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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s
그는 정말 내 손을 놓아버렸다. 벼랑끝에서 그 손만 잡고 있다가 그 손을 놓는 순간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쳤다. 내가 뭐라고 하건 그는 나를 잡아 줄 것이라 믿고 그렇게 함부로 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놓아버렸다. 내가 돌아서 오는데도 더 이상 잡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고, 그 역시 알고 있다. 이렇게 헤어지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지방으로 전근을 가버렸다. 더 이상 수레국화도 배달되지 않았고, 일상은 무료할만큼이나 조용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알고 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수근대는 사람들, 그럴줄 알았다는 시선들..하지만 다 견뎌내야 할 내 몫이다.
아버지께서 정기 검진 때문에 올라오셨다. 월차를 내고 병원에 따라갔다. 여전히 휘진은 아버지의 검진 날짜에 맞춰 아버지 주치의 교수님께로 예약을 다 해 두었다.
검진이 끝나고 약을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아버지는 봉투를 내미셨다.
“아파트 등기야. 확인해봐라.”
그가 살던 아파트를 내 이름으로 해놓았다.
“어제 민서방 왔다갔다. 그간의 얘기 다 들었다. 자기는 이제 그 집 필요없다고 너에게 준다는구나.”
“아버지, 이런거 받지 말아야죠.”
“넌 끝냈을지 몰라도 난 아직 민서방 내 사위로 생각한다. 니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민서방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같은데 뭐하러 받고 말고 실랑이 할 필요가 있느냐 말이야.”
“곧 이혼할거에요. 어쩌면 지금 이혼이 진행중일 수도 있어요.”
“여자는 남자가 사랑을 줄때 못이기는척 받아들이는 여우같은 면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너처럼 생각나는 대로, 니 방식대로만 하려고 하면 민서방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못 견뎌나게 되어있어. 민서방이 너 힘들게 한거 니가 마음먹고 잊어버리자고 생각하면 그깟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보기엔 민서방도 할만큼 했어. 왜 이렇게 미련하게 일을 크게 만들어? 답답한 것...”
“이제 끝난 일이예요. 더 이상 뭐라 하지 마세요.”
“민서방 사표내고 절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아무말 말고 대구 가서 민서방한테 용서를 빌어. 여자가 오죽 못 미더우면 남자가 절에 들어간다고 하겠냐”
아버지는 으름장을 놓고는 점심도 안 드시고 약을 받아서는 바로 터미널로 가셨다.
그의 아파트는 이를테면 위자료인 셈인가.. 그는 결국 이혼서류를 접수했나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절로 들어가려는 모양이다.
나란 사람으로 인해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던 한 남자가 세상에서 숨어버리려고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그렇게 상처를 줘도 될만큼 잘한게 있을까. 그는 자신의 목표를 접고 5년이라는 시간을 나를 보기 위해 원하지도 않던 길을 와주었는데, 나란 인간은 말로만 자존심을 내세웠지 결국은 그가 해주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다 받았다.
아버지가 탄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그가 있다는 대구로 가는 표를 끊었다. 동대구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탔다. 퇴근시간이 다 되었는데 그가 퇴근해버리면 어떻게 하지. 할말이 많은데 그를 못 만나면 어떻게 하지.
택시 기사를 재촉했지만 퇴근시간이라 차가 밀리는 것을 기사인들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가씨, 그렇게 급하면 고마 여기 내려서 걸어가이소. 쭉 올라가면 왼쪽에 큰 다리 나오고 그 앞이 바로 교육청이니까 찾기는 쉬울거구만. 경북경찰청 옆에 있으니까 사람들한테 함 물어보이소.”
택시에서 내려 경사진 길을 뛰어서 올라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6시가 넘었다. 교육청에서는 이미 퇴근하는 차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그의 차가 나올까봐 차마다 살피며 올라가는데 저 멀리 주차장에 그가 보였다. 큰 키와 마른 몸, 약간 긴 듯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휘진씨이~~~헉헉”
나도 모르게 그를 보자 반가워서 소리쳤다. 그는 내가 그의 앞으로 뛰어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가 반갑게 맞으며 감격스런 포옹을 할거라 기대했던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말없이 내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서 있기만 했다.
“과장님, 누구세요?”
“제 아내입니다.”
그는 나를 아내라고 밝혔다. 그 단어....아내..라는 그 단어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나오니 그렇게 기분좋은 말이었나 내심 놀랐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과장님께서 워낙 과묵하셔서 결혼하신 줄도 몰랐는데 이렇게 미인이신 사모님을 서울에 떼놓고 오셔서 불안해서 그러셨나? 하하하”
그 직원은 재미있지도 않은 말을 하며 혼자 웃고는 그가 여전히 냉랭하게 서 있자 무안한 듯 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오늘 출근 안했소?”
“아버지 병원오신다고 연가냈어요.”
“여기까진 무슨 일이오? 아직 정리가 안된게 있었나?”
“네!”
내가 너무 크게 대답했는지 그는 피식 웃었다.
“초등학생 정선혜 같구만. 아파트 등기를 받았나보군. 그래서 여기까지 왔소?”
“아뇨.”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할말이 있어서요.... 절로 들어가지 말아요.”
“그 말 하러 서울서 여기까지 온 것이오? 그럼 헛수고했네. 난 이미 사직원도 냈고, 이제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당신을 도와줄 수 없는데 뭐가 아쉬워서?”
“어쨌거나 절로 들어가지 말아요.”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정선혜, 이유도 없이 그러는 건 억지인데.. 당신은 나와 연결되는 걸 싫어했잖아. 내가 조용히 절에 들어가서 공부하는게 당신에게도 좋지 않나? 우리집에서도 왜 결혼안하냐고 닦달할게 뻔한데 핑계댈 거리가 있고.”
“공부요? 무슨 공부?”
그는 그것도 모르고 왔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만나기 전에 사법시험 공부했었으니까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내 갈길 가야하지 않겠소? ”
“그럼 시험 공부하러 절에 간다는 말이었어요?”
“그럼 내가 머리깎고 스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이봐요. 정선혜씨. 난 속세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야.”
순간 머리에 집채만한 돌이 떨어지는 기분.. 뭐냐.. 자존심 다 접어가며 서울서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공부하러 절에 가는 거였어?
“ 금요일이라 차가 많이 막히니 저녁 먹고 천천히 서울 올라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