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을 얼마 앞 둔 마지막 겨울방학이었다
강원도 오지산골 마을에도 겨울이 오고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기차도 숨이차서 쉬어가는 하늘아래 첫동네에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한 여학생이 살고 있었다
하늘이 세평 반, 앞산이 얼굴과 맞 닿아 숨이 턱턱 막히는 동네
국군의 날 입기 시작한 겨울 내복을 식목일날 벗는 우리의 정미가 살고 있었다
겨우내 눈이 쌓이고 녹기를 수십번... 길고도 긴 겨울방학을 지루하게 나고 있었다
그 당시 인기잡지로 "여학생"과 "진학"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진학에 글 한편을 올리게 되었고 당선이 되어 실리게 된 행운이 주어졌다
내 이름 석자와 주소 그리고 내 글이 인쇄되어 나온 그 잡지를 들고 온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이보다 더 신기한 일은 있을 수 없었으니...한마디로 출세를 한 것이라 할 수 도 있고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표현함도 가능하기라 생각한다
두메 산골에 사는 한 여학생의 글이 전국의 학생들이 다 읽는 잡지에 실렸으니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건 보통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부터였다
글이 실리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편지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통이 아닌 무려 수십통의 편지가 분명히 내 이름으로 온 것이다
이럴 수가...
다시 놀라운 사실은 이런 편지가 하루에 두 차례나 배달이 되어지고 그 만큼 우체부아저씨도
우리집을 드나드시느라 더 바쁘게 되었다
모녀만 외로히 살아가는 우리집 싸리문으로 어김없이 하루에 두번씩 반가운 편지들이 드나들었고
아저씨는 내 앞에 한아름의 편지를 쏟아놓고 사라지곤 했다
서울, 부산은 물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시골마을의 학생들에게까지 편지는 끊이지 않고
날아 들었으니 그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예쁜 글씨체로 정성스레 보내온 편지에서부터...남학생의 사랑고백까지...
글씨도 다양 다양...내용도 다양 다양...거의 열에 들뜬 사람처럼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중에 하는 일이라곤 편지 읽는 것과 답장 쓰는 일이 전부였다
펜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고 그로 인하여 신경 쓰이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반복되는 친구들을 분류해야하고, 내용을 파악해야 하며, 편지지를 사모아야 하고
우표에 거금을 투자해야 하는등 부수적인 문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보낼 편지내용을 구상하느라 해가 지는지 달이 뜨는지 모르게 하루를 창작열에 불태워야 했고
밑천이 바닥을 길 즈음엔 그간에 온 편지내용을 배껴 쓰느라 머리를 또 짜내야 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 일을 다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쓴 것이 조수를 하나 두는 것이었고 급기야는 무보수로 한 사람을 채용하게
되었으니 바로 만만한 울엄마였다
울엄마 하시는 일은 다름아닌 펜 분류작업이다
이름에 따라 편지들을 나누어 분류작업을 해야하고, 편지내용이 생각나지 않으면 조언도 해 주시고
때론 우체국방문도 해 주셨다
아마 엄마의 내조(?)가 없었더라면 난 아마 조기에 지쳐서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몇달간 편지는 눈 내림 만큼이나 쌓여 갔으니...물론 답장을 충실히 해 주니까 말이다
겨울 추위도 한풀 꺾일 즈음하여 천하의 철인 정미도 이제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한다
편지의 방문도 그리 반가워지지가 않고 내용도 대강 훑어지고, 답장쓰는 것도 점점 게을러지기
시작한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던가
영어로는 give and take 라고 했던가
답장이 늦어지고 급기야 얼마간의 소식이 없자 하나 둘 친구들도 멀어져 갔다
한무더기의 편지는 몇통으로 줄어 들게 되었고... 처마끝의 고드름이 녹아가는 계절엔
급기야 편지가 없는 날도 생겨났으니...
서운함 반 홀가분함 반으로 그렇게 겨울방학은 끝이 나게 되었다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의 추억쯤으로 여기어도 좋았다
그러나 소중한 것 하나는 항상 남겨두는 것이 인간의 속성임을 왜 모르는가
부산에 살고 있는 한 남학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으니
글씨도 잘쓰고 문학적인 표현들이 나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 왔으며 나 또한 심혈을 기울여 답장을 보냈다
공부도 잘하여 전국 고교 학력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도 여러번 탓다고 한다
사진도 보내오고, 선물도 보내오고 언젠가 한번 찾으리라는 소식도 보내왔다
산골 소녀가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겠는가
그당시 완벽에 가깝게 느껴졌던 문장 실력과 경험해보지 못한 도시의 이야기들
나의 짧은 문장실력을 항상 칭찬해 주었고 꼭 한번 그림같은 우리집을 와 보고 싶다고했다
정미는 아마 한송이의 풀꽃같은 소녀일거라고도 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 잘 생기고, 장래도 촉망되는 한 남학생의 끊임없는 관심의 글을 받을 수
있는 나는 정말 행운아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정미의 첫 짝사랑은 시작이 되었으니...
비극의 주인공이여...그대 이름은 김 정미
이렇게 글을 주고 받은지 일년이 다 되어 갈 즈음
학교에서 막 돌아와 대문을 여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루끝에 웬 남학생이 앉아 있는게 아닌가
나는 순간 직감으로 부산에 있는 그 남학생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발견한 그 남학생도 눈이 동그래졌고 우린 한동안 멍하니 말이 없었다
손엔 번쩍 번쩍 빛나는 트로피가 들려있었다
역시 부산의 그 남학생이었다
언제 한번 강원도 우리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설마 하고 있었기에
그의 방문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다음 상황은 표현하기에 앞서 님들의 더 짐작이 빠를 줄 안다
부끄러움뿐... 아무것도 떠오르는게 없었다
그 순간은 지금도 안개자옥함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없다
어쩜 떠올리고 싶지 않음이 무의식중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림같은 우리집은... 일주일만에 완성한 토담집이었고
풀꽃같은 소녀는 햇빛에 사정없이 그을려 흡사 토인같은 모습이었으며
충실한 조수라고 자랑하던 우리 엄마는 환갑을 훌쩍 넘긴 시골 노인이었으며
보여지는 모든것들은 아~~~~~~~~온통 비참한 것 투성이었으니...
투박한 마루끝에 금빛 나는 트로피하나 어울리지 않게 놓여 있구나
"전국 고교 학력 경시대회 최우수상" ...그리고 완벽한 촌스러움의 모든것들이여
금빛 트로피...그 남학생...나머진 완벽한 강원도의 힘(?)
정말 이런 이야기 글로 쓰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해보았다
훗날 그 어떠한 것들을 추억하게 되더라도 이 순간만은 영원히 떠오름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었다
이보다 더 부끄러울 수 있는 것이 나에게 존재할 수 있게 될까 생각했다
특히 사춘기 여고생의 인생속에서 말이다
그렇게 남학생은 떠나갔다...트로피는 남겨두고...
오랜 날 주고받은 아름다운 사연들 모두 바람에 날리우고 뒤 한번 돌아봄 없이 떠나갔다
겨우 한포기의 풀꽃이었기에 백마탄 왕자님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 후 정미는 오지 마을이 싫어졌다
아름다운 산...그림같은 우리집...천사를 닮은 우리엄마...코발트빛 하늘...
모두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을
즐겨 오르던 뒷동산도 싫고, 혓바닥이 붉게 물들도록 따 먹던 오디열매도, 진달래꽃도
나같이 까만 친구들 얼굴도 모두 보기 싫어졌다
더 더욱 싫은 건 내 자신이었다
내가 사는 이 공간은 더 이상 낭만적인 곳이기는 커녕 온통 초라함 투성이었다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를 찾아 떠나야 한다
마음이 급해졌다 떠남을 위한...
한시바삐 이 곳을 탈출해야함이 이제부터 나의 최대 숙제임을 마음으로 다진다
나는 이 곳을 떠나리라
금빛 트로피를 남기고 뒤 한번 돌아봄 없이 떠나가던 그 남학생의 세계로 나도 자신있게
걸어나가야 한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그 남학생덕에(?) 오지마을은 겨우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
할 말이 별로 없다
단지 느끼는 것은 이런 부끄러운 추억도 새삼 그리워질 수 있는 나이까지 왔다는 사실 하나만이
달라져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