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다홍은 과외도 다 잘려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겨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멀리서 반갑게 뛰어오는 민경을 향해 손을 흔들긴 했지만 그다지 반가움을 나눌 처지가 못 되었다.
“빨강다홍, 넌 지난 주말 내내 못 봤는데도 뭐 표정이 그러냐? 나를 보니 반갑지 않나, 친구?”
“반갑긴 하네만..뭐 글쎄..이 몸이 생활고의 압박으로 그리 심신이 편하지는 않다오, 친구.”
“아직 과외 못 구했어?”
“내가 준용이 선배 일 도와달라고 할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었다. 나의 불찰이니 뭐 할말도 없고.. 어디 돈 벌 데 없나?”
민경 역시 다홍의 처지를 아는 지라 딱히 위로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팔짱만 끼고 다홍을 따라 걸었다.
“오늘 동아리 총회있다던데... 갈거야?”
“가지뭐. 내가 뭐 할일이 있냐, 갈 데가 있냐? 내가 가면 부회장님 힘 좀 나지?”
“그렇지.. 아무래도 나야 너 있으면 힘이 되지. 안그래도 어제부터 새로 멤버 하나 더 들어왔거든. 너도 얼굴을 알아둬야 하니까 이따 인사나 해.”
“1학년이야?”
“아니. 복학생. 93학번인가? 한문학과라고 하는 것 같던데.. 취미로 수지침도 놓고 하는데 지현이 언니 알지? 허리 아프다고 침 놓다가 멀쩡히 걸어들어간 언니가 나올때는 기어서 나왔다더라.. 너도 혹시 어디 아프더라도 절대 그 선배한테 침 맞지마. ”
“헉. 내가 뭐 처녀귀신될 일 있냐? 약먹지 뭐하러..”
수업 마치고 교양 수업을 간 민경을 기다리느라 먼저 동아리방으로 간 다홍은 낯선 남자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동아리 멤버세요? 들어오세요. 저는 어제 입회만 장은수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이다홍입니다.”
어색하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다홍은 넓은 테이블에 책을 꺼내놓고 번역 과제물을 하고 있었다.
“커피 드실래요?”
“네..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전 98학번이거든요. 커피는 제가 지금 돈이 없으니까 다음에 뽑아드릴께요.”
은수는 다홍이 참 특이한 아이라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빈말이라도 자기가 뽑아준다고 했을텐데 다홍은 돈이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럴까.. 그럼 오늘은 내가 커피 뽑을테니까 다음에는 후배가 뽑으시오.”
그렇지만 은수가 일어나서 커피 뽑으러 나가는데 다홍이 가만 앉아서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다홍도 일어나서 함께 자판기로 갔다. 커피를 뽑아들고 오려는데 준용이 불쑥 나타났다.
“어이~, 뭐야? 두 사람 벌써 친해진거야? 다홍이는 백수되었다며? 미안해서 어쩌냐?”
“미안하면 뭐 용돈이라도 주시던가.. 내가 못살아! 그놈의 봉사활동한다고 괜히 선배 꾐에 넘어가서 뽀리너들한테 휩쓸려 다녔더니 과외 다 짤리고,, 담달부터 물만 먹고 살아야됨다.”
“내가 함 알아볼게. 미안해서 어쩌냐.”
“괜찮아요, 선배. 곧 구해지겠지.”
다홍은 당장 생활비가 걱정이었지만 처음보는 은수가 있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이고 싶었다. 다시 차분히 공부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우리 다홍이, 밥은 잘 먹고 다니지?”
다홍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목이 메였다. 그렇지만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 엄마딸이 누굽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엄마랑 아버지만 잘 챙겨드시면 됩니다요.”
“생활비는 있어? 너는 왜 돈 달라는 말을 안해? 좀 보내줄까?”
“아니야, 엄마. 나 돈 많어. 재벌 다홍아니유. 하하 아버지 맛난 거나 사드리세요.”
“돈 없으면 언제든 얘기해. 우리 형편이 이렇다고 너까지 주눅들어 살지는 마. 엄마가 어떻게 해서든 너만은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어. ”
“네. 걱정마시고 엄마도 밥 잘 챙겨 드세요. 엄마, ..”
막상 다홍은 엄마를 불렀지만 더 이상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가 전화를 끊는데도 그냥 네, 네만 하다가 끊어버리고 말았다.
은수는 씩씩하게 전화기에다 말하는 다홍의 목소리와는 달리 책장 위로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책이 젖어드는 걸 보았다. 하지만 못 본 척 읽고 있던 신문만 뒤적였다. 준용 역시 회의 준비하느라 바쁜지 다홍에게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가죠. 곧 회의 시작할텐데. 다홍아, 민경이는?”
“스터디룸으로 바로 올거예요. 교양수업 갔으니까 곧 끝날텐데..”
세 사람이 스터디룸에 들어가자 이미 대부분의 멤버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회장인 준용은 칠판에 회의 순서를 적고 있는 민경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회의를 시작했다.
“자, 오늘 회의 안건은 회비 인상과 매월 넷째주에 하던 봉사활동을 그대로 이어갈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들 회비 인상에 대해 할말이 많은 듯 했지만 다홍은 당장 알바 자리도 없고 생활비도 걱정이라서 노트에 낙서만 하고 있었다.
“이다홍, 의견 있으면 발표해 주세요.”
준용은 다홍이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다홍을 지목했다.
“뭐, 저는 대의에 따르겠습니다.”
늘 자기 생각 똑부러지게 말하던 다홍과는 달리 대충 대답하고 넘어가려는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말 말고 니 생각이 뭐냐고?”
준용 또한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민경이 준용 뒤에서 칠판에 적힌 봉사활동을 준용 몰래 짚어 주었다.
“저는 봉사활동 그 자체에는 찬성입니다만, 지금 우리가 하는 봉사활동은 현실적으로 행하기가 힘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아이들도 사실 한달에 한번 한국어를 배워서는 실력이 늘어나지도 않구요. 방법을 바꾸어본다면 봉사활동의 존폐를 따지지 않아도 다른 대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매주 봉사활동을 하기는 하되, 조를 짜서 지금과 같이 한달에 한번 정도 돌아오는 꼴로 한다면 하는 사람도 부담없을 것이고, 수업 받는 아이들도 훨씬 빨리 배울 것이구요.”
“그러니까 그건 지금까지 다 나왔던 의견이고, 니 의견이 뭐냐고?”
쿵~ 다홍은 커다란 바위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기껏 정신을 차려서 대답을 했더니 다 나온 의견이란다.
“그러니까..뭐 저는 봉사활동을 하는 쪽에 찬성입니다. 제 차례가 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준용은 승리자의 미소를 다홍을 향해 날렸다. 다홍은 가뜩이나 준용 때문에 과외도 다 잘린 마당이라서 준용의 그 미소가 너무나 밉살스러웠다.
회의가 끝나고 다들 뒷풀이하러 식당으로 가는데도 다홍은 여전히 다른 생각에 골몰하며 노트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민경이 노트를 덮자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했다.
“빨강다홍, 또 과외 걱정하고 있었어?”
“그렇지뭐. 가자.”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술잔이 돌기 시작하고 다홍에게도 여기저기서 술잔이 몰려왔다.
“이다홍, 뭐하냐? 술잔놓고 제사지내냐?”
선배들의 재촉에 다홍은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 쓰디 쓴 소주의 쏴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속이 울렁거렸다. 물을 마셔야 한다. 다홍은 얼음이 동동 떠있는 물컵을 들고 단숨에 한 컵을 다 마셨다. 조금 진정되는 것 같다. 준용은 미안하다며 또 술잔을 가득 채운다. 다홍의 얼굴은 이미 붉은 색으로 변해 있고, 잔을 쥔 손 또한 붉은색이다. 은수는 슬며시 다홍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빈 잔만 다홍의 자리에 두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다홍은 당황스러웠지만 술이 약한 자신이 한 잔 더 마시면 기절할지도 몰라서 모른척 가만히 있었다.
“이다홍, 벌써 잔 비운거야? 그럼 한 잔 더 해. 너랑 술마시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맨날 과외간다고 빠지고. ”
세운이 주는 술을 다홍은 가득 받아서 들고 있었다. 행여나 또 은수가 마셔줄까 기대했지만 취기에 한번 해본 것인지 은수는 다홍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잔을 들고 마시려는데 테이블 밑에서 은수가 가만히 손으로 다홍의 허벅지를 눌렀다. 분명 은수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다홍은 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얼굴에서 열이 더 오르는 것 같다.
“어이, 이다홍, 술은 마시라고 있는 것인디, 너는 안마시고 개길 참이냐?”
“아이고참, 선배도. 제가 벌써 3학년입니다요. 1,2학년 새파란 후배들이 보는데 선배 체면이 있지. 이따 후배들 가거든 2차 가서 다시 마십시다.”
다홍은 일부로 오버까지 해가며 넉살좋게 응수했지만 세운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듯했다.
“3학년 되었다고 빠져가지고는. 이다홍 3초안에 일잔한다. 실시.”
세운 선배의 성격을 알기에 다홍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어쩔 수 없다. 먹고 기절하기 밖에 더하겠냐. 하지만 잔을 움켜진 다홍의 손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은수는 알 수 있었다.
“세운아, 옆에 있는 나는 안보이냐? 나도 너의 선배라면 선배인데 어째 여기로는 건배하자는 말도 안하고 너희들끼리 마셔뿌냐?”
그제야 세운은 다홍에게서 눈길을 떼고 은수와 건배를 했다. 그렇게 일부러 세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은수는 거의 소주 한 병을 세운과 건배해야 했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하나둘 빠지기 시작해서 몇 명 남지 않았다. 민경은 아버지가 엄격하기 때문에 12시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해서 먼저 간다고 일어났다. 다홍도 같이 가려는데 은수가 준용과 건배를 하며 건성으로 말했다.
“다홍이는 우리집이랑 방향이 같지? 조금 있다가 나랑 같이 가자. 나도 곧 가야하는데.”
다홍은 은수네 집을 알지도 못했다. 같은 방향이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하며 은수의 말에 수긍하는 듯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민경을 바래다 준다며 준용이 나갔다가 곧 들어왔다. 여자는 다홍과 1학년짜리 보라만 남았다. 보라는 새내기라 선배들이 주는 술을 잘도 받아 마시며 한껏 애교를 떨었다. 다홍은 그런 보라가 귀엽기도 하고, 지나치게 귀여운 척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말없이 핸드폰 시계만 보고 있었다.
“언니, 다홍언니.”
다홍은 보라가 자신을 두 번이나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언니, 저랑 한잔 하세요. 전부터 언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원샷이에요~”
참 당돌한 후배다. 다홍은 잔을 비우자마자 보라가 자기 잔에 또 소주를 흘러넘칠 만큼 가득 따르는 것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한잔 줄까?”
소주병을 잡고 보라 잔을 채워주려고 하자, 보라는 놀리듯 특유의 콧소리를 냈다.
“아잉~ 은수 선배님이 한잔 주세요. 은수 선배님 너무 멋있으세요.”
“내가? 왜?”
은수는 7살이나 어린 후배가 귀엽기만 한지 보라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선배님은 키도 크시고, 잘생기셨고, 목소리도 좋으시고, 손도 잘 따주시고..”
“하하 그래? 빈말이어도 듣기는 좋네. 술이니까 조금만 마셔.”
은수는 보라의 잔에 아주 조금 소주를 부었다.
“아잉~ 선배님. 잔은 채워야 맛이죠. 가득 채워주세요."
보라의 콧소리가 귀여운지 은수는 껄껄 웃더니 잔을 가득 채웠다. 다홍은 그런 보라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술을 마시려고 잔을 드는데 은수가 또 다시 가만히 다홍의 허벅지를 눌렀다. 다홍은 당황스러웠다. 자기에게는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어느새 보고 있었는지 또 저지시키고, 아무일 없는 듯 보라와 웃고 떠드는 은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는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 곧 12시네. 그럼 우리 10분만 더 있다가 가자.”
그렇게 10분은 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지하철도 버스도 끊어져서 택시를 타야하는데 돈도 없고 은수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테이블에는 소주병이 한쪽에 잔득 쌓여있다. 보라는 눈이 풀린 것 같은데도 여전히 콧소리를 내며 선배들을 향해 건배를 날려대고 있었다.
“그만 가죠. 보라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다홍이 일어나자 그제야 다들 가방을 챙겨 들었다. 보라는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은수와 준용의 팔짱을 하나씩 끼고는 노래방가자고 난리였다.
“보라는 저랑 방향이 같으니까 제가 가면서 데려다주고 갈께요. 다홍이는 은수형이랑 같은 방향이라니까 같이 가면 되고. 세운이형은 우리랑 같이 가요. 가다가 내리면 되잖아요.”
준용의 교통정리에 세운도 그들과 함께 먼저 택시에 올랐다. 보라는 끝까지 은수의 팔을 놓지 않으려고 해서 준용이 가까스로 달래서 택시 문을 닫았다.
“술 좀 깨게 조금만 걸을까?”
은수는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주신이었다는 예전 별명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봐선 술 취한 것 같지 않은데요.”
“그래? 너를 데려다 줘야 하는데 취하면 안되지.”
은수는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 앞에서 멈추더니 갑자기 어묵을 뒤져 잘 익은 것으로 골라 다홍에게 내밀었다.
“술 깨는 데는 이게 최고야. 먹어봐.”
다홍도 시간이 늦어서 출출했던 터라 맛있게 한 개를 다 먹었다. 그러자 은수는 종이컵에 따라두었던 어묵 국물을 후후 불어서 다홍에게 주었다.
“그렇게 뜨겁지 않다. 마셔봐. 맛있지?”
다홍이 국물을 마시는 걸 구경이라도 하듯 은수는 마주보고 있었다. 다홍이 두어 모금 마시고 내미는 컵을 받아들고 은수는 후후 불어가며 다 마셨다.
“집이 어디지?”
은수는 택시에 오르자 다홍에게 물었다. 자기 입으로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해놓구선 집이 어디냐고 묻다니.
“화곡동. 선배, 사실 우리집 어딘지 몰랐었죠?”
“지금이라도 알면 됐지뭐. 아저씨, 화곡동으로 가주세요.”
그러고는 택시 뒷자석에 몸을 기대는 은수를 보고 다홍은 어이가 없었다.
“선배집은 어디예요?”
“난 너 내릴때 같이 내려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돼.”
은수는 기어이 혼자 갈 수 있다며 앞서 걸어가는 다홍의 손목을 잡았다.
“아무리 혼자 갈 수 있어도 내가 그렇게 보내는게 도리가 아니라서 그래. 여자 혼자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아무 말 말고 그냥 가.”
은수는 그렇게 다홍이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데도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홍이 손목에 힘을 줘서 빼내는 것을 느끼고서야 그 손목을 놓아주었다.
다홍이 집에 들어가서 창으로 불빛이 비치자 은수는 서둘러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