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제 친구의 이야기를 해 볼께요. 몇 일전에 그 친구가 시카고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때에 미국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었어요. 1969년부터 몇 년간을 있었는데, 그 당시에 학교에서 만난 혼혈아 친구였거든요. 이름은 틱크예요.
동두천 미2사단 부대 앞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이 있었어요. 지금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도 저와 같은 용띠인데, 육이오 때에 그의 어머니가 기지촌으로 흘러 들어가서 생활하다가 그를 낳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계통의 피를 가진 미군병사였는데, 그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얼마나 살기 힘들었겠어요. 미국놈도 아니고 한국놈도 아닌 어정쩡한 핏줄을 가지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치마차락을 붙들고 성장했으니 말이예요.
딕크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고 눈은 약간 푸르다가만 갈색 비슷한 색을 띄고 있었는데, 얼굴은 미국아이들처럼 생겼죠.
딕크의 어머니는 기지촌에서 탈출하려고 무척 애를 많이 썼어요. 기지촌이라기 보다는 한국에서 떠나고 싶었어요.
자식을 조롱하는 한국이 싫었거든요. 딕크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가려고 했던 것이었죠.
막말로 기지촌의 창녀가 미국을 가는 방법이란 딱 한가지였는데, 미군병사와 결혼하는 길뿐이 없었어요.
그 꿈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딕크와 내가 미국에서 만나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이었어요.
딕크의 어머니는 흑인병사와 위장결혼을 했어요. 물론 몸을 팔아서 모은 돈을 몽땅 위장결혼비로 흑인병사에게 지불했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둘만의 보금자리를 차렸어요.
딕크의 어머니는 자식의 아버지가 태어난 곳을 딕크에게 찾아 주었어요.
참으로 눈물겨운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딕크는 무척 우울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아버지의 땅이 딕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바로 문화충격이었어요.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생활방식이 모두 달랐어요.
물론 나의 눈으로 볼 때에는 미국놈처럼 생겼을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것도 모두 미국놈을 닮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였어요.
그는 한국인이었어요. 지저분한 동두천 뒷골목에서 자란 놈이었고, 김치와 마늘냄새가 나는 놈이었던 것이었죠.
2.
문화충격은 글자 그대로 무척 충격적이예요. 더구나 사춘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이에는 혼을 흔드는 벼락과 같은 것이죠.
저도 미국에 가기 전에는 한국이 제일 아름다운 나라인 줄을 알았어요. 학교에서 교육 받은데로 아름다운 강산은 우리나라 뿐이 없으며, 이 세상에서 우리민족이 가장 위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 대한항공은 일본 도쿄까지만 취항하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은 활주로 하나만 쭉 그어져 있었으며 조그마한 관제답 하나가 벌판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었죠.
지금 소도시에 있는 간이공항 정도를 상상하면 딱 맞을 거예요.
저 같은 촌놈이 비행기를 처음 타니 휘황한 비행기 내부에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어요.
물론 지금에 비하면 아주 조그만 비행기였어요. 보잉 707기......지금은 보잉 747기나 767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니깐 옛날에 고속도로를 마구 달리던 포니 자동차 정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겠네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비행기에 오르니 참으로 대단한 기분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나라의 고관들만 비행기를 타던 시절이었으니...... 창가에 앉아서 구름을 내려다 보는 소년의 가슴이 어떻겠어요.....?
그러나 대한제국 소년의 머리를 뒤흔드는 혼돈은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지금은 나리따 공항을 이용하지만 그 당시에는 하네다 공항에 내렸는데, 어둑어둑해 지는 도쿄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보던 저는 깜짝 놀랬어요.
그야말로 별을 뿌려 놓은 듯한 도쿄의 야경은 환상적이었어요. 지금의 서울처럼 사방천지에 불빛 투성이었거든요.
그 당시에 한국은 서울시내만 제외하고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기껏해야 육 칠층짜리 건물이 최고였고 동대문이나 남대문 밖만 나서면 논과 밭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거든요.
에레베타가 설치된 건물도 몇개 되지 않았어요. 서울 명동에 있는 유네스코회관이나 로얄호텔이 있는 건물 정도일 거예요.
활주로 양쪽으로 쭉 켜진 유도등 가운데로 비행기는 착륙했으며, 그 곳에서 일본 비행기로 갈아타고 미국으로 향했어요.
이제부터는 한국말이 필요 없게 되었어요. 기내에서는 영어와 일본어로 안내방송이 나왔어요. 눈이 파란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으니 대한제국 소년의 가슴은 움추러들기 시작했죠.
학교에서 그토록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였고 영어회화 학원까지 다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요.
주변에서 씨부렁 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미 외계인 언어로써 하나도 알아 듣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딱 정지 되더군요.
스튜디어스가 기내식을 주려고 뭐라고 샬라 거리는데, 제가 뭘 알아 듣겠어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오게이~
태평양에 풍덩 던져 버린다고 해도.... 씩 웃으며 오게이~ 했을 거예요.
하나씩 나누어 주는 담요을 덮고 빼꼼히 눈만 내놓았죠. 왼쪽은 눈이 파란 사람이 있으니깐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어요.
마침 창가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어둠만 흐르는 창밖이나마 내다 볼 수 있었어요.
미국 시간으로 아침 여덟시에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태평양의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을 끼고 넓은 공항이 펼쳐져 있었어요. 사방에는 번쩍거리는 비행기들이 줄줄이 널려 있었으며 여기 저기에 활주로가 쭉쭉 그어져 있었으니, 일본의 하네다공항에 넋이 나갔던 대한제국 소년은 아구구~~ 하는 소리를 질렀어요.
일본의 하네다 공항은 새발의 피더군요. 그야말로 경천지동의 국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어요.
미국공항.....일본공항.....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초라한 드라마.....
우리나라는 결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가 아니였어요. 너무도 너무도 못 사는 나라..... 힘이 없는 나라...... 보릿고개의 나라~
3.
영어는 못해도 영문은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어요.
그나마 손때 묻은 영어사전을 뒤척거리며 시작한 미국생활이었어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남진의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노래가 판치던 라디오에서는 아메리칸 탑40....라는 팝송이 요란하게 흘러 나왔어요.
길거리에는 영어간판 뿐이었고, 흑백영화에서 일거에 총천연색영화로 세상은 변했어요.
말로만 듣던 히피족들이 눈에 띄었으며, 거리는 자동차로 넘치고 휘황한 네온싸인은 밤마다 하늘을 덮었어요.
영화에서 보던 금문교가 바로 눈 앞에 있었으며, 나의 입과 귀의 한치 밖에는 고향말은 사라지고 이국인의 언어가 가득했죠.
시험을 봐서 겨우 들어간 학교에는 내 또래의 미국아이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저를 바라 보았어요.
어디서 왔어?
노우스 코리아?.........아니면 사우스코리아?
북한에서 왔는가, 아니면 남한에서 왔는가를 묻는 그들의 질문에 그만 입이 딱 벌어졌죠.
내 또래의 남녀가 쌍쌍이 앉아 공부를 하는 것에도 그만 펄쩍 뛰었어요.
장님들만 다니는지, 남녀학생들이 팔장을 끼고 복도를 돌아다니는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고래의 전통에 젓었던 저의 눈알이 후딱 뒤집혔어요. 으슥한 곳에는 여지없이 남녀가 끌어안고 주둥이를 붙이고는....오우 다링~~ 아이 러브 유~~
햐~~ 정말...... 이것들이 모두 제 정신인가...... 포개어져 있는 저 놈들의 뒷통수를 그냥 한대 팍~~
식당에서 파트타임 잡..... 그러니깐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금문교가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식당에 운 좋게 취직이 되었는데, 그 식당의 책임자는 노골적으로 저에게 말하더군요.
동양인은 사람들이 싫어 하니깐...... 사람 눈에 안 띄는 저 구석에 가서 접시나 딲어~~
그래도 독일 여자인 그 책임자는 저를 무척 귀여워 했어요. 물론 카운터에서 일하던 흑인 여자인 수지도 마찬가지였어요.
언젠가는 너무도 일이 고되서 좀처럼 흘리지 않았던 코피가 터졌어요.
찌꺼기가 묻은 접시를 츄레이드라는 판에 주르륵 세워 놓으면 그것이 접시딲는 기계속으로 들어가는데......
별안가 코가 약간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손으로 쓱 흠쳤는데 손에 붉은 색의 액체가 자꾸 묻어 났어요.
저는 미국사람들이 많이 먹는 캐첩이 손에 묻은 줄로 알았죠. 물론 접시에는 캐첩이 많이 묻어 들어오거든요.
에구~~ 스믈거리는 맛의 캐첩이 뭐가 맛있는지...... 고추장 맛을 모르는 녀석들~~ 그러면서 정신없이 일을 했어요.
지나가던 책임자가 제 얼굴을 힐끗 보더니..... 오우~~ 유 크레이지~~~ .........그러더군요. 저 보고 미쳤데요.
얼굴을 온통 코피로 범벅을 해서 씩 웃고 있으니 얼마나 놀랬겠어요....... 오히려 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책임자를 보고 더 놀랬죠.
이크~~ 혹시 내가 뭐를 잘못한 것이 있나..........?
책임자인 독일 여자는 얼른 뛰어 들어오더니 저를 종업원들만 식사를 하는 방으로 끌고 갔어요.
의자를 쭉 붙여 놓고는 그 곳에 저를 눞혔던 것이었죠. 물론 저는 뭔 짓을 하는 것인가.....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는데, 코피가 나온다는 영어를 못 알아 들었거든요.
다시 코가 간질거려서..... 손으로 코를 쓱 문지르는데...........스탑~ 하고 책임자가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Stop......?
이게 또 뭔 소리지? 누가 차를 몰고 가는 것도 아닌데......
야단법석이었어요. 물수건을 가져다가 피로 범벅이 된 제 얼굴을 딲아 주고는....... 천천히...... 진정해~~ 그러더군요.
덩치가 커다란 흑인여자인 수지가 달려왔어요.
오우~~ 마이 베이비~~~ 무슨 일이야.......? 잠시 영어로 해석하자면.........Oh~ my baby~ What's the matter?
그러더니 저를 끌어 안고는 영어로 뭐라고 쌀라 쌀라 거리더군요.
사실 저는 수지가 징그러웠어요. 배가 쑥 나오고 얼굴도 무진장 컸거든요. 머리카락은 꼬불꼬불 거리고, 입술은 두툼해서 저를 끌어안고 뺨에다가 키스를 하는데...... 그 입술에 제 뺨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문화충격은 그렇다 치고...... 제 가슴을 흔든 진정한 충격은 바로 교포사회의 냉담한 분위기에 있었던 것이었어요.
4.
제가 공부를 잘 했는지 어떤지는 몰라요. 다만 고등학교 3학년으로 미국학교에 편입을 했는데, 편입시험에 통과는 했거든요.
학교에는 한국학생이 다섯 명 있었어요.
그런데 그 중의 네 명이 모두 한국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가 이민온 집안의 자식들이었어요.
그 당시에 미국의 교포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던 한국의 모 장관과 재벌의 아들이 뭉쳐서 호화판 생활을 하던 소문이 돌던 시절이었어요. 사실 저와 딕크는 별 볼일 없는 입장에서 덜커덕 미국에 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달랐어요. 돈도 많았고, 미국에 어느정도의 발판을 마련한 집안의 자식들이었거든요.
냉철하게 따지자면 자신이 돈을 벌어서 학비를 마련하여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예요. 미국사회는 그렇게 목가적인 사회가 아니죠. 대학은 입학하기는 쉽지만 졸업하기는 무척 어렵거든요. 학비도 무척 많이 들어요.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오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서 공부할 엄두를 못 내거든요. 우선 몸이 안 따라 주어요.
미국아이들은 체력이 참 좋아요. 물론 어려서부터 든든한 고기만 먹고 자란 아이들이거든요.
그들은 이틀이나 삼일 밤을 연속으로 세우면서 공부를 해도 끄떡 없어요. 그러나 동양인들은 하룻밤만 새우면 그 다음날은 일어나지도 못하는 허약한 체질이였어요. 그러니 학교공부에 있어서도 남을 따라잡기가 무척 힘들어요.
돈 많은 교포...... 딕크와 저는 고관댁 자제들을 그렇게 불렀어요. 학교에서 그들과 어울리기도 어려웠거든요.
그들은 신형 승용차를 자주 이용하였고, 서로가 높은 꿈과 이상을 이야기 했어요. 흔히 말하는 의학박사를 꿈꾸었거든요.
그러나 딕크와 저는 일터에서의 하루 일당을 이야기 했고, 미국까지 와서 뜨내기 거지로 남는게 아닌가 걱정했어요.
참으로 외로웠어요.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스낵바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국의 고독을 애누리 없이 모두 마셔야 했어요.
밤이면 현실처럼 한국땅에서 놀던 꿈을 꾸었어요. 그러다가 새벽에 눈을 뜨면 온돌방 대신에 침대에 눕혀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기도 했어요. 참으로 바다는 무심하더군요. 태평양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
고관 자식들의 냉냉한 시선...... 학교에 다니는 차비를 조달하여야 하는 현실...... 그리고 먼 타국의 낮설음......
저는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어요.
운 좋게 임금도 높고 좋은 사람들 틈에서 일했거든요. 일만 하면 돈 걱정은 안 해도 되었어요.
그리고......무엇보다도.....저는 오리지날 한국인이었어요. 굳이 따지자면 족보있는 집안의 아들이었거든요.
그러나 딕크는 달랐어요.
용돈마저도 없는 빈 주머니와,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핏줄...... 그리고 일가친척도 없는 무족보와 문화충격~
5.
매일 아침마다 학교가는 버스에서 그를 만났어요. 그의 유일한 친구가 저 인줄을 제가 더 잘 알거든요.
버스티겟을 사면 딕크의 것도 같이 사 주었어요. 가끔은 봉급날에 몇 딸라를 그냥 주기도 했어요. 그는 정말 안 됐어요. 항상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로 커다란 눈을 꿈뻑 거려요. 그리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씩 웃곤 했어요.
딕크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나라는 아무것도 아니였어요. 그냥 그를 이방인으로 패대기 친 것에 불과한 것이었어요.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나라에 도착한 그는 너무도 황당한 자신의 입장에 방황하였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불행이 그를 덮치기 시작했던 것이었어요.
딕크의 어머니는 미국에서 달리 먹고 살 방법이 없었어요.
밤이면 단속을 피하여 차이나타운의 뒷 골목을 어슬렁 거리면서 남자를 부르는 창녀생활을 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죠.
그리고..... 너무도 외로운 이국땅에서 미쳐가기 시작했어요.
알콜중독이었어요.
허우적거리는 팔로 딕크를 끌어 안고 하염없이 울던 어머니는 술에 잔득 취한채 그냥 쓰러져 잠을 자곤 했어요. 실로 뼈 저리는 타국에서 혼혈아인 자식 때문에 고향에도 못 갑니다. 그렇다고 미국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였죠. 유일한 소망인 딕크는 한 눈에도 방황하는 것이 역역했을 것이니 얼마나 가슴이 아펐겠어요.....
한국교포들은 딕크 어머니를 나라 망신 시키는 양공주라고 손가락질을 했어요. 딕크는 당연히 그 양공주의 자식이고.....
딕크와 저는 금문교 아래를 자주 놀러갔어요.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태평양의 거대한 파도를 보며 우리만의 이야기를 수없이 하였죠.
그 때는 정말로 대한제국의 소년과 소년의 모습이었어요. 미국여자의 가슴이 어떻다는 둥, 눈이 파란 여자는 죽어도 싫다는 둥 하면서 낄낄 거리고 하루를 보내곤 했어요.
"야.... 라디오의 밧데리가 다 떨어졌는데..... 가서 사와~"
"뭐라고? 임마 네가 가서 사와~"
"짜식아 네가 영어를 더 잘하잖아......"
"몰라...임마~ 영어로 밧데리 떨어졌다는 말을 어떻게 하지?"
"글쎄..... 뭐라고 하지? 그냥 기브미 어 뉴 빳데리~ 그렇게 해봐~"
"히히~~ 지금 사전 가져 왔지?"
"짜식~~ 사전에 밧데리 떨어졌다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아..... 그렇지 않아도 찾아 봤는데....쩝~"
제가 한국으로 돌아 가던날.... 그는 공항에 나왔어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난간에 기대어 있던 그 녀석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어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얼마후면 딕크의 어머니는 알콜중독자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는 혼자서 밥을 해 먹으며 학교에 다녀야 되어요.
딕크는 사진 한 장을 내밀었어요.
어제 이별의 기념으로 같이 찍은 사진인데, 서로 울면서 ""짜식아~ 남자가 울긴~" 그렇게 손가락질 했거든요.
그 녀석이 눈물을 감추는 모습으로 봐서는 정말로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놈이죠.
내가 탄 비행기는 무심하게 하늘로 솟아 올랐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딕크에게 제가 일하던 일자리를 물려 주었거든요.
독일여자인 식당 책임자는 떠나는 저를 무척 섭섭해 하면서 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 주었어요.
"네가 일을 잘하니...... 네 친구도 일을 잘할거야~~ 어서 데려와~"
그래서 딕크는 제가 운정하던 접시딲는 기계를 운전하게 되었어요. 물론 보수도 많이 주는 자리니깐,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예요.
6.
그 후로 오 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저도 생활에 쫓기는 몸이라서 그 친구와의 연락은 뜸하게 했는데, 어느날 부터 연락이 두절되었거든요.
일요일로 기억하고 있어요. 집에서 대문과 방문도 몽땅 열어 놓은 채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잠결에 누가 옆구리를 자꾸 툭툭 치는 것 같아서 부시시 눈을 떴어요.
환한 햇빛을 등지고 커다란 체구의 사람이 방문 앞에 서 있었는데..... 바로 딕크가 미군병사의 복장으로 웃고 있더군요.
"오우~~~~~~맨~~~~~~~(man 이라는 단어는 감탄사에 속함) 유~~ 유~~ 딕크 맞어?"
저는 영어 반, 한국말 반..... 이렇게 소리쳤어요.
"짜식~~ 미국에서 접시나 딲던 놈이 팔자 편하구나....낮잠을 자고 있다니......히히~~"
닥크는 미군에 입대하여 한국으로 파견나온 것이었어요.
그리고 저의 집주소를 들고 찾아 왔어요.
참으로 반가웠어요. 딕크는 자신이 성장한 동두천에서 근무한다고 하더군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던 그 길은 지금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라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말했어요.
딕크의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나온 후에 혼자서 살고 있다고 했어요. 봉급을 타면 어머니의 생활비을 보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근무한 후에 미국으로 돌아가면 결혼해서 어머니를 직접 모시겠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생활풍습은 완전히 한국의 것이죠.
글쎄..... 그 녀석은 반쪽은 한국인이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고추장을 빵에 발라서 먹는 녀석이예요.
지금은 딕크가 한국 나이로 오십 둘이예요. 나하고 같은 용띠거든요.
드레곤이라면 미국 사람도 경이롭게 생각하는 영물이예요. 자신이 마우스띠나.... 더그띠가 아니고 드레곤띠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친구인데......
그 친구가 시카고에서 교통사고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어요.
동두천 뒷골목에서 시카고에 이르는 그의 생애는 말로 다하지 못하는 그 녀석만의 애달픔이 서려 있거든요.
인생의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는 천명의 나이에 눈물이 이토록 흐르는 이유를 그 녀석은 잘 알고 있을거예요.
아들이 둘 이고 .... 딸이 하나라고 했던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