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라 늦잠을 잤다. 은수도 쉬는 토요일인지 늦잠을 자서 다홍이 주방에 내려가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은수도 내려왔다.
“이모, 전 국만 한 그릇 주세요. 밥은 생각없어요.”
“안그래도 어제 술마신 것 같아서 해장국 끓여놨어. 밥 말아서 한 그릇 먹어봐.”
이모는 은수에게 밥을 놓아주고는 다홍이 그릇에 국을 더 덜어 주었다.
“선배님, 밤새 편안히 주무셨사옵니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늘은 또 공손하시나?”
“오늘 아침 먹고 뭐해요?”
“특별한 계획은 없는데. 어디 갈 데 있어?”
“딩동댕~. 내복사러 갈건데 마트까지 좀 태워다 줘요. 여기는 가까운 마트가 없어서 그거 하나 불편해요.”
“내복? 무슨 내복?”
“겨울에 입는 내복 몰라요?”
“할머니 선물하려고?”
은수가 너무 진지하게 물어서 다홍은 대답하기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저녁으로 학원이 너무 추워서 내복 입으려구요.”
은수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밥을 먹지도 못하게 배를 잡고 웃어댔다.
“저는 지금 생존경쟁의 살벌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보호장비를 하겠다는데 웃음이 나와요?”
“미안미안. 그럼 아침 먹고 같이 가자. 이모도 장 볼 거 있으면 같이 가세요.”
“둘이 갔다가 와. 난 세제 몇 가지만 사면 되니까 이따 적어줄게.”
밥을 먹고 은수의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토요일 점심때라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다홍은 카트를 은수에게 맡겨버리고는 혼자서 앞서 다니며 이모가 적어준 것들을 카트에 담았다.
“어머, 장선생님 아니세요? 여긴 웬일이세요?”
마트와는 어울리지 않게 썬글라스와 정장차림을 한 여자가 은수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다홍은 골라온 내복을 카트에 담으려다가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누구...? 장선생님 애인이세요?”
“이다홍, 인사해. 우리 병원 원무과에 계시는 김혜경씨, 김선생님, 여기는 저희집에 같이 사는 이다홍이구요.”
“어머나, 한 집에 사세요? 호호 난 소문이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진짜였네요.”
“소문도 났습니까?”
“그럼요. 장선생님 집에 우렁각시 모셔두고 있다구요. 그래서 요즘 밝아진 거 아니냐고 다들 그러던데요. 호호 다홍씨라고 했나요? 여튼 만나서 반가워요.”
여자는 호들갑스러운 말투로 재빨리 말하며 다홍을 훑어보았다.
“그럼 장보세요. 저도 얼른 사서 나가야 해서.. 친구 결혼식 가다가 피로연할 때 쓸거 사려고 왔거든요. 다홍씨도 다음에 또 만나요.”
여자는 혼자서 말 다하고는 말투처럼 걸음도 호들갑스럽게 가버렸다.
“괜찮아요?”
“뭐가? 병원에 소문난거?”
“그렇죠. 총각이 그런 소문나서 좋을 게 뭐 있어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사실 우렁각시는 좀 아니다. 그건 아니지 않냐? 난 아직 이다홍 손으로 끓여주는 라면도 못 먹어 봤는데 말야.”
“우렁각시 있잖아요. 50대이긴 하지만.”
“이모?”
다홍은 대답 대신 입을 삐죽하고는 카트를 잡아 끌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을 하고 주차장에 이르러 은수가 트렁크에 짐을 싣고 카트를 가져다 놓으려는데 또 한 여자가 은수를 불렀다.
“은수씨, 오늘 여기 오느라 핸드폰 안된거야? 어젯밤에 통화하다가 끊어져서 걱정했잖아.”
“너무 졸려서 잠들어 버렸어. 전화 온 줄도 몰랐네. 여긴 웬일이야?”
“집에 전화했더니 아주머니가 여기 갔다고 하길래 심심해서 나도 와봤지. 그래도 길이 어긋나지 않아서 다행이네. 이렇게 만났는데 점심 먹고 들어가.”
그제서야 그녀는 다홍이 보였는지 다홍에게로 돌아섰다.
“은수씨 집에 사는 그 후배 맞죠? 전 은수씨 애인 강민영이예요.”
“다홍아 인사해. 내 대학 동기 강민영.”
강민영, 강민영..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순간 다홍은 기억이 떠올라 그녀를 다시 봤다. 지리산에서 은수의 애인이라던 그녀가 강민영이었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낯익은 얼굴이라 생각했더니 그녀였다. 그때처럼 그녀는 은수와 지나치게 친한 척 하며 자기 입으로 또 애인라고 했다. 민경의 메일에서는 분명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단순히 다홍의 오해라고 했었는데 그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다홍을 향한 눈길은 먹이를 가로채인 화난 표범의 눈 같았다.
“이다홍이예요.”
“다홍씨 우리 초면 아니죠? 난 다른 건 몰라도 한번 만난 사람도 얼굴 다 기억하거든요.”
독한 여자.
“우리 지리산에서 마주쳤었죠? 은수씨 전화에 불 나도록 전화해댄 사람이 다홍씨 맞죠?”
그녀의 말투가 몇바퀴나 꼬여 있어서 다홍도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랬던가요? 오래된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뭐 전 그쪽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선배, 점심 드시고 올거면 저 먼저 가구요.”
다홍은 은수에게 말했지만 시선을 그녀를 향해 있었다. 은수가 다홍을 배신하고 그녀와 함께 갈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자신만만함이 배어 나왔다.
“오늘은 나도 집에 가야돼. 내일까지 형준 선배 논문 좀 봐주기로 했잖아.”
“그 선배는 아직도 자기 일을 혼자서 다 못해서 후배들 불러대고 난리야. 그럼 나도 자기네 집에 같이 갈까?”
다홍은 은수가 말려주길 바랬지만 은수는 친절하게 민영을 초대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집에 가서 점심이나 먹고 가. 우리 먼저 출발할게 천천히 따라와.”
이번에는 민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마. 내가 자기네 집도 모를까봐. 한두번 간 것도 아닌데. 그럼 먼저 출발해.”
다홍은 둘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차에 먼저 올랐다.
은수는 다홍의 뾰로퉁한 모습이 귀여운 듯 장난을 치려고 했다.
“민영이 만나서 또 예전 일 생각나는 거야? 오늘도 소설 한 번 지대로 써 보실려고?”
“그런거 아니예요.”
“그럼? 이다홍, 표정 관리 좀해. 얼굴에 다 나와.”
“그런거 아니라니깐요.”
“아니긴.. 마음을 넓게 가져. 민영이는 좀 극성스럽긴 해도 좋은 친구야. 남자들이 많은 과에 와서 공주 대접만 받고 살아서 여자들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는 것 뿐이지 너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누가 뭐래요?”
다홍은 얼굴을 창가로 돌리며 은수와의 대화를 끝내고 싶어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영은 마치 자기네 집이라도 되는 듯 이모에게 달려가서는 보고싶었다느니, 음식맛을 잊을 수가 없다느니 하면서 이모에게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작 식탁을 차릴 때가 되자 거실로 쏙 나와서는 넓은 거실 유리를 통해 정원을 내다보며 과도하게 감탄하는 척했다.
“원래 저렇게 시끄러우니까 다홍이 학생은 너무 신경쓰지 마. 민영이 올 때마다 우리 사모님은 머리가 딱따구리로 쪼는 것처럼 아프다고 하셨거든.”
“은수선배 어머니두요?”
“그렇다니깐. 민영이는 자기 말로 은수 애인이니 뭐니 하고 다니는데 남들이 뭐 인정을 해줘야 하는거 아니겠어? 일단 은수는 좀 마음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표현은 안하더라구.”
은수는 마음이 있다구? 다홍은 시끄럽게 떠드는 민영이 오든 말든 점심을 먹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공부하려고 책을 펼치는데 어느새 은수와 민영도 식사를 끝내고 올라왔는지 2층 거실에 앉아서 다 들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이렇게 다홍씨랑 같이 2층 쓰면 불편하겠다. 그지? 넌 혼자 있을때 여기 벌거벗고 나다니기도 하잖아.”
다홍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이톤의 민영 목소리에만 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저 여자는 우찌 알까나..
“지금도 그래.”
“다홍씨가 있는데도?”
“우리 다홍이는 공부에 전념하느라 내가 발가벗고 다니든 입고 다니든 별로 신경 안쓰거든. 공부하는데 방해된다. 그만 내려가자.”
다홍이 다시 책으로 집중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홍씨, 과일 먹으러 내려오래요.”
민영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간드러진 하이톤의 목소리로 다홍을 불렀다. 다홍이 문을 열고 나오자 민영은 문 밖에 기대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 어서 빨리 이 집에서 나가. 어린 것이 어디서 수를 쓰고 있어? 가난한 게 뭐 자랑이야?”
낮게 중얼거려서 다홍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민영을 돌아보자 민영은 비스듬히 서서 다홍을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뭘 봐?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가난하다는 구실로 여기 들어앉을 생각인가본데 그럼 내가 가만 안둬.”
“그럼 어쩔건데요?”
다홍도 민영의 존재에 위협을 느껴 도망가는 스물둘의 철부지가 아니다.
“웃겨, 아주. 그럼 니가 잘하는 짓이야? 은수씨 병원에도 너 여기 있는 거 소문 다 났어. 알아? 너 여튼 꼬리치면 내 손에 죽어.”
“아니까 협박하지 말아요. 당신은 부자집에서 자라서 돈이 많을지 몰라도 난 가난해서 깡이 많거든요. 내가 좋은 맘 먹고 가만 있을 때 건드리지 마요. 어디서 되지도 않게 협박질이야? 나 .. 참.”
민영은 어이가 없는 듯 말대꾸를 못했다. 다홍이 그렇게 세게 나올 줄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민영이 얼른 다홍의 뒤를 따라 내려오니 다홍은 아무 일 없었던 듯 과일을 먹고 있었다.
민영은 은수 옆에 붙어 앉아 다홍을 다시 한번 노려봤다.
“은수선배, 선보는거 귀찮거든 웬만하면 둘이 결혼하지 그래요? 성격나쁜거 둘이 비슷하구만. 이모, 잘 먹었습니다.”
은수는 무슨 얘긴 줄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점점 더 붉어지는 민영의 얼굴을 보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다홍에게 입모양으로 물었지만 다홍은 못 본 척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