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강물에 흐르고
흔들어 깨울 수만 있다면, 그래서 깨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벌써 일주일째였다.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경아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숲 속의 백설공주처럼 자고 있었다.
병실 안은 오실로스코프에서 나는 띠이익, 하는 소리와 똑딱거리는 산소호흡기의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담당의사와 간호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자리를 뜨지 않는 장성우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얼굴은 환자처럼 까칠하고 수척해 있었다.
장성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이경아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하나라도 움직여주길 바라면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그 짧은 순간을 놓칠까봐 그는 한시라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어느 때에는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어 이경아의 눈썹이, 손가락이, 약간 움직였다는 착시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또 그녀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을 것 같아 장성우는 소변이 마려운데도 오줌보를 움켜잡고 꾹 참으며 자리를 뜨지 못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 장성우의 입에선 시도 때도 없이 하느님이라는 단어와 함께 긴 한숨이 버릇처럼 새어나왔다.
“똑똑!”
병실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약 10분전에 담당의사와 간호사가 다녀가고 나서, 갑자기 몰려든 피곤을 이기지 못한 장성우가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누구세요?”
노크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난 장성우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누구긴 누구야, 나지. 여기 올 사람이 나밖에 더 있어?”
조용히 병실 문을 열면서 들어오는 박종수의 손에는 평소의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꽃다발이 들려져 있었다. 하얀 안개꽃에 둘러싸인 여러 송이의 붉은 장미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다발이었다.
“그게 웬 꽃이야?”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병 문안 온 사람처럼 들어오는 박종수를 장성우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꽃다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재수생시절 카사노바처럼 행동할 때에도 여자들에게 꽃 같은 것을 한 번도 선물하지 않은 그의 손에 꽃다발이 들려져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라, 인마. 놀라기는…….”
“그런데, 그걸 어떻게 가지고 들어왔냐?”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 꽃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종수는 버젓이 꽃다발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인마, 내가 누구니? 형사 아냐, 형사.”
농담을 하고 나서 박종수가 던지듯이 장성우에게 꽃다발을 건네자, 그때서야 그는 꽃들이 조화라는 것을 알았다. 짙은 꽃향기가 병실 안에 가득 머무를 것 같은, 정말 진짜 같은 가짜였다.
“고마워, 너에게 이런 자상스러운 면이 있다는 걸 내가 미처 몰랐어.”
“가끔 나도 변화를 가져야지.”
그렇게 말을 했지만, 박종수는 쑥스러움을 숨기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장성우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는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우리 잠깐 나가자.”
금방 심각해진 얼굴로 바뀐 박종수가 조화로 만들어진 꽃다발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창가의 빈 꽃병에 꽂는 장성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마치 이경아가 들어서는 안될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사람 같았다.
두 사람은 병원 밖으로 나와 전조등을 켜고 분주하게 오가는 도로의 차량들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날씨가 옷깃을 여밀 정도로 추웠지만 두 사람은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네 부탁대로 알아보긴 알아봤는데, 그 여자에겐 가족이 아무도 없어.”
박종수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하는 여자란 이경아를 말하는 거였다.
“그럼, 그녀가 혼자라고?”
이경아에게 가족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장성우는 놀란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머니는 재작년에 위암으로 죽었고, 십 년 전에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가 있긴 있는데, 지금은 어디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가 있다고?”
“응. 그런데 죽지 않았으면,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 같아. 주민등록증 번호로 신원을 조회해 봤더니 뜨지를 않아.”
박종수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위암 수술을 받기 전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경아가 부산대학교에 찾아가 조교에게 딸이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버지는 더 이상 교수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교수 대기자들이 약점이 드러난 아버지를 가만히 놔둘 리가 있겠는가.
결국 아버지는 병원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찢어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이경아를 한 번도 찾지 않은 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버린 것이다.
“하여튼 수고했다.”
장성우는 담배연기를 긴 한숨과 함께 어둠이 깔린 허공에 내뿜었다.
“앞으로 너, 어떻게 할 작정이야?”
박종수가 걱정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장성우에게 물었다.
“……, 휴-!”
장성우는 대답대신 또 한 번 담배연기를 긴 한숨과 함께 어둠이 깔린 허공에 내뿜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
장성우는 다그치듯 묻는 박종수의 말을 못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가만히 앉아 담배만 연신 뻐끔뻐끔 피워댈 뿐이었다.
“나,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무진장 많이, 경아 씨를 사랑하고 있어.”
박종수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끄면서 입을 연 장성우의 목소리에서 슬픔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장성우를 이해하고 싶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답답한 듯 박종수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난 믿어. 경아 씨, 틀림없이 깨어날 거야. 꼭 그렇게 될 거야.”
위로와 용기를 주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줄줄 알았는데, 장성우는 박종수에게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대할 수 없는 걸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은 없어.”
박종수는 장성우에게 쓸데없는 헛고생하지 말고 일찍 이경아를 단념하라고 일깨워주려고 애썼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 박종수의 판단으로는 그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 경아 씨가 지금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도 난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어. 일 년이 되든 십 년이 되든…….”
박종수에게 자신의 결심이 단호하고 확고하다는 걸 다짐을 주려는 듯 장성우는 정확한 발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에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성우야, 너 그러지 말고 오승구라는 사람한테 연락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도 너보다야……”
“그건 안 돼, 절대로! 앞으로 그 사람의 얘긴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
박종수의 입에서 오승구의 이야기가 나오자 장성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노를 애써 목구멍으로 삼키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왜, 이경아가 하필이면 익숙하지 않은 운전솜씨로 차를 몰고 비 오는 날 양수리에 갔겠는가. 그건 오승구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교통사고 책임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장성우였다. 그녀가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면, 그가 그녀를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면 사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일 놈에게 연락을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화를 내는 장성우의 태도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박종수는 입을 다물었다. 설득시키려고 애써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지금 귀신에 홀린 듯 미쳐 있는 장성우에게 그 어떠한 말도 귀에 들어갈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간이침대에 엎드려 두 팔을 베개삼아 잠들어 있는 장성우의 어깨를 누군가가 건드렸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고 고개를 쳐들었다.
“경아 씨!”
장성우의 앞에 봄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히 머금고 이경아가 서 있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눈이 부셨다.
“아, 하느님!”
장성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이경아가, 그녀가 깨어나다니! 그는 가슴이 벅차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성우는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이경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녀는 그가 다가간 만큼 멀어져 갔다. 닿을 듯 닿을 듯 좀처럼 닿지 않았다. 그는 허공 속에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경아 씨!”
장성우는 안타까움에 이경아를 소리쳐 불렀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하지 않고 계속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무진장 사랑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이경아의 얼굴에 가득했던 봄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사라지면서 대신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슬픈 미소가 머물렀다.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성우는 이경아 앞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이번엔 그녀는 멀어져 가지 않았다. 그는 또 한 발을 옮겼다. 또 한 발을, 그는 점점 그녀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드디어 장성우는 이경아를 가슴에 안고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슬퍼하지 마세요. 이제 내가 경아 씨를 지켜 줄 겁니다.”
장성우의 가슴에 안긴 이경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슬픈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이제 떠나가야 해요.”
“예? 어디로 말입니까?”
“먼 곳으로요. 아주 먼 곳으로 가야만 해요…….”
이경아가 장성우의 가슴에서 빠져나오며 그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사이도 없이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경아 씨!”
장성우는 이경아를 소리쳐 부르며 쫓아갔다. 그러나 병실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발을 헛디딘 그의 몸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장성우는 거의 두 달 동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이경아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이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한 현실처럼 남아 있었다.
이제 떠나가야 한다면서, 아주 먼 곳으로 가야 한다면서 사라진 이경아…….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오면서, 장성우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느낌에 빠졌다.
장성우는 허리를 굽혀 이경아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영원히…….”
그리고 장성우는 이경아의 차가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잠깐 포갰다가 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그녀와의 작별 인사였다.
그제야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간호사가 창백하고 석고처럼 굳어 버린 이경아의 얼굴을 하얀 시트로 덮었다. 결국 그녀는 장성우를 혼자 남겨 두고 혼자서 떠나 버렸다. 그녀가 교통사고 난 지 꼭 두 달째 되는 날이었다. 병실 유리창밖엔 수많은 나뭇가지에 흰 목련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어느덧 봄이 찾아온 것이다.
봄이 오면, 이경아가 깨어나면 장성우는 제일 먼저 그녀에게 꽃바구니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하얀, 진홍, 자주, 연분홍 등등 색색으로 활짝 핀 백 송이의 장미꽃으로 만든 꽃바구니를…….
그리고 지금까지 이경아에게 하지 못했던 고백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야속하게도 장성우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이제 장성우는 이경아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숲 속의 백설공주처럼 자고 있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조차 그는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녀를 그리워 할 수 있었던 시간마저도 그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순간이 되어 버렸다.
목련꽃을 바라보는 장성우의 뺨 위로 뜨겁고 굵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장성우는 이경아의 영정 앞에 앉아 쉴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눈물에 젖은 색종이로 꼬깃꼬깃 종이배를 접고 있었다. 영정은 레코드 가게에서 활짝 웃으며 손님들에게 CD를 포장해 주는 그녀의 모습을 확대한 것으로, 항상 지갑 속에 넣고 다녔던 그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장성우는 한줌의 하얀 재로 변한 이경아를, 사랑하는 그녀를, 색종이로 접어 만든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에 나누어 싣고 석양빛에 붉게 물든 남한강에 띄웠다. 그녀의 나이 숫자와 같은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들이,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서서히 그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잘 가요, 경아 씨!"
장성우는 다음에 여기 말고 다른 세상에서 꼭 만나자고, 그땐 그대를 내가 꼭 지켜줄 거라고, 절대 슬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속에 외치며 점점 멀어져 가는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랑하는 이경아의 모습이 출렁이는 금빛물결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에필로그
갓 달린 30촉 백열등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세 평 남짓한 사이버 범죄수사대 취조실 안에서 강민지는 형사와 허름한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경아 씨의 살해를 사주한 사실이 있죠?”
형사는 벌레 씹은 얼굴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강민지에게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
“왜, 친구를 죽이라고 사주했습니까?”
강민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형사는 철판이라도 뚫을 것 같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며 다그쳤다.
“…….”
강민지는 여전히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는 전보다 커져 있었고, 장성우의 아이를 임신한 배는 표시 날 정도로 불룩해져 있었다.
“해결사라는 사이트를 아시죠?”
“…….”
“알아요? 몰라요?”
필터가 어금니에 납작하게 눌린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끈 형사가 자신의 성질에 못 이겨 주먹 쥔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
형사의 과격한 행동에도 강민지는 그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해결사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청부살인을 전문으로 하던 김광덕 형제가 삼천만 원을 받고 강민지 씨의 사주에 의해 이경아 씨를 살해했다고 다 밝혔다 말입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제야 고개를 떨구고 있던 강민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순간 형사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그것으로 그녀에 대한 취조는 끝난 셈이었다. 더 이상 무엇을 묻고 더 이상 무슨 대답을 원하겠는가.
이경아가 떠난 지 꼭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장성우는 석양빛이 물든 남한강의 금빛 물결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액자 안에 들어있는 흑백사진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박종수의 전화를 받고 난 장성우의 가슴속은 날카로운 비수로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으로 붉은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강민지 씨가 청부살인업자에게 이경아 씨의 살해를 의뢰했다는 게 어제 밝혀졌어.”
그 말 전에도, 그 말 후에도, 박종수는 무슨 말인가를 한 것 같은데 장성우는 다른 어떤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민지가 청부살인업자에게 이경아의 살해를 의뢰했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모든 잘못이,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장성우 자신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거기엔 그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었다.
장성우는 꽤 오랫동안 강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때, 출렁이는 금빛 물결 위로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장성우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경아가, 사랑하는 그녀가 타고 떠났던 색종이로 접어 만든 종이배였다.
스물아홉 개의 종이배들이 커다란 하나의 종이배가 되어, 그 종이배 위에서 이경아가 활짝 웃으며 장성우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장성우는 최면에 이끌린 듯 한 걸음 한 걸음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