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를 사랑하시는 님에게 아낌없는 찬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먼저 4절지의 크기에 알맞게 글씨의 크기도 정리하시면 되겠네요.
4절지란 30cm x 54cm이니 잘 정리하십시요.
한국의 역사
시대구분
시대구분은 역사의 흐름을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분하는 것으로 역사인식의 방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사를 상대(上代)·중대(中代)·하대(下代) 또는 상고(上古)·중고(中古)·하고(下古) 등으로 3구분한 바 있듯이,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역사발전의 체계적 인식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작업이다.
최남선(崔南善)·이병도(李丙燾) 등은 신석기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를 상고 또는 상대, 고려왕조를 중고·중세, 조선왕조를 근세로 각각 구분하였고, 백남운(白南雲)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에서 원시씨족사회(신석기시대)·원시부족국가(고조선 및 삼한)·노예국가(삼국과 통일신라)·집권적 봉건국가(고려~조선)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이기백(李基白)은 1967년 《한국사신론》에서 씨족사회·부족국가로부터 민주주의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18부분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김석형, 남한의 윤내현 등은 식민사관 극복과 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과정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에서 원시사회, 고대사회(단군조선~남북국시대), 고려사회, 조선사회, 근대사회, 민족의 수난과 저항, 현대사회로 나누어 그동안 왜곡되었던 사실들에 대해 재조명을 시도했다.
원시사회
한국의 역사는 근년에 한반도 전지역에 걸쳐 구석기문화의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그 기원이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약 6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중기·후기에 걸치는 장구한 시기 동안 계속 생존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한반도의 구석기문화인이 오늘날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반도에는 1만 년 전 빙하기(홍적세)가 끝나고 후빙기(충적세)가 되면서 새로운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오늘날 고고학에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그 상한을 BC 6000년까지 올려 잡고 있다. 신석기시대 유물상의 특징은 간석기[磨製石器(마제석기)]와 토기의 등장이다. 이전 구석기시대인은 뗀석기[打製石器(타제석기)]만을 제작하였는데,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보다 정교하게 만든 간석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토기를 사용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즐문토기)]라고 할 수 있으나, 이에 앞서 한때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원시무문토기)]나 융기무늬토기도 사용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토기의 계통은 명확하지 않으나, 다음 단계의 빗살무늬토기 문화인은 시베리아에 살던 주민과 같은 계통인 고아시아족(Paleo-Asiatics)으로서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문화 다음에는 민무늬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무문토기문화)]가 성립되었다. 이 문화는 전단계 문화와는 그 주민이나 문화의 계통이 다른 것이었다. BC 2400년경 이 민무늬토기인들에 의해 청동기문화가 시작되었고 이어 철기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문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중국 동해안의 화이허강유역[淮河流域(회하유역)]·산둥반도·보하이만[渤海灣(발해만)]·남만주·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역에 민무늬토기문화가 중심이 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이 성립되어, 퉁구스족에 속하는 예맥족(濊貊族)과 한족(韓族)이 이 문화권 안에서 성장하였고 고아시아족으로 추정되는 빗살무늬토기문화인을 흡수하였으며, 이어 주위의 여러 계통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민족의 주류를 형성해 나갔다.
구석기시대
이 시대의 유적·유물은 한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평양 교외 검은모루의 40만∼5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굴유적, 나선직할시 굴포리(屈浦里)·부포리의 3만∼10만 년 전 유적,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 장기면(長岐面) 석장리(石壯里)의 3만 년 전에서 그보다 더 오래된 시대에 이르는 유물 포함층,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전곡읍(全谷邑) 전곡리에서 출토된 손도끼[握斧(악부)] 등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뗀석기와 나무·뼈의 도구를 사용하여 동물을 사냥하였고 열매와 구근을 채집하며 생활하였다.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BC 5000년경 토기와 간석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 토기로는 꼬챙이[櫛(즐)]의 가느다란 부분으로 긁어 무늬를 새긴 반달걀모양[半卵形(반란형)]의 기하무늬토기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즐문토기)]가 있다. 도구로서는 돌살촉[石鏃(석촉)]·돌칼[石刀(석도)]·골창(骨槍)·골섬 등의 수렵·어로 용구 외에 돌보습[石犁(석리)]·돌괭이[石鋤(석서)]·돌가래·돌낫[石鎌(석겸)] 등의 농업용구가 있다. 유적은 하천의 하류 지역과 해안에 많다. 당시 사람들은 집락을 이루어 정주하면서 씨족사회를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반도에서 농경생활이 시작된 시기는 신석기시대 말기부터이며, 특히 쌀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청동기시대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1991년 일산 가와지 유적 발굴조사에 참여하여 BC 3000년경 토탄층에서 볍씨를 찾아낸 손보기(孫寶基)와 이융조(李隆助)는 기존의 청동기시대 기원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BC 1000년경(청동기시대)이 아니고 BC 3000년경(신석기시대)이라고 발표하였다.
고대사회
청동기시대
전기·중기·후기로 나뉘는데, 후기 세형동검시기는 철기시대와 중복된다. 한국에서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시기는 BC 2400년경으로 고조선 건국(BC 2300년경)보다 조금 앞선다. 이 시기는 대체로 소형 청동기로 전기에 해당된다. 출토된 유물은 화살촉·칼·귀거리·반지·바늘·창·거푸집 등이다. 고조선지역 청동기문화는 BC 2000년경 황허강[黃河(황하)]유역 청동기문화보다 수백년 빠르다.
BC 900년경에 이르면 청동기문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는데 이 시기를 중기로 잡는다. 대표적인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이다. 이 시기에는 비파형동검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용기와 무기·장신구·거울·수레와 말의 장식품 등이 이전보다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토기는 한국의 팽이 모습을 한 민무늬토기로 변화하였다. 농업은 한 단계 더 발달하였고, 돼지·소·말의 사육도 행하여졌다. 사유재산제도는 이때부터 싹텄고, 권력을 지닌 지배층이 출현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세워진 고인돌이 그 상징이다.
동이족 문화권과 고조선
청동기를 사용하던 민무늬토기인들이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데, 이들은 중국의 선진문헌(先秦文獻)에 나타나는 동이족(東夷族)으로 알려졌다. 동이족은 당시 화이허강[淮河(회하)] 이북의 연해 일대인 장쑤성[江蘇省(강소성)]·안후이성[安徽省(안휘성)]의 일부에서 산둥성[山東省(산동성)]·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을 거쳐, 보하이만을 포함한 랴오허강 유역과 만주지역에 살았던 민족의 총칭이었다.
동이족은 중국 북서지역에서부터, 한 갈래는 만주 남동부와 한반도로, 다른 한 갈래는 허베이·산둥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산둥 방면의 동이는 은대(殷代)로부터 한족(漢族)과 끊임없는 접촉과 투쟁을 벌였고, 주대(周代)에는 화이허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연합세력을 이룬 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 동이족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정책에 따라 한족(漢族)에게 점차 동화·정복되거나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동이족은 한(韓)·예맥족으로 일컬어졌고, 몇 차례 민족이동을 계속하면서 중국 동북지방(만주), 한반도 등지에 우수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에는 최초의 국가형태를 갖춘 고조선(古朝鮮)이 등장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BC 2333년경에 단군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에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고조선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BC 1200년경 기자(箕子)시대 고조선에 <8조 금법(禁法)>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시기에 법률이 있었다면 고조선이 고대 국가체제를 갖춘 것은 그보다 앞선 시대로 추정된다. 또 최근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한민족의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시기가 BC 24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의 고조선 건국시기와 비슷하며, 청동기시대에 대체로 국가사회 단계에 진입하였다는 일반론을 따르면 BC 2333년경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는 신화가 실려 있다. 즉, 제석천(帝釋天)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풍백·우사·운사 등을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베풀고 인간사회의 여러 가지 일을 교화하다가 뒤에 곰의 화신인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았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堯)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을 건국, 아사달에 도읍하였다고 한다.
이 단군신화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데, 즉 부족의 시조를 하느님의 손자에 비유하는 천신사상, 제사장인 단군과 정치의 수장인 왕검의 동시사용으로 나타나는 제정일치사회, 단군의 어머니를 곰에 비유하는 곰 토템 씨족설, 풍백·우사·운사 설화에 보이는 원시농경사회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숭배신앙은 신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천신사상과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철기문화의 전래와 위만조선
고조선의 청동기문화는 BC 400년경에 이르면 세형동검을 특징으로 하는 후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철기가 보편화된 때이므로 실제로는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에 진입한 후가 된다. 세형동검은 무기로서의 실용성과 조형적 예술성이 잘 조화를 이룬 우수한 공예품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청동기와 세형동모는 기술면에서 세형동검과 공통성이 있는 것으로 고조선의 특징적인 무기이다.
고조선에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BC 8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널리 보급된 것은 BC 500년경이고 BC 300년경에 이르면 보편화되었다. BC 300년경 유적에서는 긴검·단검·창·가지창·과 등의 무기류와 괭이·호미·낫·반달칼 등의 농구류, 도끼·자귀·끌·손칼·송곳 등의 공구류가 출토되어 당시에 다양한 철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금속문화의 전래는 생활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가옥은 움집에 온돌장치를 한 가옥이 나타났고 또한 지상에 목조가옥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철기인들은 새로운 무기와 농구를 사용함으로써 종래의 고인돌인[支石墓人(지석묘인)]을 손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이 금속문화는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토착화로 이어졌다.
이로써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중국 유이민과 토착민과의 연합정권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성립되었다. 즉 위만조선은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한 식민정권이라기보다는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이(流移) 동이계 한인(韓人)과 토착 조선인의 연합정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군현
고조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BC 108년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자리에 낙랑(樂浪)·진번(眞番)·현도·임둔(臨屯)의 4군을 설치하여 중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낙랑군 이외 3군은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었으나 낙랑군만은 후대의 4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그 사이 3세기 초에는 낙랑군의 남부에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었다. 낙랑과 대방 2군은 중국 역대왕조의 동방지배 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