽃봉오리 같은 그녀의 입술은 남자라면 누구라도 훔치고 싶을 만큼 육감적이었다.
최은수는 첫눈에 이하나가 이런 환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는 것을 직감하면서 그녀를 파트너로 맞게 되었다는 행운이 짐짓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백만 원쯤 되는 공돈이 호주머니에 굴러 들어온 사람처럼 행복한 표정을 연신 짓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원래부터 꾸며대기에 소질이 없는 최은수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이하나와 함께 술을 마시면 양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꽃잎에 맺힌 이슬을 마시는 듯한 느낌이 들어 취기가 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최은수는 양주를 마시면서도, 담배를 피우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이하나에게 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를 굴복시키는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맑은 호수 같은 그녀의 눈에 푹 빠져 들어가지 않는 남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최은수는 이하나를 품에 안고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고향 어귀의 아카시아 꽃향기가 났다.
최은수는 친구가 부르는 노래 소리에 맞추어 이하나와 블루스를 출 때는 이하나의 향기에 취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 때문에 정상적인 호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을 느꼈다.
이하나에게 흠뻑 취한 최은수는 그녀와 살을 섞으며 밤을 새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행이 있어 그날 그냥 그렇게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명함을 원하기에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명함을 수첩에서 꺼내주고서 아쉬움을 뒤로 남기고 친구들과 함께 룸살롱을 나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고 해서 그는 그녀가 전화하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룸살롱에 다니는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마치 명함을 수집하는 사람들처럼 손님들의 명함을 원했고, 그 명함을 받았다고 해서 본인이 직접 그 손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객 관리 차원에서 아가씨들은 손님들의 명함을 원했고, 그 명함은 거의가 마담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열흘 후, 최은수에게 이하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동안 잘 지냈냐는 안부 전화였지만, 기대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았던 그는 마치 보물이 가득한 알리바바의 동굴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최은수는 이하나의 목소리를 듣자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충동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앞뒤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먼저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처럼 오늘 저녁에 친구들의 모임이 있는 것을 깜박 잊은 채 아무 생각 없이 룸살롱「아방궁」으로 가겠다고 그녀에게 약속을 해 버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친구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지만 그는 친구들의 모임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치부하면서 그녀와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다.
룸살롱을 찾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최은수는 퇴근을 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무교동 코오롱 빌딩 앞에서 내렸다. 룸살롱「아방궁」은 길 건너 골목에 있었다. 그는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자 사람들 무리에 떠밀리듯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가끔씩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이하나의 생각에 몰두한 채「아방궁」을 향해 걸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룸살롱「아방궁」안으로 들어서자 웨이터들보다 먼저 이하나가 나와 웃으면서 최은수를 반겼다. 그는 웃을 때 드러난 그녀의 하얀 치아를 바보처럼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처럼 즐겁고 행복한 데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침착하지 못하고 마음이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둘이나 있는 가장으로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으나, 그 죄책감은 이하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는 최은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약간의 죄책감도 아내에게 아니고 딸 둘에게 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만 벗어나면 최은수는 아내와 관련된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내와의 결혼은 애초부터 잘못된 인연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정해 준 여자를 아무 의미 없이 선택했던 것이다.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 낳고 살다 보면 정들게 마련이라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라는 것을 최은수는 나중에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 딸인 수정이만 없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아내와 헤어졌을 것이다.
「오늘 나하고 같이 잘 수 있어?」
얼마만큼 취기가 오르자 최은수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일회용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가장 깊숙한 내면에 숨어 있었던 욕망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은수는 이하나의 육체를 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지경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마지막 있는 힘까지 다해 자신의 정액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녀의 몸속에다 쏟아 붓고 싶은 마음이 불 위에 올려진 주전자의 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말을 해 놓고도 무안해진 최은수가 겸연쩍어 하자 이하나가 대답 대신 공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술값과 그녀의 화대비를 지불하기 위해 웨이터를 시켜 정 마담을 호출했다. 그는 이루어지기 힘든 계약을 성사시킨 바이어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텔방 안으로 들어서는 최은수의 가슴은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장난꾸러기처럼 요란하게 방망이질 쳐 대고 있었다. 그는 들떠 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복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요즘 한창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인기가 치솟고 있는 여자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끈 다음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집어 들고 병째 벌컥벌컥 들이켰으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뒤덮고 있었다. 이윽고 이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샤워하세요.」
최은수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처럼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나머지 옷은 그대로 입은 채 자기가 먼저 욕실로 들어가 욕실에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낸 그는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욕실을 나오자 양선아 역시 그처럼 옷을 입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이하나 역시 최은수처럼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욕실을 나왔다. 그녀는 룸살롱 호스티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여자였다.
두 사람은 중매로 갓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행동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던지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그 웃음으로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던 어색한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하나의 옷을 벗기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지만, 최은수는 감전 당한 사람처럼 손이 떨려 그녀의 옷을 벗길 수가 없었다. 그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은 다음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수줍어하며 천천히 옷을 벗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의 마지막 속옷인 팬티가 무릎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최은수는 자신의 입술을 첫날밤을 보내는 신부처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이하나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포갰다가 때었다. 잠깐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을 느꼈다. 꿈을 꾸고 있는 듯 몸이 공중 위로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풍처럼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최은수는 벌거벗은 이하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 눕힌 후 입고 있던 팬티를 벗어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자신도 침대로 올라갔다.
최은수는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는 격한 욕정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팔을 올려 침대 옆에 있는 스위치를 내렸다. 불이 꺼져 윤곽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참고 참았던 욕정을 그녀의 몸속으로 한꺼번에 쏟아 넣으면서 주체할 수 없는 쾌감에 거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대부분의 호스티스들은 상대하던 남자와 성관계를 가질 때 거래적인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 일부러 크게 신음 소리를 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마치 연기하는 연극인들처럼 완벽하게 내뱉는 그녀들의 신음 소리에 최면에 걸린 듯 일찍 흥분을 느끼게 된 남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루증 환자처럼 관계를 오래 끌지 못하고 사정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최은수의 밑에 깔린 이하나가 흐느끼는 신음 소리는 여느 호스티스처럼 일부러 내는 신음 소리가 아니었다.
최은수는 이하나의 몸 위에서 하던 짓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축축이 젖어 있는 그녀의 아랫배 밑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가 혀로 어린아이가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듯이 그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애무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환락의 도가니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하나가 두 손으로 시트를 부여잡은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최은수의 것이 다시 그녀의 몸 속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그러자 온몸 구석구석까지 꽉 차는 듯한 충만감과 사정없이 몰려드는 쾌감에 그녀는 다리를 오므리며 자신도 모르게 아악, 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며칠 후, 룸살롱「아방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이하나의 전화를 받고 나서 최은수는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었다. 운명이 그에게 미소를 던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는 그녀가 그 사이 마음이 변할까 봐「만나자」고 얼른 대답을 해 버렸다.
종로 3가 주변에 아는 커피숍이 없는 두 사람은 찾기 쉽게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다섯 시 삼십 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앞으로 세 시간 후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최은수는 문득 이하나의 벌거벗은 몸매를 떠올렸다. 사과처럼 탐스러운 그녀의 젖가슴과 촉촉이 젖어 있던 음부 그리고 성관계를 할 때의 몸동작 하나하나까지, 또 절정에 다 달았을 때 내뱉던 그녀의 신음 소리가 차례대로 떠오르면서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벌거벗은 그녀의 몸과 정사 장면을 떠올렸다 했더라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하나를 만나는 시간이 아직도 멀었지만 최은수의 마음은 벌써 피카디리 극장 앞에 가 그녀를 만나고 있었다.
이하나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약속 시간보다 이십오 분 정도 일찍 도착한 최은수의 손에는 시집 한 권이 있었다. 피카디리 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그녀가 시를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선물로 주고 싶어 종로 3가 지하철역 내에 있는 한우리 서점에서 구입한「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원태연의 시집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하나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최은수는 자신이 혹시 약속 장소를 잘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녀가 약속 장소를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 헷갈림에 혼동이 왔다. 당황해진 그는 길을 건너 단성사 극장 주위를 훑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이대로 못 만나면 그녀를 영영 못 만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그는 그녀를 찾으려고 주위를 서성거렸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절망에 가까운 낭패감이 그의 마음속을 괴롭게 했다.
최은수는 이하나와 장소가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원래의 약속 장소라고 생각한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초조하게 서서 연거푸 담배를 두 개비나 피워 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두는 건데, 그러지 못한 것을 그는 후회했다.
약속 시간이 삼십 분이 지난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이하나가 모습을 나타내자 얼마 전까지 최은수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길한 예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기쁨이 두 배로 가득 들어찼다. 그녀를 보자 그는 태연하게 굴려고 애썼지만,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늦게 와서 미안해하는 이하나의 얼굴에 애교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 아니. 나도 나온 지 얼마…… 안 돼.」
최은수는 이하나가 더더욱 미안해할까 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거리며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은 첫 시야에 들어온「갤러리」라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숍 안은 조용했다. 흘러간 팝송과 클래식 음악이 번갈아 흐르고, 벽 사면엔 미대생들이 그린 그림들이 여러 편 걸려 있었다. 미술관에 온 느낌이었다.
최은수는 이하나가 자기를 만나기 위해 예쁘게 화장을 하고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고 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앞자리에 앉자 아카시아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 세 명이 자꾸만 두 사람 쪽을 힐끗거리며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는 그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였지만 짐짓 모르는 척하며 벽면에 붙어 있는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뭘 마시겠어요?」
「갤러리」커피숍은 셀프 서비스였다. 이하나의 물음에 최은수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제가 갖다 올게요. 뭘 드시겠어요?」
이하나가 최은수의 손에 들려 있던 지폐를 가볍게 빼앗으며 물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귀여워 보였다.
「커피…….」
최은수는 커피를 가지러 종종걸음으로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 이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지난번 가졌던 그녀와의 정사를 생각하며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감도는 걸 느꼈다. 몸속에 숨어 있던 그녀의 체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순간, 최은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미처 생각해 두지 않아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져 버렸다. 이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신 후에는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이하나의 취향을 몰라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적당한 계획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를 가지고 올 때까지 뾰족한 계획이 떠오르지 않자 그는 할 수 없이 속 편하게 그녀와 의논을 해서 결정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갤러리」커피숍에서 나온 두 사람은 비원 방향으로 백 미터 가량 올라가다 왼쪽에 있는 레스토랑「아셀」로 들어가 도로변의 창가에 앉아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최은수는 오늘 이하나와의 만남에서 룸살롱「아방궁」에서의 만남과는 아주 색다른 흥분을 느꼈다. 마치 오래 전의 첫사랑이 다시 돌아온 듯 꿈결 같은 행복이 찾아 왔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최은수는 이하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구상하고 왔지만, 막상 그녀 앞에서는 뒤죽박죽 뒤엉키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도 재미없게 하는 반면에 재미없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대졸 출신이고,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그는 그녀의 미소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녀의 슬픈 사연을 듣는 게 괴로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화의 공통점은 없었지만 심각한 화제를 피해 가볍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최은수는 평소에 길게 느껴지던 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지나갈 만큼 짧다는 걸 이하나와의 만남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벌써 그녀가 룸살롱「아방궁」으로 출근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그녀를 그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최은수는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찬 눈으로 이하나를 바라보며 아까 지하철 역내에 있는 한우리 서점에서 구입한 시집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시집이야. 선아가 시를 좋아할 것 같아서 오는 길에 한 권 샀어.」
「고마워요.」
최은수로부터 시집을 선물 받은 이하나는 생일날에 여자 어린아이가 인형을 선물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녀가 시를 좋아할 거라는 그의 판단이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최은수가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이하나에게 자주는 아니더라도 앞으로 계속 이렇게 밖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흔쾌히 승낙을 하면서 빙그레 웃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꼈다. 그녀의 체온이 따스하게 와 닿으면서 그녀가 팔짱을 낀 팔에 뭉실한 젖가슴이 느껴지는 순간 날아갈 듯한 기분에 그는 기쁨의 탄성을 올렸다.
그 후부터 최은수는 근무가 끝나면 종로 3가에 있는「갤러리」커피숍이나 이하나가 자취하고 있는 신사동의「꾸뽈」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레스토랑「아셀」에서 맥주를 마시고, 가끔 그녀 어깨 위에 팔을 두르고 룸살롱「아방궁」으로 가고, 끝나면 호텔로 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성관계를 할 때마다 더 자극적이고 더 쾌락적인 것을 원했고, 온몸이 구름 위에 뜬 듯한 환상적인 쾌감을 느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서로의 취향과 기호가 달랐지만 최은수나 이하나에게 그런 것이 불만이나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 가지 못했던 젊은층들만이 모이는 곳이나 성격상 맞지 않은 곳에도 그녀가 그곳에 가길 원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또 그녀가 원하면 좋아하지 않는 류의 재미없는 영화라고 해서 거절한 적도 없었다. 다만, 두 사람에게로 모아지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많은 것도 많은 것이겠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양선아를 만나면 최은수는 모든 게 새롭고 즐거웠고, 마치 꿈속의 사랑이 현실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난 여인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꽃이 되어 버린 그녀의 입술을 갖고 싶어
얼굴이 빨개집니다.
그런 내 마음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그녀 앞에선 항상 술을 마십니다.
하지만 나는 술엔 취하지가 않습니다.
이미 그녀의 향기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최은수는 이하나와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그 동안 유지해 오던 생활의 질서가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의 하루 일과는 대부분 그녀의 일과에 맞춰지게 되었고, 그의 머릿속은 이스라엘을 점령한 로마병정처럼 잠시 헤어지는 그 시간도 아쉬워할 만큼 그녀가 점거해 버렸다.
최은수는 이하나 외에는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거의 매일매일 그리고 온종일 그녀의 생각으로 보내게 되었다. 요즘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같았다.
음악을 좋아해 동네의 고등학교 앞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최은수의 아내는 가족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가 아니었다. 부유한 집에서 아무 모자람 없이 귀여움만 받으며 성장한 아내는 현모양처가 되기에 앞서 개성이 강하고 자기의 것을 추구하는데 집착이 강한 여성이었다.
「자기가 가져오는 쥐꼬리만한 월급만 갖고는 애들 교육은커녕 생활하기에도 빠듯해. 그나마 지금 내가 돈을 버니까 이 정도로 살고 있는 거야.」
그 핑계로 집안일은 남의 일처럼 거들떠보지 않는 아내는 최은수가 불만을 내뱉을 때마다 항상 그렇게 말하며 그의 기를 꺾었다.
「그래, 당신 때문에 내가 호강하겠군.」
그때마다 최은수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왈가왈부했다가는 곧바로 싸움으로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왈가왈부 싸우기 싫어 모든 것을 양보하다 보니 가정에서 최은수의 위치는 바람 빠지는 고무풍선처럼 점점 쪼그라들어 집 안 청소와 자잘한 빨래는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일까지 그의 몫이 되기 일쑤였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최은수에겐 벅찬 일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가정을 위해 신경을 쓰지 않는 아내는 한 마디로 아이들에게 불성실한 어머니였던 것이다.
최은수는 자신의 결점을 감싸줄 수 있는 여자와, 술 취한 남편을 위해 군말 없이 해장국을 끓여 주는 여자와, 아침이면 넥타이를 매주는 여자와,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따뜻하게 가정을 꾸려 나가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다. 아니, 결혼하기 전에는 모든 여자가 결혼을 하면 다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최은수는 정반대되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어쩌면 그가 원하던 그런 여자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내와 결혼하고 나서야 자신이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무실 건물 밖으로 나온 최은수는 병아리가 물을 먹고 고개를 쳐들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 아직 어두워질 시간이 아니었지만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기상예보에 의하면 올 겨울엔 눈이 많이 올 거라고 했지만 계속 이어지는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에 어디 눈이 오겠는가.
이하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칠월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라 있었던 최은수의 마음이, 모든 것들이 삭막하게 느껴지던 과거와는 달리 그녀를 만난 후부터는 눈 오는 날을 기다리는 동심이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 옹달샘처럼 마음속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더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야만 하는 그의 발걸음은 뒤꿈치에 쇠뭉치를 끌고 가는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오늘밤 최은수는 집에서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내일부터 입어야 할 와이셔츠를 몇 벌 다려 놓아야 했고, 또 하나는 사무실에서 처리하지 못한 일을 밤을 꼬박 새우서라도 끝내야 했다.
이대로 뒤돌아서서 이하나에게 달려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최은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연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 마시고 내뿜는 짓을 되풀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 타 버린 담배꽁초를 바닥에 내던지고서 신경질적으로 발로 비벼 끄고 달도 별도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것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아플 때, 슬플 때, 힘들고 지칠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는데 최은수는 이하나가 외롭거나 괴로울 때, 아프거나 슬플 때, 힘들고 지칠 때 한 번도 그녀 곁에 있어 주지 못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고,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이하나에게 당장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함께 그녀와 고통을 나누었으면 하는 게 최은수의 소망이고, 그게 사랑의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최은수는 이하나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그녀는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가끔 그걸 느낄 때마다 그는 가슴이 에이는 듯한 슬픔을 느끼며, 아직까지는 그녀가 스스로 얘기해 줄 때까지 절대 먼저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책을 음악을 그림을 커피를
읽고 듣고 보고 마시면서도
그녀를 생각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잊을까 봐
꿈을 꾸듯이
그녀를 생각합니다.
그녀는 잠시도 내 곁에서 떠날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최은수는 한꺼번에 일주일 동안 입을 와이셔츠를 다려 놓고, 못 끝냈던 일도 서둘러 끝내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하나 때문이었다.
최은수는 아내와 오붓하게 마주 앉아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어 볼 시간을 좀처럼 갖지 못했다. 오직 레코드 가게가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양 집안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내는 밤늦게 돌아오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아내는 전과 다름없이 최은수가 문을 열어 주자 아무 말 없이 옷을 벗어 옷장에 걸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아내가 씻는 동안 그는 아내와 몸을 섞어 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수정이는 이미 컴퓨터 게임을 끝내고 자고 있었다.
최은수는 샤워를 마치고 커다란 수건으로 알몸을 가리고 욕실을 나오는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당겨 안았다. 아내의 몸과 젖은 머리에서 향긋한 비누 냄새와 샴푸 냄새가 풍겨 왔다.
최은수는 아내의 입술을 천천히 빨다가 두 팔을 길게 뻗어 아내의 등과 허벅지에 대고 번쩍 들어 안았다. 아내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듯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최은수가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수건을 젖히자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내의 몸은 아이를 낳은 여자 같지 않게 탄력을 처녀 때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최은수는 옷을 벗고 아내의 몸 위로 올라가 입술로 젖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내의 몸은 예전처럼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원기 왕성했던 그의 성기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잔뜩 기가 죽어 좀처럼 일어설 생각을 않고 있었다. 졸지에 두 사람의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등을 돌리고 눕는 아내를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던 최은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들고 베란다에 서서 하나 둘씩 꺼져 가는 아파트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불현듯 이하나가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