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한겨울 찬바람이 부는 서울역은 제각기 갈 길이 바쁜 사람들로 붐볐다. 누리여행사라 쓰인 버스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은수도 다홍이 추울까봐 다홍의 손을 잡아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보라는 다홍팀에게 눈인사를 하고 바로 인원체크에 들어갔다. 버스에 타자마자 보라는 일정표를 나눠 주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보라의 인사소리가 묻혀 버릴만큼 박수소리가 컸다. 미모의 가이드를 만났으니 행운이라고 생각했는지 뒷자리의 남자들은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보라는 각자 자기 소개를 하자며 마이크를 앞자리에 앉은 남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대학생 무리였다. 그 다음엔 은행원이라는 남자의 가족, 그 다음엔 민경과 준용, 그 다음엔 은수와 다홍이다. 소개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던 사람들이 은수가 한의사라고 소개하자, 얼굴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은수는 잘생긴 젊은 한의사라는 타이틀로 여행객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날 일정이 끝나고 몽돌해변에 있는 호텔에 들어와서 다같이 나이트에 갔을 때에도 은수는 사람들이 주는 술잔을 받아 쌓아놓은 것만 해도 여러 개가 되었다. 이제 경계 대상은 보라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여자들만 넷이 온 무리는 대놓고 은수에게 관심을 표현했다. 하지만 은수 말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은수선배, 저렇게 놔둬도 되는거야? 젊은 것들이 아주 대놓고 대쉬하는걸...”
민경은 여자들에 이끌려 무대로 나가는 은수를 보며 못마땅한 듯 다홍에게 말했다.
“괜찮아. 내 애인이 인기가 많으니 고마운 일이지뭐.”
“웬일이냐? 이다홍이 이렇게 태연하게.. 목걸이 받으면 원래 이렇게 마음이 넓어지냐?”
“그러게 말이다. 선물의 힘이 세긴 센가벼”
농담을 주고 받을 만큼 다홍의 마음이 여유로와졌다.
“가이드누나는 모델해도 되겠어요. 저랑 러브샷 한잔 해요.”
“어머, 그래요. 한잔해요. 호호호”
보라의 웃음이 헤퍼진 걸 보니 또 술이 취했나보다. 남자들이 미모의 가이드를 그냥 둘 리 없다. 은수가 자리로 돌아오자 보라는 은수 팔에 매달려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보라를 비롯한 여자들에 둘러쌓인 은수를 보며 다홍도 맥주를 한잔 들이켰다.
“저쪽 남자분 보이시죠? 술 한잔 드리고 싶다고 하십니다.”
강호동이라는 이름표를 단 웨이터가 몇 테이블 건너서 술잔을 들어 인사를 하는 남자를 가리켰다. 말로만 듣던 부....킹..??? 다홍은 자신에게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강호동이 내미는 술잔을 받았다. 색깔은 예쁘지만 꽤나 독한 칵테일이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죠.”
다홍은 그 술을 마시면 승낙의 의미가 되는 줄 몰랐었다. 거절할 틈도 없이 강호동의 손에 이끌려 그 남자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갔다.
“저쪽에 온 팀과 같이 여행 오셨나 보군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말씨도 예의발랐다. 일반 여행객은 아닌 듯 했다.
“네. 전 사실 술을 마신다는 것이 승낙의 의미인줄 몰랐어요.”
“압니다.”
“네?”
“이런데 자주 오시는 분 같지는 않아 보이더군요. 저도 뭐 이런 데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술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그가 라이터를 켜서 들자 강호동이 달려왔다.
“여기 술하고 안주 좀 괜찮은 걸로 가지고 오고, 음악 좀 분위기 있는 것으로 바꿔 주고.”
남자는 덩치가 자기보다 2배는 됨직한 강호동에게 반말을 하며 주문을 했다. 강호동은 90도로 허리를 숙여 주문을 받아서는 갔다. 시끄럽던 댄스 음악이 곧 째즈로 바뀌었다. 한결 이야기하기가 수월했다.
“여기 분이세요?”
“네. 그런 셈이죠. 술 한잔 하시죠.”
강호동이 가져 온 술을 그는 티슈로 한번 닦아내고는 다홍의 잔에 따라주었다. 민경이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었지만, 다홍은 남자가 예의바른 것 같아 걱정없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저한테 안 물어보십니까?”
“네? 뭘요?”
“직업이 뭐냐는 둥, 이름이 뭐냐는 둥 여자들이 좋아하는 질문 있잖습니까?”
“물어봐야 하나요?”
다홍의 물음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여자들이 궁금해 하는건 그런거 밖에 없는 것 같던데 그쪽은 다른가 보군요.”
“뭐 꼭 자랑하고 싶으시면 얘기하셔도 상관없어요. 무슨일하시는데요?”
남자는 담배를 꺼내 물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작은 사업하고 있습니다. 그쪽은 이름이 ..?”
“저요? 이다홍입니다.”
“본명이시군요.”
“네?”
남자는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했다.
“이런 데 오면 여자들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가 보더라구요. 가령 이름을 바꾼다든지 해서요. 은서나 가인이 같은 드라마 이름들을 자기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아~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차피 여기 오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니까요.”
“내일 낮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내일요?”
“네. 지금은 저쪽에서 다홍씨를 자꾸만 부르고 있어서 더 이상 잡을 수는 없겠네요. 내일 낮에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만나고 싶습니다.”
다홍은 돌아보니 민경과 준용이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은 이동해서 정동진으로 가요.”
“그럼 원래 집은 서울이십니까?”
“네.”
“생각나시면 이 번호로 전화 주십시오.”
황금명함에는 기정유통 대표 기정욱이란 이름 밑으로 사무실과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죄송해요. 저 애인있어요. 이런 거 받으면 안될 것 같은데요.”
“넣어두십시오.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올 것입니다. 빠르면 더더욱 좋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가보십시오. 친구들이 곧 다홍씨 잡으러 몰려올 기세인데요.”
자리로 돌아와서 보니 기정욱은 이미 나이트를 나가고 없었다. 은수는 다홍이 부킹을 받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에 취해 매달리는 보라와 여대생들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홍은 의자 뒤로 돌아가 은수 목을 두 팔로 안았다. 그제서야 여자들은 아쉽지만 은수를 놓아주었다.
“선배, 호텔로 돌아가요. 피곤해요.”
은수는 여자들이 보란 듯이 다홍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는 다홍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민경과 다홍은 샤워를 하고 불을 끄고 누웠다. 대학때는 민경이 다홍네 집에 와서 같이 자기도 했는데 졸업하고는 처음이다.
“너 은수선배하고 키스는 해봤어?”
“아니. 아직. 지난번에 할 뻔했던 사건이 전부야.”
“니가 여자로서 별로 매력이 없는거 아니야?”
“야야. 내가 이래뵈도 글래머거든.”
다홍 스스로도 자기 말이 우스운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여자들끼리 잘 때면 늘 뭐가 그리도 할말이 많은지 수다떠느라 잠을 못 이루는 수가 많다.
“넌 준용선배랑 자봤어?”
“섹스? 당연하지.”
“당연? 오~ 어땠어?”
“처음에는 아프지만 몇 번 하면 괜찮아. 그런데 중요한 건 처음에는 남자들이 긴장을 하고 아주 조심스러워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만나기만 하면 하자고 달라드는 거야. 은근히 중독성이 있거든.”
“무섭지 않았어?”
“뭐가? 순결? 어차피 결혼할건데뭐. 그럼 넌 은수선배가 하자고 하면 순결 따지면서 안할거야?”
“아직 생각안해봤는데...”
“생각해보고 말고 할게 뭐있냐?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일인데. 그리고 어차피 너 은수선배랑 결혼할거잖아.”
“아직 그런말 없었다구.”
“그럼 은수선배가 너를 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니? 같이 자는거 나쁜거 아니야. 서로의 알몸을 보고 한 침대에서 잔다는 건 얼마나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 주는데. 나도 너처럼 겪어보기 전에는 무섭고 징그러운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많이 아껴주는 준용선배 보니까 선배가 더더욱 사랑스럽더라구. 겁내지 마쇼, 친구.”
다홍이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민경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은수가 원하면 할 수 있을까.. 다홍도 피곤했는지 이내 잠이 들었다.
한려해상공원을 지나 외도를 관람하고 버스는 부산으로 갔다. 자갈치 시장에서 신선한 회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해 합천 해인사를 경유해서 정동진에 도착하니 밤이 늦었다. 새해 일출을 보려면 일찍 자두어야 한다는 보라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은 배정받은 숙소로 각기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피끓는 젊음들이 그냥 잘리 만무했다. 다홍과 민경도 자려고 씻고 누웠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준용이 캔맥주를 잔득 사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정말 자려고 했던 거야? 이 사람들 여행을 원데이 투데이하나? 촌스럽게스리...”
준용은 마치 자기 방이라도 되는 듯 들어와서는 방바닥에 큰 대자로 누웠다.
“이기 뭐하는 기고? 잉? 어디 빚 받으러 왔슴까? 은수선배는 어디 내팽개쳐두고 혼자 왔어?”
민경은 누워 있는 준용을 일으켜서 앉혔다.
“보라 와 있어서 난 자리 피해준거야. 형도 보라에게 확실하게 말할 필요가 있잖아.”
이야기가 길어지는지 한참이 지나도록 은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마, 무슨 일이야 있겠냐?”
다홍이 초조해 할까봐 민경은 위로해 주었는데 다홍은 채널을 돌리며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보라가 은수 선배 많이 좋아한 모양이야. 난 보라가 부러워. 그렇게 좋아하면 좋아한다는 표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순수함이 부러워.”
“순수함은 무슨.... 보라는 은수선배가 안넘어오니까 오기로 더 덤비는거야. 만약 은수선배가 다른 남자들처럼 보라한테 넙죽 엎어졌다면 그렇게 매달리겠냐?”
“정말로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걔는 사랑하는 방식이 틀려먹었어. 어떻게 애인이 있는 사람을 찍어대니? 지 사랑은 중요하고 남의 사랑은 깨놔도 된다는거야 뭐야?”
민경은 보라에 대해 비우호적이라서 다홍이 갑자기 보라의 편을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아가씨들이 왜 이리 흥분들 하시나? 자자, 마음 가라앉히고 이리와봐. 원래 일출보려면 이렇게 고스톱치면서 밤을 새워야 하는거야. 뭐해? 패 돌려야지.”
준용은 침대위에 있던 이불을 끌어내려서는 방바닥에 펴고 화투를 꺼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금 피곤해 보이는 은수가 들어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하는 눈길들을 모른척하고 은수는 다홍 옆에 앉았다. 다홍은 고스톱을 쳐 본적이 없어서 준용에게 특별 강습을 받아야했다.
“이것이 홍단, 요것이 초단, 파란 줄 있는 이것들이 청단, 원고는 플러스 1점, 투고부터는 더블이야. 얘들이 쌍피. 3점이면 나는 것이고, 다른 건 하면서 가르쳐 줄 것잉께 잘 해 보숑. 자, 패 돌립니다요. 형이랑 다홍이 짜고 치면 무조건 독박입니다요.”
준용은 패를 돌리고는 신이 난 듯 화투가 튀어오르도록 쳤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민경이 문을 열어 주러 나가서는 보라와 함께 들어왔다. 보라도 손에 한 봉지 가득 먹을 것을 사들고 왔다.
“어머, 뭐예요? 나는 빼놓고 자기네들끼리 고스톱치고.. 이래뵈도 나 도신으로 소문났는데.”
보라는 맥주를 하나씩 돌리고는 노름판에 끼어들었다. 은수와 무슨 이야길 나눴는지 몰라도 보라는 달라져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화투를 치면서도 옆에 있는 은수에게 기대거나 접촉하려고 하지 않았다.
티비에서는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축하 공연이 한창이다. 12시 땡! 2004년 새해가 밝았다. 다같이 맥주로 새해를 자축하고는 다시 고스톱에 몰두했다. 3시를 넘기도록 노름판은 끝이 날 줄 모르고 점점 더 열기가 달아올랐다. 민경은 지쳐서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서민경, 너 노름판의 예의도 모르냐? 선배들이 다 정자세로 동양화 감상 중이신데 어디 어린 것이 눕고 그런다냐?”
준용의 호령에도 민경은 나 몰라라 눈을 감아 버렸다. 다홍은 처음의 기세와는 다르게 자꾸만 잃었다. 아무래도 준용과 보라가 보통 실력들이 아니니 자꾸만 다홍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에고고고, 준용아, 난 늙은 것이니 누워도 되지?”
은수도 피곤한지 다홍의 다리를 베고는 누웠다. 다시 패가 돌고 다홍 차례가 되자 눈을 감고 있던 은수가 눈을 뜨고는 다홍 손에 들린 화투 중에서 한 장을 짚었다.
“어어, 형 뭐하슈? 그렇게 편들어 주면 어떻게 하신담?”
“내가 뭘 했냐? 그냥 그것이 색깔이 이쁘길래..”
은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눈을 감았다가 다홍 차례가 되면 다홍과 눈짓을 주고 받으며 내야 할 화투장을 알려주곤 했다. 보라가 눈을 흘겼다.
“어머, 전 그만할래요. 은수선배님, 정말 치사해요. 다홍 언니 편만 들어주고.”
“나는 원래 다홍이 편이잖아. 고스톱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하자. 곧 해가 뜨겠네.”
티비에서는 박신양 주연의 ‘편지’가 방영되고 있었다. 은수는 맥주를 한잔 하고는 다시 다홍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다홍은 손가락으로 은수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가 빠져나갔다. 맥주를 마시며 벽에 기대어 은수를 바라보던 보라가 영화가 끝나자 일어났다.
“이 몸은 또 일하러 갑니다. 천천히들 준비해서 로비로 나오세요. 일출 보러 가야죠.”
은수는 씻고 옷을 입어야 한다며 준용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민경과 다홍도 준비를 해서 로비로 나가니 보라는 좀 전에 방에서 보던 편한 모습의 후배가 아니라 프로 가이드로서 로비에서 인원 점검을 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은 육지에서보다 새해 아침을 더 춥게 느끼게 했다. 다홍도 은수가 뒤에서 안아주고 있었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추웠다.
“일출보면서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꼭 이루어 진다고 하니 신중하게 생각하신 다음 일출 순간에 외치세요. 되도록이면 짧게 외쳐야 한다는거 아시죠? 예를 들면, 밥! 돈! 땅! 아셨죠?”
보라는 농담에 다들 추위로 볼이 얼얼하면서도 웃었다.
“소원 생각했어?”
은수가 다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뭐?”
“비밀. 선배는요?”
“우리 결혼. 나와 결혼해 줄거지?”
다홍은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붉은 해가 곧 떠오를 듯 바다와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더니 바다가 쑥 뱉어내듯 해를 내밀었다. 해변은 갑자기 함성의 도가니였다. 은수는 다홍을 돌려세웠다. 다홍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은수는 속삭였다.
“결혼해주는거지?”
다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수는 처음으로 다홍에게 키스하며 사랑을 변함없이 지켜가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