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나는 혼자 소파에 앉아 사무실을 지키며 눈을 감은 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멜로디가 은은한 흘러간 팝송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폴 사이몬의「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끝나고 찰리 리치의「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The most beautiful girl)」이 흘러나왔다. 순간 내 가슴속으로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비수처럼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언제부터였는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에 내리는 비, 아주 오래 전부터 가을비는 항상 내 마음을 외롭게 하는 마법을 갖고 있었다. 그 외로움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버지가 되고 학부모가 되어서도 선천성 알레르기처럼 내 마음속을 짓눌렀다.
처음으로 가을비를 보며 외로움을 느꼈던 적은 중학교 일 학년 때였다. 난 그때 인형처럼 귀여운 한 소녀를 꽃에 비유하면서 내 마음속에 그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일곱 빛깔 무지개 색으로 색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소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나는 소녀 앞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정신이 몽롱해져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소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비에 젖은 코스모스 꽃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언덕길을 내려오는 소녀를 발견한 나는 재빨리 몸을 커다란 나무 뒤에 숨겼다. 다행히 소녀는 나무 뒤에 숨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는 한 남학생과 함께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소녀와 함께 있는 남학생이 나하고 친한 친구였다.
나무 뒤에 숨어 꼼짝하지 않고 있던 나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비에 젖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나는 끝내 모습을 그들 앞에 나타내지 못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외로움은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밀려오는 외로움에 쫓겨 우산 없이 출판사에서 나온 나는 마땅히 갈 곳도 없으면서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 지하철 안은 한가했지만 비어 있는 자리는 없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지하철 안에 붙어 있는 출판사의 신간 광고를 보다가 문득 양선아가 생각났다. 지난번 그녀를 아파트까지 데려다주고 보름 정도가 지났지만 두 번 전화로 서로의 안부만 물었을 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별안간 그녀가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한 핑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핑계가 전혀 떠오르지 않은 나는 무심코 광화문에서 내려 지하철역과 연결된 교보문고로 들어갔다.
서점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양선아의 수필집「스물아홉의 느낀 사랑」이 변함없이 베스트셀러 부문에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새로 나온 책들을 훑어본 다음 한 권도 사지 않은 채 다시 광화문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양선아를 만나기 위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내가 요즘 보기 드문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보였다.
결국 내가 찾아간 곳은 양선아의 아파트가 아닌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 있는 실내 포장마차였다.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손으로 털어 내며 들어간 실내 포장마차 안에는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사랑했던 그 소녀를 또 떠올렸다. 지금 평범한 주부가 되었을 것 같은 그 소녀의 이름은 이경희였다.
남들은 첫사랑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는 첫사랑을 생각할 때면 외로움을 느꼈다. 한 번도「난 네가 무척 좋아」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헤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여 연기를 길게 내뿜은 다음 주머니에서 명함과 볼펜을 꺼냈다. 명함은 어제 윤덕재가 가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명함이 없어 곤혹스러워 하던 내 모습을 보고서 출판사 편집부장이라는 직책으로 만들어 준 거였다.
나는 명함 뒷면에다 어릴 적 그 소녀를 그리워하다 외로워서 낙서장에 휘갈겨 썼던,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낙서를 작은 글씨로 적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수평선 위를 떠도는
외로운 갈매기랍니다.
내 마음은
무지개 닮은 소녀를
그리워하며
달빛 속으로 스며든
외로운 별빛이랍니다.
무척 좋아했지만 끝내 말 한 번 붙여 보지 못하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슴앓이만 앓았던 소녀의 얼굴 위에 양선아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고 겹쳐져 떠올랐다. 나는 이번엔 연거푸 두 잔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그녀를 만날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비를 고스란히 맞은 나는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양선아의 아파트 앞에 와 있었다. 끝까지 그녀를 만날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 나는 택시를 타고 그녀의 아파트 입구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장 그녀를 찾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아파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방을 쳐다보았다. 불이 켜 있었다.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어느 틈에 내 발걸음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추고 버튼을 눌렀다. 팔 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와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십오 층 버튼을 눌렀다.
나는 양선아의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려다 술에 취한 탓인지 몸을 가누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내가 넘어지는 소리에 놀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마! 이 선생님, 다친 데 없으세요?」
양선아는 넘어져 있는 내 팔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죄송……합니다. 비 오는 날…… 청승맞게 찾아 와서…….」
나는 말을 더듬거리며 겨우 말했다. 그러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척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한걸음에 달려 왔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선생님의 옷이 다 젖었어요.」
나는 구두를 벗었다. 양말이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현관에 털썩 주저앉아 양말을 벗었다. 양선아가 수건을 가져와 내게 건네줬다.
「비를 너무 많이 맞으셨어요. 오신다고 전화하셨으면 우산 가지고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
양선아는 마치 며칠 전 출장 갔다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듯 미소를 지으며 날 반겼다.
「저도 전화하고 싶었지만…….」
양선아의 따뜻한 미소에 용기를 얻은 나는 그녀에게 사랑하노라고, 그래서 이렇게 찾아 왔노라고 말을 하려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만 용기를 잃고 말았다.
「우리 이야기는 이따 하기로 하고, 우선 샤워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아닙니다. 잠깐 앉아 있다가 그냥 갈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몸은 이미 욕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양선아가 마련해 준 그녀의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그녀가 타 준 따뜻한 꿀물을 마시고, 곧 그녀의 침대 위에서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꿈조차 꾸지 않을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잠을 자고서 깨어났다. 꽤 오래 잔 것 같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단번에 양선아의 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기억났다. 그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했고 내가 어떻게 했는지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그녀와 있었던 일이 모두 꿈만 같았다.
나는 전등불을 켜고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벽시계가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방을 휘익 둘러보았다. 깨끗하고 아담한 방이었다. 우리나라의 여류화가인 천경자의 그림과 베토벤의 액자 사진이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작은 해바라기 꽃이 한 송이 꽂혀 있었고, 벽면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양선아가 들어왔다. 지금까지 그녀는 자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그녀 보기가 민망해 엉거주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주저 앉혔다.
「일어나셨어요?」
「제가 큰 실수를 했나 봅니다.」
「저한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이 선생님이 저한테 하시는 건 실수가 아니에요.」
양선아가 내 곁에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녀가 내 손을 잡자 용기가 생긴 나는 그녀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자 마치 내가 먼저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두 팔로 내 몸을 감으며 내 품에 안겼다. 눈을 꼭 감은 채 그녀를 힘주어 껴안은 나는 그녀에게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나는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갰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빠른 손놀림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백살같이 흰 젖가슴이 드러나자 나의 욕정은 짚더미에 옮겨 붙은 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양선아는 내 품안에서 잠들었고,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이 된 나는 흥분에 떠는 몸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녀와 함께 잠들지 못하고 책상 위에 있는 작은 해바리기꽃을 바라보며 행복의 꿈에 젖어 있었다.
어디선가 새벽기도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차임벨 소리가 먼 곳에서 은은하게 들려 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였다.
그런데 땅 구멍에서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불쑥 튀어나오듯 별안간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나는 불안한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혼 초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본의 아니게 외박하고 나서 정신을 차렸을 때 찾아 왔던 그런 불안감이었다.
지난번 술에 취한 양선아를 혼자 남겨 둘 수 없어 여관에서 밤을 보냈던 그 날, 저녁에 다시 만난 그녀를 혼자 보내는 게 아쉬워 아파트까지 바래다주고 늦게 집으로 들어간 그날 아내는 나를 프라이팬 위에다 올려놓은 멸치 볶듯이 못살게 볶아댔다.
그 동안 아내가 내게 뭔가를 트집 잡고 바가지를 긁기 위해 벼르고 벼르던 중에 숲 속에 쳐놓은 올가미에 걸려든 토끼처럼 나는 아내가 쳐놓은 올가미에 제대로 걸려든 셈이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나는 아내가 있는 남편이고, 아들과 딸이 있는 아버지이고,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었다. 비록 실직자가 된-아내는 내가 윤덕재의 일을 도와주는 걸 모르고 있었다-나에 대한 실망이 커 마치 나를 파충류 닮은 외계인을 대하듯 했지만 아내는 집에 전화조차 하지 않고 들어오지 않은 나를 걱정하며 잠 한숨 못 자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아내의 얼굴은 한숨도 못 잔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낮잠을 잔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건 나한테 바가지를 긁기 위한 하나의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눈칫밥 먹고 있는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원하던 양선아를 오늘밤 얻었으면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아내의 앙칼진 얼굴에 떠밀려 그녀가 잠에서 깨지 않게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그녀의 알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는 모습까지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자꾸만 못 살게 어른거리는 아내의 앙칼진 모습에 떠밀린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팬티를 들어올려 팬티가 뒤집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한 다음 구멍 속으로 번갈아 가며 한 발씩 집어넣었다.
나는 양선아에게「미안하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아직 마르지 않아 축축한 옷을 입고서 어둠이 깔려 있는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다. 자고 있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에 무거워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원하던 그녀를 얻었으면서도 아직까지는 남편과 아버지의 노릇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위선의 가면을 쓴 나쁜 놈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바가지를 긁히지 않기 위해 아내에게 할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느라고 어느새 양선아를 잊고 열병을 앓는 환자처럼 끙끙거리다가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 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확실히 나쁜 놈이었다.
이재우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양선아는 눈을 떴다. 그녀는 그가 옷을 찾아 입느라고 부스럭대었을 때 잠에서 깨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그냥 눈을 감고 자는 척하며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가 메모지에다 메모를 남기는 것을 실눈으로 뜨고 바라보았다.
이재우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양선아는 침대에서 일어나「미안하다」라고 메모를 남긴 메모지를 들고 알몸인 채로 창가로 다가갔다. 밖은 어둠이 덮여져 있었지만 큰길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에서 그가 매우 쓸쓸해 한다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자신이 그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