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불행
나는 퇴근을 하면서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양선아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오늘따라 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양선아를 만날 때면 언제나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비합리적인 사랑에 의해 연기처럼 스며드는 걱정 뒤로 옹달샘처럼 솟는 청량한 즐거움이 나를 행복 속으로 끌어들였다.
양선아와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만나면 나는 그녀에 대한 생각이 덜할 줄 알았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완벽한 내 연인이니까. 그녀의 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었으며, 내 곁에서 멀리 도망갈까 봐 입술이 마를 정도로 초조한 심정을 간신히 다스릴 까닭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보다 더 자주 그녀를 생각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출판서로 출근을 하는 동안에도, 일을 하면서도,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나는 짝사랑에 푹 빠진 소년처럼 그녀를 생각했다.
내가 일이 끝나는 대로 곧장 가겠노라고 미리 전화를 해 둔 터라 양선아는 요리책까지 뒤적거려 정성껏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고파야 할 시간인데도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은 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저녁 식사가 아니었다.
내가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가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양선아는 무릎 위로 약간 올라간 짧은 치마를 입고 예쁜 웃음을 지으며 두 팔로 내 목을 감고 매달리듯 안겼다. 나는 그 순간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우리의 입맞춤은 꽃향기에 취한 나비처럼 길게 이어졌다.
나는 며칠 굶은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보고 손을 씻지 않은 채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고 덤비는 것처럼 양선아의 웃옷을 마구 풀어헤쳤다. 그녀의 하얀 어깨에 이어 봉긋이 솟은 젖가슴이 드러나자 나는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들고 앉은 상태에서 서 있는 그녀의 젖가슴을 입술로 빨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탄식하듯 엷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양선아를 번쩍 들어 안고서 침대로 데려가 그녀의 옷을 전부 벗기고 나도 알몸이 되어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잔뜩 성이 나 있는 성기를 그녀의 몸속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간 성기가 더 굵어지면서 더 강렬하게 꿈틀거리자 그녀는 한숨이 섞인 비명을 토해 냈고, 그 비명은 차츰차츰 울부짖음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격렬한 쾌감과 커다란 환희를 느끼며 마음껏 그녀를 사랑했다.
한바탕 행복한 격정을 치른 나는 샤워를 하고 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양선아가 정성껏 마련한 맛있는 음식으로 뒤늦게 허기진 뱃속을 채웠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는 식탁에 마주앉아 맛있게 식사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숟가락을 한 번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왜? 입맛이 없어?」
걱정 섞인 어조로 내가 물었다.
「속이 거북해서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한끼 굶었다고 죽기까지 하겠어요.」
양선아는 나에게 장난기가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루사민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녀는 날마다 식사 후 한두 시간이 지나면 아파 오는 위 때문에 십이지장염 치료약인 아루사민을 먹고 있었다. 점심 때 먹은 라면이 아직도 소화되지 않아 그녀는 저녁 대신 약을 복용한 것이다.
「약으로만 해결하지 말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봐.」
「뭐 이런 거 가지고 병원에 가요. 이제 약 먹었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가끔 소화불량으로 소화제를 복용하는 양선아를 오래 전부터 보아 온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 만사 제쳐놓고 병원에 꼭 가 봐. 알았지? 만약에 안 가면 내가 강제라도 끌고 갈 테니까.」
나는 말을 안 듣는 학생을 혼내는 훈육 선생님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약국에서 그러는데 신경성이래요.」
「약국에서?」
「예.」
「약사가 진찰도 하지 않고 어떻게 알아?」
「알았어요. 내일은 꼭 병원에 가 볼게요.」
그러나 양선아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나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지난 후였다. 아내와 한바탕 심한 싸움을 하고 밖으로 나와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한 나는 곧장 양선아의 아파트를 찾았다. 우울한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아파트에서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양선아가 타 주는 커피는 향기가 좋았고 아이스크림만큼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니, 커피뿐만 아니라 그녀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면 나는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게만 느껴졌다.
나를 맞이하는 양선아의 미소 짓는 모습을 보자 우울했던 내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즐거움이 자리 잡았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두 팔로 내 목을 감안 안고 하반신을 바짝 붙인 채 입을 벌려 내 혀를 빨아들였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운동복 차림인 그녀를 살며시 밀어 소파 위로 넘어뜨렸다. 내 성기는 딱딱하게 굳어진 채 먹이를 노리는 방울뱀처럼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벗고서 양선아의 옷도 벗기기 시작했다.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의 몸은 내 성기를 받아들이면서 저도 모르게 탄성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하체를 격렬하게 흔들다 그녀의 몸속으로 내 정액을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그녀도 절정에 오른 듯 입술을 이빨로 꽉 깨물며 손으로 소파 시트를 움켜잡고 몸을 떨었다.
나는 양선아의 몸 위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대강 몸을 씻은 다음 수건에 더운물을 적셔 가지고 나와 아직도 땀에 젖어 있는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때 그녀가 반드시 누운 채 젖가슴 아래를 만지며 말했다.
「가끔 여기가 아파요. 어느 때는 등이 아프기도 하고.」
「어디가? 지금도 아파?」
나는 양선아가 손으로 가리키는 가슴 부위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만지며 물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을 받아 봐. 어디가 아픈지 확실히 알아야 병을 치료하지. 지난번에도 꼭 갔다 온다고 약속하고서 안 갔잖아.」
「알았어요. 이번에는 꼭 갈게요.」
「약속하는 거지?」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예. 꼭 갈게요.」
내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양선아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그때도 그녀는 병원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좀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병원에 가게 했어야 했는데……
나중에 나는 위염이거나 위궤양이 아니면 십이지장염 정도로만 생각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지 못한 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해야 했다.
유리창을 요란하게 두들겨 대는 빗방울 소리에 놀라 잠이 깬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시계 바늘이 아홉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양선아에 대한 생각과 걱정으로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 간신히 잠이 들었던 나는 그만 늦잠을 자게 된 것이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게임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축구 선수처럼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외출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녀가 내시경 검사를 받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에 약속 시간에 늦어 가뜩이나 불안해하고 있는 그녀를 더욱 더 불안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틀 전의 일이었다. 나는 양선아의 아파트로 가는 길에 시장에서 전복을 샀다. 심심찮게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그녀에게 전복죽을 끓여 주고 싶어서였다. 내가 그녀를 위해 전복죽을 선택한 것은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음식이었고, 또 영양가가 높으면서 맛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선아는 천리만리 달아나 버린 식욕 때문에 억지로 우겨 넣듯이 반 그릇만 비우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것도 다 못 먹어?」
나는 좀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배가 불러서 그래요. 이따 소화되면 마저 먹을 게요.」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양선아는 갑자기 화살이라도 맞은 듯이 한 손은 배를 움켜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왝왝거리며 먹었던 전복죽을 변기 안에 몽땅 토해 버렸다. 전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그녀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 들어가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한참을 왝왝거리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가 양선아에게 입 안 헹굴 물을 건네주며 물었다.
「…….」
양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건네준 물을 받아 입안을 헹구었다.
그날 나는 내시경 검사를 한사코 거부하는 양선아를 겨우 설득하고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건강에 대한 원고 청탁 때문에 알고 지내던 류근호 박사에게 부탁해 진료 시간을 예약해 두었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 것도 아닐 거야.」
「그래도 걱정이 돼요. 그래서 내시경 검사를 받고 싶지 않아요.」
「괜찮다니까. 내시경 검사를 꼭 암에 걸린 사람만 받나? 그렇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불안해하는 양선아를 가슴에 안고 두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도 아내는 아침 일찍부터 외출했는지 집에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을 벌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내는 무척 바쁜 것 같았다.
급히 버스에서 내린 나는 우산을 쓰고 장마철에 쏟아지듯 내리는 장대비 속을 헤치며 양선아와 만나기로 약속한 병원으로 뛰다시피 하며 걸어갔다. 그런데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 뒤를 누군가가 뒤쫓아 오고 있는 듯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주위를 세심히 살펴봤지만 이렇다 할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행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오다가 고인 물을 튀기며 갑자기 멈추는 게 보였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계속해서 그녀와 만나기로 한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길을 가던 나는 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 뒤를 누군가가 뒤쫓아 오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봤던 그 검은 승용차가 또 눈에 띄었다. 이번엔 좀더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미행당하고 있었던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누굴까? 하지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사람을 고용해서 조심스럽게 내 뒤를 밟으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아내의 냉랭한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분노가 치솟으며 양선아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한다면 아마 아내는 두 눈 하얗게 뜨고 까무러칠 것이다.
지금 당장 양선아를 만나러 병원으로 가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잠깐 동안 서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가 빈 택시를 손을 흔들어 세웠다. 그들을 따돌리고 다시 병원으로 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서둘러 택시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기사가 택시를 출발시키면서 백미러로 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 주세요.」
내 마음은 뒤쫓아 오는 검은 승용차에게로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뒷차와의 간극이 좁혀졌지만 내리는 빗방울에 가리여 미행자의 얼굴을 똑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택시가 지하철역 앞에서 멈추자 나는 택시에서 내려 우산을 쓰지 않은 채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날다시피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허겁지겁 승차권 자동발매기 속에다 동전을 집어넣고 표를 꺼낸 다음 개폐기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비무환이라고, 앞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감은 눈 위를 문질렀다.
지하철을 타지 않고 반대편 개찰구로 나와 사람들 틈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폈다. 그 검은 승용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병원을 향했다.
택시의 와이퍼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앞 유리가 말끔히 닦이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허겁지겁 서둘렀지만 약속시간보다 삼십 분 가량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거의 병원에 다다랐을 때 나는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가 튀긴 물벼락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개놈의 자식!」
나는 달아나는 자동차의 꽁무니에다 대고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해댔다. 하지만 젖은 옷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미 약속 시간에서 삼십 분이나 늦게 도착한 터였다. 나는 양선아가 기다리다 그냥 갔을까 봐 걱정하며 젖은 우산을 접어 탁탁 물기를 털어 내고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환자들과 보호자 그리고 면회 온 사람들이 섞여 뒤범벅이 되어 있는 혼잡한 대기실을 두리번거리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양선아를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무료함을 달래는지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핸드백을 만지락거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나는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엷은 미소를 양선아에게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아직도 비가 많이 오나 봐요? 선생님 옷이 다 젖었어요.」
「응. 아직도 많이 와. 선아 옷은 안 젖었어?」
「조금 젖었었는데, 지금은 다 말랐어요.」
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 양선아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 그녀를 힘껏 껴안고 입맞춤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빨간 금연 표지판을 보고 다시 담배를 갑 속에 집어넣었다.
류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응급실을 지나쳐야 했다. 많은 환자들로 부산한 응급실을 지나치면서 정신없이 바빠하는 간호사들을 바라보며 양선아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가끔 병원에 올 때마다 나는 아픈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 세상엔 아픈 사람이 참 많구나, 하면서 나는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그러니까 선아도 아프면 안 돼.」
나는 오른팔로 양선아의 어깨를 감싸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많이 아프면 어떻게 하죠?」
나는 양선아의 말에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녀는 그런 나를 쳐다보면서 나 역시 자신처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순간적으로 우리 사이에는 바위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았죠?」
류 박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머금으며 양선아에게 물었다.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해서, 물도 안 마셨어요.」
양선아가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류 박사의 말에 명랑하게 대꾸했다.
양선아가 침대에 눕자 류 박사는 어린아이의 손가락 굵기 만한 검정 호스를 그녀의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내시경 검사 전에 목젖을 마취시켰기 때문에 구역질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검정 호스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한정 없이 오랫동안 안으로 들어가자 고통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류 박사가 모니터 화상에 나타난 그녀의 위 속을 쳐다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양선아의 내시경 검사를 끝낸 류 박사가 굳어진 얼굴을 하고 진료실로 나를 불렀다. 본능적으로 류 박사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극도의 불안감이 나를 휩싸고 지나갔다.
류 박사가 한동안 불안해하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선생, 아무래도 암인 것 같습니다.」
「암이요?」
류 박사의 믿을 수 없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 버린 느낌이었다.
「대학병원에 가서 정확한 검사를 다시 받아 보는 것이 좋겠어요.」
류 박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나 했던 일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 류 박사의 입에서 확인되는 순간 나는 발을 헛디뎌 절벽에 떨어질 뻔했던 사람처럼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사진이 걸려 있는 벽을 응시하며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이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껄끄러웠다. 나는 오랜 침묵 끝에 머뭇거리다 류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께는 죄송하지만, 혹시 오진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류 박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만 내 말에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류 박사로부터 위궤양과 위염의 지속적인 반복은 치료하지 않을 경우 위암의 발생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양선아는 암을 스스로 키운 꼴이었다.
양선아와 나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진찰실을 나섰다.
나는 양선아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계속 앞만 보고 걸으면서 그녀가 진찰 결과를 물었을 경우 적절한 대답을 생각하느라고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에게「선아가 암에 걸렸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녀에게 거짓말하는 걸 싫어했던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드디어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내가 양선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그녀에 대한 연민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을 보이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이 어때?」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그래요. 그런데 류 박사님이 뭐라고 하세요?」
양선아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아직은 알 수가 없지. 결과가 나오면 바로 연락해 준다고 했어.」
나는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면서, 양선아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관객 앞에서의 연극인처럼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여유 있는 웃음을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과가 좋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양선아가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나는 양선아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순간적으로 죄의식을 느꼈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장대처럼 쏟아졌던 비는 한풀 꺾여 가랑비로 변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펴서 양선아를 우산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았다.
우리는 병원을 나와 가까운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약속했던 것도 아니 거만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석에 이끌리듯 동시에 커피숍을 향해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뭐 마시고 싶어?」
내가 종업원이 갖다 준 메뉴판을 양선아에게 펼쳐 보이며 물었다.
「커피 마시고 싶어요. 선생님은 요?」
양선아는 메뉴판에 눈길도 주지 않고 커피를 주문하려고 했다.
「커피를 마신다고?」
「예.」
「커피는 안 돼!」
나는 양선아가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요?」
나의 갑작스런 높은 언성에 놀란 양선아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왜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내게 물었다. 당황해진 나는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궁리하던 끝에 적당한 질문을 찾아내고 그녀에 되물었다.
「속 괜찮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양선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나는 양선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도 안 돼. 커피 마시지 말고 다른 걸 마셔.」
콜라를 좋아하는 아이를 설득시키는 것만큼이나 양선아를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강제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양선아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종업원에게 설록차 두 잔을 주문했다. 나 역시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그녀의 앞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녀를 고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양선아의 식생활 습관은 아침 식사는 생략한 채 커피를 마시고, 점심 식사는 면 종류로 대충 해결하고, 저녁 식사는 푸짐하게 먹는 편이었다. 또 저녁식사 후에는 서양인들이 디저트로 과일을 찾듯이 그녀는 프림과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를 마시는 걸 즐겨 했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설록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창 밖으로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내 눈은 거리를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결과를 맞지 않았을 텐데……. 참았던 눈물이 눈앞을 뿌옇게 만들었다.
사랑한다는 놈이 그렇게 무심했었는지, 나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한숨을 양선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소리 나지 않게 내쉬었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