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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1. <프롤로그>

스토커 |2007.03.14 15:55
조회 996 |추천 0

 

 

프롤로그


  겨울비가 어둠이 짙게 깔린 아스팔트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초보운전자인 이경아는 빗길에 미끄러져 사고로 이어 질까봐 속도를 60킬로미터 이상은 내지 않고 두 손에 식은땀이 배일 정도로 운전대를 꽉 잡은 채 극도로 조심하면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로에 차량이 뜸해 그녀는 불안감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이경아가 팔당댐을 지나칠 때 핸드폰이 울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그녀는 속도를 40킬로미터 이하로 줄였다. 핸드폰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오른손으로 폴더를 열고 전화를 한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다음 핸드폰을 어깨와 턱으로 귀에 붙인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민지야. 지금 어디쯤이야?”

  전화를 한 사람은 강민지였다.

  “거의 다 가고 있어.”

  “빨리 와.”

  다급함이 섞여 있는 강민지의 목소리는 무슨 위험한 위기에 처해 있어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차에 있는 전광시계는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7시가 되려면 20분이나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민지는 벌써 약속장소에 도착해 빨리 오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빗길에 운전하느라고 신경이 곤두서 있어 짜증이 난 이경아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폴더를 닫고서 면허시험장의 에스자 코스처럼 구불구불한 국도로 접어들 때였다.

  전방에서 갑자기 전조등도 켜지 않은 덤프트럭 한 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중앙선을 침범하고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경아의 차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마치 이라크 바그다드를 향해 돌진하는 미군 탱크 같았다.

  이경아가 ‘저 자식 미친 새끼 아냐!’ 하고 욕설을 내뱉을 겨를 없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으나, 덤프트럭은 빗길에 미끄러져 180도 회전하는 그녀의 차 옆구리를 힘껏 들이박으며 멈췄다.

  “쾅!”

  포탄이 터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경아의 차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지면서 검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강으로 굴러 떨어지려다 간신히 가로수에 걸린 채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덤프트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까지도 지나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듯한 앳된 얼굴인 간호사가 전혀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표정으로 이경아의 입에서 산소마스크를 벗겨냈다. 한동안 병실 안에 어둡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없는 병실 안은 숨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 마치 깊은 동굴 속 같았다.

  이윽고 간호사가 이경아의 얼굴을 하얀 시트로 덮었다. 그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 장성우는 창백해진 얼굴로 보호자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경아가 교통사고 난지 꼭 두 달째 되는 날이었다.

  “죄송합니다.”

  담당 의사가 이경아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죄라도 되는 양 슬픔이 잔뜩 배어 있는 목소리로 장성우에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 동안 박사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보호자용 의자에 앉은 채 띄엄띄엄 말하는 장성우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차마 의사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어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

  무슨 말로 장성우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의 어깨를 두서너 번 가볍게 쳐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하고 병실을 나가는 담당 의사의 눈에도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끝내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의사의 뒤를 따라 간호사도 나가고 병실에 혼자 남은 장성우는 보호자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그는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창가에 다가갔다. 창밖에는 수많은 나뭇가지에 하얀 목련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어느새 봄이 와 있었던 것이다.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장성우는 하얀, 진홍, 자주, 연분홍 등등 색색으로 활짝 핀 장미꽃 백 송이로 만든 꽃바구니를 이경아에게 선물하려고 했었다. 꽃바구니를 받아들고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이번엔 정말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했었다. 그대를 너무 너무 사랑해서 그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그대를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그런데……, 이제 장성우는 이경아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숲 속의 백설공주처럼 자고 있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하얀 목련꽃을 바라보는 장성우의 뺨 위로 뜨겁고 굵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면서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는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이경아의 영정 앞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장성우는 눈물에 젖은 색종이로 종이배를 접고 또 접었다. 정성스럽게 종이배를 접는 그의 가슴속은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한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이경아에게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끝내 말 한마디 못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장성우는 멀고 먼 긴 여행을 떠나는 그녀를 위해 그녀의 나이 숫자만큼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를 접었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래서 내 가슴속이 얼마나 시커멓게 타 버렸는지 그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비록 그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먼발치에 서서 외롭게 그대만 바라보며 가슴을 애태웠지만, 나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그대를 그리워하며 비 내리는 날 그대의 우산이 되고 싶었고, 그대의 침실에 이불이 되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대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지만, 나는 엄마의 젖을 찾는 아가의 마음으로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대의 영정 앞에 앉아 멀고 먼 긴 여행을 떠나는 그대를 위해 스물아홉 장의 색종이로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를 접습니다.

  사랑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비록 그대는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떠나가지만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날마다 내 가슴속에 슬픔이 비가 되어 내린다고 해도…….


  장성우는 한줌의 하얀 재로 변한 이경아를, 사랑하는 그녀를, 색종이로 접은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에 나누어 싣고 석양빛에 붉게 물든 남한강에 띄워 보냈다. 다음에 여기 말고 다른 세상에서 꼭 만나자고, 그땐 내가 그대를 꼭 지켜줄 거라고, 절대 슬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점점 멀어져 가는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가 출렁이는 금빛물결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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