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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15. <이별의 준비>

스토커 |2007.03.24 10:13
조회 423 |추천 0

이별의 준비

  장성우를 태운 택시는 골목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마 도로가 복잡하니까 막히지 않는 골목길로 우회하는 것 같았다.

  불쑥 장성우는 눈을 감고 사무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강민지를 생각해보았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점심을 같이 하자고 졸라대던 그녀를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던 것이다.

  그 동안 장성우는 강민지를 따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그녀가 전화를 해오면 너무 바빠서 전화조차 받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는 등, 될 수 있는 한 그녀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이 그의 입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건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었다.

  이제 서로를 위해 헤어져야할 시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장성우는 느꼈다. 더 이상 미루다가는 강민지와의 관계가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악화될 수도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쯤 빠져나가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강민지와 헤어질 것인가. 장성우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성적이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로서는 그녀를 앞에 두고 ‘우리 그만 만나자’라고, ‘우리 이제 그만 미련 없이 손 흔들고 안녕하자’라고 노골적으로 말을 한다는 게 아무래도 무리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장성우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마침내 그는 강민지와 헤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서 집을 이사하고,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끊기면 자연스럽게 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거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서로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사직서를 제출한다고 해서 당장 내일부터 회사를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다른 직원에게 개인 업무를 인계해줘야 하므로 적어도 열흘 정도의 기간이 필요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성우는 강민지에게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럴 듯한 해명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듯한 이유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듯한 이유가 떠오를 때까지 그는 사직서 제출을 보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무실에 도착한 장성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수화기를 들고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가도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실 그는 그녀가 전화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받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만 적중했을 뿐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장성우는 무료함에 빠져 책상 밑으로 다리를 쭈욱 뻗고서 한쪽 팔꿈치를 책상 위에 걸치고 손으로 턱을 고인 채,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면서 닭병에 걸린 사람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사무실 문가 쪽에서 누군가가 쑤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명되는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가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장성우는 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순간 그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섞여 있는 강민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요즘 강민지가 자신과의 관계를 은근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 같아 극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던 장성우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리가 멀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녀가 중심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장성우는 몸을 일으켜 그녀들의 대화를 중단시켜야 할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강민지의 입에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이 나올까봐 불안해진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 안에 없는 줄 알았던 장성우가 웃음 띤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강민지는 얼굴을 붉혔다. 동시에 그녀들의 대화가 중단되면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마치 누군가에 대해서 한참 흉을 보다가 당사자가 나타나자 입을 다물어 버린 듯한 분위기였다. 바로 자신의 흉을.

  사실 장성우는 강민지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같이 있는 다른 여직원들을 의식해서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그녀들을 바라보면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장성우가 강민지에게 다가가자 그녀의 곁에 있던 여직원들이 그에게 살며시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하고 각자 자기 자리로 흩어져 돌아갔다.

  “언제 들어왔어?”

  “조금 전에. 그런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었어?”

  장성우는 살짝 웃으며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체 물었지만, 그의 웃음 뒤엔 어두운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냥 이런 저런 얘기.”

  강민지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혹시 우리 관계에 대해 얘기한 거는 아니겠지?”

  장성우는 마치 수사관이 심문하는 말투로 물었다.

  “내가 왜 우리의 관계를 떠들고 다녀. 아무 얘기도 안 했어.”

  강민지는 장성우와 마주친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녀가 ‘얘기를 하면 어때?’라고 말을 했다면, 그는 ‘우리의 관계를 끝내고 싶다’는 진심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난 우리 관계가 결혼도 하기 전에 회사 내에서 소문이 나는 걸 원치 않아. 그렇게 되면 우린 신경 쓸 일이 많아지게 되고, 행동거지를 각별히 조심해야 돼.”

  강민지의 표정에서 자신의 짐작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한 장성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낮고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녀가 자신과의 관계를 떠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알았어.”

  장성우의 말에 대해 굳이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만, 강민지는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별안간 할 말이 없어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조용해서 두 사람은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시금 입을 연 것은 장성우였다.

  “우리 퇴근하고 만날까?”

  준비하지도 않은 말을 자신도 모르게 불쑥 해놓고 ‘아차!’ 하고 자신이 한 말을 금방 후회한 장성우는 그런 자신이 못마땅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애써 강민지를 따돌려놓고는 이제 와서 자신이 먼저 만나자고 했으니, 어처구니없고 한심할 따름이었다.

  “…….”

  지난 며칠동안 장성우로부터 철저하게 방치되어 왔던 강민지는 그가 먼저 만나자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져 좋다는 표시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정을 알지 못한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그와의 만남이라 마치 소풍가는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레어서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퇴근하고 동해에서 기다리고 있어.”

  말은 부드럽게 하면서도 장성우는 언짢아진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민지와 헤어지면서 그래도 한 번쯤은 만나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리고 오늘이 정말 그녀와 마지막 만남이야,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 라고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

  “알았어.”

  아버지에게서 햄버거와 피자를 사주겠다는 말을 들은 아이처럼 강민지의 표정은 밝았다. 그녀가 먼저 자리를 뜨자 장성우는 한동안 생각에 빠진 채 서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왕 오늘 저녁 그녀를 만나는 김에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싶었다. 그러려면 회사를 왜 그만 두어야 하는지 그녀에게 적절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장성우는 걸음을 휴게실로 옮겼다. 자판기에서 뺀 커피를 반 컵 정도 마시고 나서 담배를 한 개비 다 피운 다음 나머지 남은 반 컵을 마저 비웠다. 여전히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무슨 수가 있겠지.”

  억지로 생각해내기 위해 고민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강민지의 냄새가 장성우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장품 냄새와 그녀의 체취가 썩인 그녀만의 독특한 냄새였다. 그는 혹시 그녀가 곁에 왔나 하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장성우는 소리나지 않게 웃으며 빈 컵을 쓰레기통 속에 던져 넣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강민지를 퇴근하고 만나 일식집 동해에서 술을 마신 뒤 구의동의 그 여관에 가서 같이 잠자리에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그녀와 섹스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지난번에 다짐 또 다짐을 했으면서도.

  

  퇴근하고 삼성동 일식집 동해에서 강민지를 만난 장성우는 고민이 많은 사람처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소주잔만 기울였다.

  “무슨 일이 있어?”

  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민지는 평상시 같지 않은 장성우의 태도에 의아해 하며 물었다.

  “나, 며칠 안으로 회사를 그만 둘까 해.”

  장성우는 소주를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으며,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 슬그머니 강민지의 표정을 살폈다.

  “왜 회사를 그만 두려고 해?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장성우가 회사를 그만 둔다는 말에 깜짝 놀란 강민지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냐, 일은 무슨……. 친구가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해서 그래.”

  강민지와 만나기까지 핑계를 생각하느라 고민하던 장성우가 갑자기 생각해낸 것이 친구와 같이 인터넷 관련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인터넷 관련사업은 요즈음 젊은 층으로부터 한창 인기가 있는 사업으로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사업을 한다고?”

  “응. 친구하고.”

  “무슨 사업을?”

  장성우가 나쁜 일이 있어서 할 수 없이 회사를 그만 둔다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겠다는 말에 안심이 된 듯 강민지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올랐다.

  “인터넷을 통한 건설자재 구매와 관련된 사업이야.”

  예상했던 질문이었으므로 장성우는 차분한 표정으로 강민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건설자재?”

  건설 계통과 거리가 먼 장성우가 건설자재 구매 사업을 하겠다고 하니, 강민지는 뜻밖이라는 생각에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설회사에 있었던 친구인데, 그 친구에 의하면 건설자재 구매와 관련된 인터넷 사업이 꽤 전망이 있다고 해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거야.”

  전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일이 한 번 풀리고 나니까 엉켰던 실타래가 풀리듯이 술술 잘 풀리고 있어 장성우는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자신이 그 사업을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두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로 그의 연기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럼, 언제 그만 둘 건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니까, 내일 당장 사표를 제출할까 해.”

  “그렇게 빨리?”

  장성우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그나마 자주 보던 얼굴을 볼 기회가 줄어든다는 생각에 아쉬운 감정이 든 강민지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응.”

  장성우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나서 다시 소주를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었다.

  “준비는 다 된 거야?”

  “약간 들 된 게 있는데, 준비하고 있는 중이야.”

  “그게 뭔데?”

  “출자금을 반반씩 투자하기로 했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서. 여기저기 부탁해 났으니까 곧 되겠지.”

  사실 지금까지 장성우가 한 이야기는 건설회사에 다니던 그 친구의 이야기였다. 얼마 전 그 친구가 찾아와서 창업을 하려고 하는데 약간의 자금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그에게 자금을 융통해달라고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꾸며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동안 뭔가를 고민하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민지가 약간 망설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성우 씨, 필요한 돈이 얼마야?”

  강민지가 장성우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귓속말보다 약간 큰 소리로 물었다.

  “왜? 민지 씨가 보태주려고?”

  얼마가 필요한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해두지 않았던 장성우는 언뜻 필요하다는 액수가 떠오르지 않아 건성으로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많지는 않지만 조금은 보탬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냐, 됐어. 내가 충분히 구할 수 있으니까 민지는 신경 쓰지 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 사실이 그렇다고 치더라도 강민지와 돈 거래를 하는 건 장성우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 돈을 남한테 빌려야 한다면서?”

  “민지 씨는 신경 쓰지 말라니까.”

  장성우는 강민지에게 목청껏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알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그녀의 호의를 무시했다.

  “그럼, 빌려주는 걸로 하면 되잖아?”

  “우리 술 그만 마시고 심야영화나 보러 갈까?”

  강민지가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않자 장성우는 귀찮다는 듯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로 물었다.

  “말을 딴 곳으로 돌리지 말아. 나는 꼭 성우 씨 하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그러나 강민지는 막무가내였다. 장성우는 그녀를 쳐다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만약에 성우 씨가 내 성의를 계속 무시한다면 나를 정말 실망시키는 것이고, 난 그게 날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간주하겠어.”

  자존심이 상한 듯 강민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어쩔 수 없이 장성우는 강민지의 돈을 빌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녀를 단념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별로 해가 될 것 같지 않았으므로, 사실 그녀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했다는 뿌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얼추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신 두 사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식집에서 나온 장성우는 이젠 정말로, 진짜 정말로 오늘밤을 마지막으로 강민지와 성관계를 갖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앞으로 만날 날이 없으므로, 오늘밤만큼은 성심을 다해 그녀의 몸을 애무해 줄 생각이었다.

  그 동안 장성우는 강민지의 알몸을 끌어안고 섹스를 할 때마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라고, 앞으로 그녀를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을 하면서도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마시면서 ‘정말 이 잔이 마지막 잔이야’하는 것처럼 그는 그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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