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회상
“언제까지 보고도 못 본 척 할 거냐고!!!”
눈이 보이지 않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꽤 뚫어 보는 듯 한 시선에 움츠려 들었다. 더욱이 끌어 당겨져지며 지완의 다리 사이에 안긴 꼴이 되어 버렸기에 바로 앞의 지완과 거리를 두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 했다. 겨우 한쪽 손으로 바닥을 잡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능한 거리를 두기 위해 애쓰지만 그 어정쩡한 자세가 여간 위태한 것이 아닌데 쳐다보는 지완의 눈빛은 무섭기만 하다.
“언제까지 말 안 할 거야?! 언제까지 날 개 무시 할 거냐고!”
지완이 다른 한 손마저 잡아당기며 소리친다.
“어, 어… 앗!”
결국 지완의 가슴팍에 안겨지고 말았다. 겨우 한손으로 지탱하며 안기지 않기 위해 애쓰던 난 또 다시 지완이 품에 안겨졌다. 문가에 기대있는 지완의 다리 사이로 안긴 꼴이 되어 일어서지도 잡힌 두 팔을 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장이 콩당 거리고 두 볼이 벌겋게 물이 든다. 그 모습을 지완이 보지 못한다는 것에 감사 할 뿐이다.
“말하기 전까진 안 돼! 절대 안 놔줘!!”
빠져나오려 버둥대는 나와 움켜쥐고 놓지 않는 지완과 실갱이가 계속됐다. 포개져서 아둥대는 모습이 가히 좋게 보이진 않는데 갑자기 두 손을 움켜쥐고 얼굴 가까이 끌어당기며 묻는다.
“윤중로에서 너였지?”
“…….”
“민승아? 정말 나랑 말조차 하기 싫은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결국 포기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 볼썽사나운 자세에 언제까지 함구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욱이 지완에게 들킨 이상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
“오우~ 대단한 민승아씨께서 드디어 입을 여셨군. 이게 몇 년 만이야. 똥 고집쟁이 민승아 드디어 입을 열다? 하하하”
뭐가 좋은지 웃어 댄다. 웃고 있는 모습도 근사하다. 가까이서 보니 제대로 깎지 못한 수염이 조금은 우스웠다. 보이지 않아 혼자서 더듬거리며 깎은 수염이 듬성듬성 거뭇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건 너야.”
크게 웃어 재끼던 지완이 정색이 되어 바라본다. 그렇다고 나도 꿀릴 것 없다. 사실 지완이와 마주하기 꺼렸던 것뿐이지 내가 잘못했던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날 이렇게 만든 건 어디까지나 지완이다. 날 아프게 만들었고 내게 상처를 줬다.
“도망친 건 너였어? 그 뒤로 계속해서 피했던 것도 민승아 너였어?”
몸을 일으키는데 여전히 손을 놓지 않는다. 두 손을 잡고 뚫어지게 바라고 있다.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눈동자를 움직이며 쉼 없이 나를 살핀다.
“손 좀 놔줘…….”
“놓으면 말없이 달아나게? 그때처럼?”
“그렇게 만든 건 너잖아? 몰라? 아님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거야? 너도 다 알잖아. 다 알면서 내가 그렇게 만든 것처럼 말하지 마. 솔직히 넌 그렇게 가준 내가 고맙잖아!”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제 잘못은 없는 양 쉽게,쉽게 말해버리는 지완이 얄미웠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컸었는데 이제 와서 그 생채기가 왜 생겼냐고 묻는 지완에게 화가나 소리 질렀다.
“하… 민승아 많이 컸다. 다박다박 말도 잘하네?”
그럼 언제까지 내가 너한테 끌려 다닐 줄 알았니. 네가 맨 날 놀리던 그 울보 민승아로 남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그랬었니? 그래서 쉽게 다가와 쉽게 상처 줬니?
하지만 난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따져 묻고 싶었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겨우 한다는 말이 억지스런 변명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잖아. 난 고등학생도 아니고… 또… 예전처럼 널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이 그런데 왜 아플까? 정말 난 지완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 그것을 말하는 내가 아플까? 가슴한쪽이 쏴 해지는 걸까?
지완이 한참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인지 보여 지는 표정에 변화가 없다. 물끄러미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싱겁게 웃기까지 한다.
“예전처럼 날 좋아하지 않는다……? 오 무섭네. 헌데 어쩌냐 이젠 내가 널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냐?”
“장난 하지 마!!”
“장난 같아?”
“넌 날 한 번도 좋아하지 않았어. 너에겐 오직 연우뿐이었어. 그것도 모르고… 정말 바보처럼, 좋아한다니까 나 좋다니까… 그런 줄 알고… 그 말 만 믿고 바보처럼… 정말 바보처럼…손 놔. 얼른 놔줘! 그때만 생각하면 바보 같은 내 모습에 화가나. 너에게 아무 말도 못했던 나에게 화가나. 알아? 그런데 뭐? 날 좋아한다고? 하~ 윤지완 그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어. 알고 있니?”
그때 지완이 몸을 돌리며 날 바닥에 눕혔다. 갑자기 돌려지며 난 졸지에 바닥에 뉘어 졌고 그 위를 지완이 누르고 있다.
“내가 장난으로 이러는 거 같아?”
“!!!!”
마법의 성에서 지완의 손에 이끌려 새알의 둥지를 보고 며칠이 지났다. 그렇다고 그놈과 내가 좀 더 나은 관계가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날 벌레 보 듯했고 여전히 몸에 닿기라도 하면 더러운 양 털어댔다. 하는 짓이라곤 얄밉고 미운 짓만 골라했다. 반 누구와도 얘기하려 하지 않았고 특히 동혁이에겐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해댔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수를 다한 늦가을쯤으로 생각된다. 종례가 끝나고 서둘러 가방을 싸고 있는데 지완이 내 소매 끝을 잡는다. 몸이 닿기만 해도 싫은 티 팍팍 내는 놈이 날 잡았다는 건 놀랄 일이기에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서둘러 손을 뗀다.
“???”
돌아보며 왜 잡았는지를 눈으로 묻지만 지완은 눈길 피하며 딴 짓만 해댔다.
“…….”
그렇다고 먼저 말을 걸어 묻기도 뭐해 보고만 있었다. 몇 분이 그렇게 지나 간 것 같다. 그런데도 여전히 말이 없다. 결국 책가방을 들고 일어서는데 다급하게 말을 한다.
“저기, 저…….”
평소 같지 않은 모습에 나도 꽤나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뭐?”
그때 막 동혁이 왔고 역시 지완이 쪽을 보지도 않고 나에게 묻는다.
“오늘 메뚜기 잡으러 간다고 했지? 얼른 가자.”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날 잡아 끈다. 끌려가면서도 난 지완을 보고 있다. 분명 뭔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동혁의 등장으로 말을 멈춘 것 같아 계속해서 묻지만 지완이 내 눈길을 피한다. 동혁에 의해 교실 밖까지 끓여 나와서도 지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동혁아 잠깐만… 놓고 온 게 있어. 먼저 가. 따라 갈게.”
결국 동혁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교실로 갔다. 하지만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되돌아가 지완에게 들은 얘긴 “됐어. 꺼져.” 였다.
퉁명스럽게 내뱉곤 나를 밀치며 나가 버린다. 또 오지랖 넓은 나의 괜한 짓거리에 한숨만 쉬어야 했고 그날 그 기분에 씩씩 거리며 마법의 성은 가지도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동네 녀석들과 들판을 뛰어 다니면 메뚜기만 수 십 마리를 잡았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 무렵 집으로 왔는데 엄마가 다급하게 물으신다.
“지완이? 지완이는?!”
지완이를 왜 나한테 찾는지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 엄마 옆에서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보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왜들 나에게 지완이에 대한 묻는지 알 수 없는데 언제 나왔는지 아빠와 오빠들까지 모든 분들의 눈동자가 나에게 쏠려 있다.
“나 개랑 안 친해. 왜 그래? 왜 나한테 물어?”
“같이 안 있었어?”
이번엔 아빠가 물으신다.
“어?… 아니… 왜 같이 있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점점 주눅 들며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다.
“오늘 서울에 급한 일이 있어서 지완이 봐주시는 분이 서울 갔데. 아침에 아줌마가 지완이한테 너하고 돌아오라고 그렇게 일렀나본데 너나 지완이 둘 다 지금까지 안 들어와서 아줌마가 걱정 되서 오신 거야. 헌데 네가 모른다면 어떡해?”
“나… 몰라, 모른단 말야…….”
더럭 불안감이 밀려 왔다. 눈길을 아빠에게 던지며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도 좋지 않다.
“지완이 매일 차만 타고 다녀서 시골길을 잘 알지도 못한데. 그래서 너랑 같이 오라고 말했다는데 어떻게 된 거야? 지완이가 너한테 말 안 했어?”
겁먹은 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못 들었다고 절대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크게 고개 끄덕였고 겁먹은 나의 눈엔 이제 눈물이 고였다.
“넌 그럼 뭐 하다가 이제 오는 거야?”
엄마의 타박이 들려 왔다. 난 연신 고개만 가로 저어 댔고 기어이 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뭘 잘했다고 울어, 울긴? 여직 놀다 이 저녁에 들어와서 뭘 잘했다고… 뭐해? 어디 갈만한곳 없어? 지완이 너한테 얘기 했던 곳 없어? 좀 찾아봐. 승주, 승서도 나가서 찾아보고… 이구 이를 어째…….”
그때서 소매 끝을 잡던 지완이 생각났다. 그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함께 가자고… 그게 어렵다고 말을 못하고…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어떻게든 지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 틈에서 눈물 흘려대며 지완이 이름을 불러 댔다. 삽시간에 시골 동네가 시끄러워 졌고 사람들 모두가 지완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난 엄마의 책망을 들어야 했고 엄마 말에 더럭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얼마를 헤매다 문뜩 지난번 언덕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혹시 그 샛길로 오지 않았을까, 동굴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뒤에서 승서 오빠가 부르는데도 무조건 뛰었다. 근처에 있던 승주오빠가 오빠의 커다란 옷을 던진다. 초가을 쌀쌀한 저녁 날씨에 겉옷도 입지 않고 우왕좌왕 하는 내가 안 돼보였는지 서울 사는 이모가 주신 꽤나 좋은 옷을 서슴없이 벗어 준다. 옷을 입을 생각도 못하고 받아 들고 무조건 뛰었다.
벌써 어둑해진 산길을 헉헉거리며 뛰어갔다. 지완을 그렇게 보내 것이 모두 내 책임 같아 산길의 무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굴 근처에 갔을 때 날이 흐려지며 부슬 부슬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의 억새풀에 팔이 뜯기고 부슬비에 겉옷이 젖어 들어가고 있었지만 지완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헉헉 거리며 동굴에 도착했을 때 다행이 지완이 그곳에 있었다. 안도감에 긴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쪼그리고 있던 녀석은 나의 등장에도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망을 가득 담은 눈으로 쏘아 본다. 괜히 머쓱해지며 거친 호흡만 몰아 쉴 뿐 지완이 곁으로 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눈치만 보고 있다. 함께 가지 못 한 것에 미안함으로, 굳이 따지자면 내 잘못도 아닌데 난 죄지은 양 움츠려 있었다. 그새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고 이제 그 비를 뚫고 지나간다는 건 무모한 일이 돼버렸다.
“…….”
“…….”
한참을 아무 말도 못했다. 동네가 발칵 뒤집어 졌다거나, 아님 모두들 널 걱정하고 있다거나 하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연신 곁눈질만 하고 있다.
“말하지… 말하면 같이 왔을 텐데…….”
지완은 보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손 내밀어 빗물에 손장난을 하며 혼자서 속삭였다.
“니가 동혁이 놈이랑 가버렸잖아!! 그래 놓고… 에취!”
녀석 죽어도 지 잘못은 아니란다. 소리치며 씩씩대지만 땀 인지 비를 맞은 건지 지완이도 축축하게 젖어 있다. 난 서둘러 겉옷을 벗어 지완에게 갔다. 하지만 덮어주지 못하고 주춤한다. 왠지 더럽다고 옷을 떨쳐버릴 것 같아 망설여졌다. 결국 지완이 보는 앞에서 몇 번이나 옷을 털어댄다. 그리곤 눈치 보며 조심스럽게 어깨에 걸쳐 줬다. 어설픈 말과 함께…….
“이거 깨끗해… 서울 사는 이모가 큰 오빠 사준 건데 큰 오빠도 대게 대게 아껴 입는 옷이야. 오늘 처음 입었어…….”
쏘아 대며 털어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다. 덮어주는 옷을 마다않고, 그렇다고 고맙단 말도 하지 않은 채 앞만 응시 하고 있다. 미동도 없이 처음 보았던 그대로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 동굴 밖의 빗줄기만 보고 있다.
점차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지 떨림을 멈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난 그 옆에서 벌벌 떨고 있다. 얼마를 기다려야 사람들이 우리를 찾을지, 언제쯤에야 비가 그칠지 걱정이 됐지만 점점 한기가 느껴지며 지완에게 건네 준 겉옷이 그리웠다.
“너 바보냐? 그렇게 떨지 말고 같이 덮으며 되잖아!”
“!!!”
말하는 폼새하곤 영 마음에 안 들지만 따져 물으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잘 안다. 혹여 퉁퉁거리며 한마디라도 한다면 녀석은 분명 교실에서처럼 됐어, 저리가 뭐 이딴 소리를 해댈게 뻔 하기에 얌전히 지완의 옆으로 갔다. 미적거리며 겨우 옆에 앉는데 소리친다.
“누가 그렇게 달라붙으래?”
“??”
떨지 말고 옆으로 오라며? 아니었어? 나 바보 같다며?
눈만 껌벅이며 묻고 있는 네게 소리친다.
“좀 떨어져! 그래도 이 옷 커서 충분히 덮어 지니까 옆에 붙지 마!!”
“헉!!!”
정말 별 놈 다 본다. 어린 나였지만 분명 이상한 놈이다 싶었다. 결국 좀 떨어져 쪼그리고 앉아 겉옷을 덮지만 지완과 내 몸 사이로 가을의 찬바람이 지나갔다. 그런 와중에 내가 잠이 들었다면 아마 웃겠지만 난 정말 오지랖 넓은 것뿐만 아니라 낙천전인 성격이 지나친 것 같다. 그 추위에 꾸벅꾸벅 졸아 댔다. 그러다 어렴풋 흐느끼는 소리에 무겁게 내려앉은 눈을 떴다.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는 한참 뒤에 알아 차렸다.
“…가만 안 둘 거야. 이렇게 내보낸 엄마 용서하지 않을 거야…….”
“???”
무슨 얘긴지, 지완이 맞는지 그저 난 무릎만 감싸 쥐고 숨죽여 있었다.
“… 오기 싫다고 했어. 여기 오지 않으려고 했어. 아빠도 싫었어. 아빠 같은 거 필요 없었어. 엄마와 나 둘이서도 잘 살았어. 부자 같은 거 필요 없었어. 헌데 엄만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이완이 놈만 생각했어. 엄마가 없어졌으니까, 엄마가 필요하니까 이완이 놈한테 가봐야 한다고 했어. 난, 난 관심도 없었어. 내가 어떻게 되든 그런 건 관심도 없었어.”
“…….”
무릎에 기대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무릎을 감싸 쥔 채 지완을 본다.
“화가 나서 말썽을 피웠더니 날 이곳을 보내버렸어. 혼자서 말이야. 내가 어떻게 되는지 상관 없이…….”
집안에 일이 있어서 와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가보다. 지완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게 된 듯 싶다. 하긴 어느 누가 부모와 아니, 엄마와 떨어져 살고 싶을까
“괜찮은 척 마음대로 해라 식으로 고집부리고 이곳에 왔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도 엄마가 그리워… 엄마를 이완이 놈한테 뺏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잘 지내면 데리러 온다고 했어. 그래서 말썽 피우지 않고 있으려 했어… 전학 온 첫날 싸웠다고 네가 아줌마한테 일러바칠 때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 혹시 데리러 오지 않을 까봐…….”
그랬구나. 그래서 말 못하게… 하지만 많이 놀라고 아팠어. 하긴 내가 아픈 것 보다도 넌 더 아프겠다. 혼자니까… 혼자는 아프고 외로우니까…….
“오늘도 화가 났어. 잘 모르는 이 시골길에 화도 났고 이렇게 혼자서 떨어져 있는 것에도 화가 났고… 그리고… 엄마도 보고 싶고…….”
“!!!”
지완이 울고 있었다. 분명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 날카롭게 쏘아보던 눈이 슬픔으로 외로움으로 가득했다. 난 무슨 생각이었을까 살짝 스치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놈인 걸 잘 알면서 다가가 안았다. 왜 그랬을까? 분명 평소에 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아니 남자를 안는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데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아님 남자가 우는 걸 처음 봐서 당황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지완을 감싸 안았다. 빗소리에 지완의 울음소리가 삼켜 졌고 나보다 좀 작은 지완이 내 품에서 훌쩍이는 걸 난 느낄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잠이 들었는지 불빛이 보이고 동네 어른들의 외침을 듣고서야 눈을 떴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땐 지완이 나를 감싸 안고 있었고 난 지완에 기대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오빠의 겉옷이 감싸고 있다. 잠결에 지완에게 기댄 것 같다. 놀라 떨어지며 불빛을 향해 소리 질렀다. 우린 자정이 다 된 새벽녘에서야 집으로 돌아 올수 있었다. 다음날 지완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독감이 심하게 결렸다고 했다.
며칠 뒤 지완이 학교에 왔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 같다. 헌데 동굴 안에서의 일은 새까맣게 잊었는지 아니 처음부터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차갑게 고개 돌려 버린다. 날카롭게 노려보고 심술이 더덕더덕 붙어서 하는 말이라곤 금방이라도 싸움할 듯이 쏘아대며 예전의 지완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첫눈이 내리고 겨울 방학하던 날 운동장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온통 하얀 눈이 학교 전체를 새하얀 도화지로 만들어 버렸다. 교실 안은 방학으로 어수선했다. 그때 한 학생이 창밖을 보며 와 하며 감탄했고 그 한마디에 우린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밖을 내다 봤다.
하얀색 자가용이 운동장 한복판을 바퀴자국을 남기며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모든 학생들이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웬 여자 아이가 내린다. 새하얀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도 그것이 부드러운 털로 만들어진 것을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여자 아이를 향해 뛰어 가고 있다. 난 단번에 그게 누군지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반 아이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지완이가 그 여자 아이를 향해 뛰고 있었고 여자아이가 그런 지완을 보고 두 팔을 벌린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아이 지완이에 대해 너무 모른다. 지완이는 절대 포옹을 할 아이가 아니다. 스킨 쉽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고 제 몸에 누군가가 닿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아인데 저렇게 두 팔 벌려 안아 달라고 해대는 그 여자아이가 지완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 한심해 보였다.
아마도 지완은 소리 나게 그 팔을 쳐 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믿기지도 않게 지완은 여자아이를 와락 껴안았고 거기에 빙글빙글 돌려대기 까지 했다. 창문에 매달려 있던 우린 모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되기에,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와 남자가 껴안는다는 건 있을 수 없기에, 아니 하면 안 되기에 보면서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한 폭에 그림처럼 어울렸다. 뭔지 모르게 화가 났지만 정말 눈 덮인 운동장과 새하얀 코트 차림에 긴 머리를 펄럭이던 여자 아이와 지완이 너무 잘 어울렸다. 더욱이 그 여자 아이는 옷이며 부츠며 폭신폭신한 털로 꼭 눈의 나라 요정 같았다.
넋 잃고 보고 있는 우리들을 뒤로 하고 지완과 여자 아아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자동차 바퀴 자국만 남긴 채 운동장을 빠져 나갔다. 그 뒤 지완은 오지 않았다. 난 매일 마법에 성에 갔고 매일 왕자를 기다렸다. 분명 왕자님을 만나기 위함이라 말하고 있지만 좀 더 솔직 하자면 왕자를 핑계 삼아 지완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를 시골에서 보내고 고등학교는 작은오빠의 극성으로 먼저 올라가 자취를 하고 있던 오빠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
결국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서울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여간 헤맸던 것이 아니다. 어찌나 길치에 방향치 인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를 찾아가는데 몇 번이나 헤맸었는지 모른다. 매번 둘째 오빠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그로 인해 알려준 길 외엔 다른 길로 갈 엄두도 못 냈다. 보이는 건물이 모두가 같아 보여 그 길이 그길 같았다.
어느 정도 학교에 적응했을 무렵 여름을 향해 가는 6월 쯤 교문 밖이 시끄러웠다. 새로 사귄 유일한 친구 인혜와 우린 둘 다 무슨 일인가, 혹 바바리 맨의 출몰인가 싶어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바로 뛰었다. 오늘은 반드시 보리라, 기필코 바바리 맨의 속살을 보리라 마음먹고 인혜와 둘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교문 앞까지 단숨에 뛰어 왔다. 하지만 바바리 맨 비스무리한 사람도 없다.
이내 실망하며 괜한 고생에 억울해 할 때 여학생들이 시선에 한쪽에 머물러 있다. 무슨 일인가 고개 빼꼼히 내밀고 쳐다보는데 웬 정신 나간 놈이 오토바이에 기대 혼자서 개폼을 잡고 있다. 우리가 기대하던 바바리 맨이 아니기에 이내 실망하며 발길을 돌리는데
“어이 울보!!!”
난 섬뜩함을 느꼈다. 왠지 뒷머리가 쭈빗 서지며 뒤돌아보지 말라고 온 몸에 경보음이 울려 댔다. 인혜 손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울보! 야 울보 민승아!”
“승아야 너 부르는 거니?”
멋도 모르고 인혜가 묻는다.
“아니야, 아냐. 얼른 가자.”
서둘러 빠져 나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이 가로 막혀 졌다. 고개를 들어 확인 할 생각 보다는 왜 지완이 나를 찾아왔냐는 의구심이 들었다.
“울보!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천천히 고개 들어 올려 봤다. 역시 지완이다. 키가 얼마나 큰 건지 나보다 작았던 놈이 머리하나는 더 커져서 나를 향해 씨익 웃고 있었다. 그렇게 그 날부터 나의 파란만장한 고등학교 생활도 시작됐다. 그리고 아픈 첫사랑도 시작됐다.
“내가 장난으로 이러는 거 같아?”
눕혀져 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 어정쩡한 자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난 그만둬! 이만하면 요 며칠 너 속 인거 충분히 보상 됐다고 봐. 네가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두 팔을 누르고 나를 향해 입술 끝을 올리며 웃는다. 그리곤 얼굴을 귓가에 대며 조용히 속삭인다.
“잘 들어. 민승아. 지금부터야. 너랑 나 지금부터 시작이야. 넌 처음부터 내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