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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s
기차가 출발 3분전인데 전화를 해도 주희는 곧 도착한다는 말만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벌써 기차에 오르려고 플랫폼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휘진이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기차타러 갑시다.”
그는 내 손에 있는 표를 빼앗아 개표를 하고 의아해하는 나의 손을 꼭 쥔 채 플랫폼으로 갔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주희씨를 졸랐소. 당신은 도통 나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으니.”
그와 나란히 앉아 있으니 심장이 또 쿵쾅거렸다. 내 심장은 병이 났나 보다. 이미 내 마음은 그를 정리했고, 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데 심장은 마치 불에 덴 듯 화끈거리고 심하게 펌프질을 해댔다. 유리창에 그의 얼굴이 비췄다.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눈을 감았다. 그는 정동진에 도착할 때까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서 모래밭으로 나갔다. 어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붉게 일렁이던 해그림자가 드디어 바닷가로 해를 쏙 뱉어내자 만세를 불렀다. 휘진도 만세를 부르며 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팔에 힘을 주고 꼭 껴안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기차는 해돋이에 정열을 쏟아부어 지쳐 잠든 사람들의 고른 숨소리로 가득찼다. 기차안의 온도가 너무 높아서였나. 노곤하니 졸음이 밀려왔다.
그도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나에게 무시를 받으면서 나와 다시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다른 좋은 여자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 그렇게 자존심 센 사람이 나의 무시에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 옆을 지키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기차의 규칙적인 흔들림이 멈췄다. 양평역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어깨를 베고, 그는 또 내 머리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내가 깨는 기척에 그도 깼는지 기지개를 폈다.
“우리 앞으로도 1월 1일의 첫 태양은 함께 맞이합시다. 죽을때까지 말이오.”
그와 미래를 약속하고 싶지 않았다. 아파트에 도착해서는 그는 자기집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자기 몇마디 말에 그동안의 감정들이 눈 녹듯 다 녹아버릴 줄 알았나. 3류 영화에서처럼 같이 여행다녀오면 만사 OK되고 뜨거운 밤을 보낸다...뭐 그런 기대는 진작에 하지 말았어야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집으로 와버렸다.
주희는 팔자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있다.
“어? 벌써 왔어? 휘진씨는 집으로 바로 가고?”
“야~, 너 배신이야. 사람 황당하게 만들고. 일단 씻고 얘기하자.”
주희는 씻고 나오니 맥주 하나를 던졌다.
“술 좀 땡길 것 같은데... 마셔라. 속 탈테니.”
“됐습니다요. 내가 왜? 신경끄고 살란다.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벅차단다.”
“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지금 복잡해 죽는다는거 알아. 왜 안하던 해돋이는 보러가고 난리냐? 제발 이제 둘이 좀 솔직해져봐. 맨날 겉돌기만 하지 말고.”
“너 어제 뭐 잘못먹었니? 갑자기 왜 휘진씨 편을 들고 그러냐?”
“너 휘진씨가 누군지 알아? 그때 도서관의.......아니다. 니가 직접 들어라. 여튼 너 휘진씨랑 대화 좀 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지 말고.”
휘진 얘기라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하던 주희가 갑자기 변해있었다. 적응이 안되지만 피곤해서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현구가 수레국화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 수레국화에 머물렀다.
“안녕하세요, 선혜씨. ”
기억하고말고. 나의 유일한 소개팅남인걸. 휘진과 몇 번 더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럼 휘진이 아니고 그 사람이 저 많은 수레국화를 보냈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선혜씨, 오늘 이 꽃도 휘진이가 보낸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그가 얘기 좀 하자고 해서 커피를 뽑아들고 강사휴게실이 비어 있어서 그리로 들어갔다.
“정말 휘진이와 이혼하실겁니까?”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선혜씨가 모르는 부분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저도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한 사건만 보고 선혜씨가 마음을 닫아버리면 휘진이는 살 수가 없을 겁니다. 그 녀석 그런 놈이거든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자기 힘으로 안되니 친구까지 보내서 이 난리람.
“휘진이는 선혜씨에게 꽃보내는거 비밀로 하고 싶어 했어요. 그때처럼요.”
“그때요?”
“도서관에서 선혜씨 바라볼때 처럼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선혜씨 4학년때 그 빡빡한 도서관에 왜 유독 선혜씨 자리만 있었는 줄 아십니까?”
“그거야 뭐 고학생 때문에......”
“고학생? 휘진이를 그렇게 부르셨나보네요.”
“그럼 휘진씨가 그 고학생이라구요? 말도 안돼. 그 뿔테안경이 휘진씨였다구요?”
“네, 그땐 그녀석 공부 좀 하겠다고 완전히 고시생 분위기로 다녔으니까요. 휘진이 선혜씨 자리 맡아줘야 한다고 도서관 문여는 새벽 5시에 가서 자리잡아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2시에 도서관 끝나면 선혜씨 기숙사 안전하게 들어가는 거 꼭 보고 집으로 갔구요. 덕분에 그 놈이 고시에 합격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왜 그때 표현을 안했죠?”
“기분나쁘게는 듣지 말아요. 선혜씨 집이 어려운데 선혜씨가 고생하는거 보고 부담을 주기 싫었겠죠. 선혜씨는 연애같은거 사치스럽다고 했다면서요?”
“그거야 뭐 그때는 집안이 워낙 어려워서 연애할 시간도 없었는걸요.”
“과외한 현성이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현성이 어머님 도움 많이 받았는걸요.”
“저희 작은어머니세요. 현성이 제 사촌동생이구요.”
이건 또 뭐라는겨.. 얽히고 얽힌 것이 거미줄이 따로 없다.
“휘진이가 하도 부탁을 하더라구요. 우리 작은 어머니네 잘 사니까 고액과외 좀 하라고. 그렇게 인상쓰지 마세요. 작은어머니도 아직까지 선혜씨 고마워하니까. 사실 현성이가 꼴통이잖아요. 그런 놈 떡하니 4년제 대학 보내놨으니 선혜씨 덕분이라고.”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휘진이는 선혜씨 보기위해 이 학교로 지원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참 미련한 놈이죠. 다른건 빠릿빠릿하게 잘도 하는데 여자 문제만큼은 그 놈이 미련스럽더라구요. 일단 남자들은 여자한테 대쉬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데 그놈은 그런 것조차 선혜씨한테는 부담이라고 표현 한 번 안하고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난 그 사람이 워낙 즉흥적으로 나에게 사귀자고 한 줄 알았다. 같이 일 몇 일 해본게 전부인데 사귀자고 했으니 연애에는 가벼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휘진이는 선혜씨 마음이 자기 만큼 깊지가 않다고 생각했었나봅니다. 그래서 그런 오해도 하게 되었구요. 사랑한 만큼 선혜씨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거죠. 하지만 그 녀석 그 와중에도 선혜씨 사랑했습니다. 법적으로는 부부니까 그나마 연결끈이 있다구요. 선혜씨를 영영 보내지는 못할거라구요.”
“그건 집착이예요.”
“여자들 입장에서는 집착으로 보이겠지만, 남자는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면 집착이 아니라 목숨까지 걸 수 있습니다. ”
“그런 말 너무 현실감이 없어요. 휘진씨는 저에게 한마디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어요.”
“만약 그 아이가 휘진이 애가 아니라면,. 선혜씨 따라다니던 그 남자가 남의 일이 아니라 서 자기가 슬픔이 더 크다고 하는걸 들은 휘진이라면, 선혜씨가 할 말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둘은 헤어져야 하니까 휘진이는 참은 겁니다. 선혜씨를 도저히 안보고는 살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녀석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첫사랑에도 그렇게 실패했으니까요.”
“첫사랑요?”
“이런 얘기는 본인들이 해야 하지만, 그 녀석이 말할 인간도 아니고.. 휘진이 대학때 사귀던 애가 휘진이 군대 간 사이 새로 남자를 사겨서 임신까지 했더라구요. 그러고도 휘진이 휴가 나오면 만나고. 아마 말년 휴가 나왔을 때였던 것 같은데.. 휘진이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 여자는 남자랑 헤어졌는지 휘진이보고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구요. 아마 저 같으면 다시는 안봤을텐데 휘진이는 한번 사랑을 하면 미치도록 하는 놈입니다. 그 여자애와 같이 병원까지 가주더군요. 친구들에게 빌려 수술비까지 대고.”
“둘은 어떻게 헤어졌나요?”
“여자애가 헤어지자고 했죠. 저도 양심은 있었던지 휘진이에게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옆에서 보는 우리는 속이 다 시원했지만 휘진이는 한참을 힘들어했습니다. 자기가 군대가서 소홀했기 때문에 그애가 바람이 났다는 거예요. 자기 탓만 하는 바보더라구요.”
“정말 바보같군요. 휘진씨.”
“그러니 선혜씨가 헤어지자고 할까봐 지레 겁을 먹은 것입니다. 또 다시 사랑을 놓치긴 싫었겠죠. 휘진이는 설사 선혜씨가 남의 아이를 가졌다 해도 헤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선혜씨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할 놈이거든요. ”
“그건 핑계일 뿐이예요. 누가 없다고 해서 못 살 사람은 없거든요.”
“선혜씨는 그럴지 몰라도 휘진이는 다릅니다. 그녀석이 나약해서도, 집착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선혜씨를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에 이 세상에 몇 안될 것입니다. 휘진이가 그 중 하나죠.”
“현구씨, 전 벌써 마음 정리 끝났어요. 저희 어머니도 아세요. 더 이상 식구들에게도 상처를 줄 수는 없어요.”
“압니다. 하지만 휘진이도 할만큼은 했습니다. 선혜씨와 냉전일때도 선혜씨 동생 등록금도 다 내줬고, 이번에 취직할때도 휘진이가 직접 부탁해서 된 것입니다. 선혜씨 아버지 서울대병원에서 다달이 무료로 진료받으시는거 휘진이가 교수님 찾아다니며 진료시간 억지로 빼고, 진료비 다 내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에게 그런 도움 받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내가 사랑했던 남자에게만큼은 난 그런 부담 지우고 싶지 않았다.
“기분나쁘라고 한 말 아닙니다. 휘진이는 자존심 센 선혜씨 알면 펄쩍 뛴다고 비밀에 부쳤지만, 옆에서 보는 제가 더 이상 못봐 주겠습니다. 말 나온 김에 더 하죠. 이 꽃..센토레아는 꽃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꽃이 아니란거 선혜씨도 아실 겁니다. 특히 이런 겨울에는요. 휘진이 부탁받고 저 이 꽃 구하느라 전라도까지 내려가서 비닐하우스 한 동을 다 샀습니다.. 이 꽃이 선혜씨를 행복하게 해줄거라고 휘진이가 하도 부탁하길래. 휴~ 미안해요. 제가 더 답답해서 감정이 격해졌네요.”
현구가 가고도 한참이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미진이 캐나다서 강사가 전화했다고 찾으러 왔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강사는 눈이 많이 와서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을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해서 퇴근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의 부모님 집 전화번호다. 한참 망설인 끝에 받았다. 휘진이다.
“목동 집으로 좀 와야겠어.”
그의 부모님을 어떻게 본담..... 머리가 어지럽다.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전화기가 넘겨졌다.
“선혜야. 아버지다. 바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