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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김명기 |2003.05.12 09:27
조회 317 |추천 0
 

약속


이제 들녘은 뽀얀 하늘과 산 그림자를 수채화처럼 옅게 비추어 내던 논에, 파릇한 어린모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약속으로 채워진다. 오늘 이앙기로 심어진 어린모들의 앞엔 한동안 따스한 봄날이 계속 될 것이고, 태어나자마자부터 망설이고 침묵하는 철학자들인 올챙이들이 뿌리 곁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날 것이다.


곧바로 한가로운 여름으로 이어지는 듯 싶을 때쯤엔 남태평양의 거칠고 굳센 푸른 파도에서 시작된 태풍이 오키나와나 동지나 해를 지나고 한동안 힘든 시간도 있을 것이다. 뜨거운 햇살이 정수리에 머물고, 흐르는 땀이 이마와 콧등에 송글거리며 맺힐 때쯤엔 쏘는 듯한 매미의 울음소리가 개구리 오케스트라를 대신 할 것이고, 은수원 사시나무의 잎사귀사이로 잘게 부서진 햇살이 언뜻언뜻 비칠 때 나무그늘 아래의 오수는 물오른 수박만큼이나 달고 시원할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매미소리가 뚝 끊긴 것을 느낄 때쯤엔, 이 행성의 한살이가 내재된 이삭은 저절로 땅을 향하여 고개를 숙인 채 익어갈 것이고 가을은 앞산가까이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거리마다 고엽의 쓸쓸한 선율이 흐르고 산머리에 단풍이 물들고, 메뚜기들이 배를 볼록이며 가을의 메마른 대기를 호흡할 무렵. 오늘 심어진 이 어린모들은 농부의 검게 탄 미소로 보상 받고 비로소 약속은 완성되어진다. 시간은 그렇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 알갱이처럼 쉼 없이 흘러간다. 희미한 풀냄새가 아침 공기 중에 떠돌고 있다.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


돌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저녁 무렵 해 저무는 거리를 빠르게 달려가는 낙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발아래의 시간이 쓸려 지나가고 말았다. 이윽고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서게 되었다. 햇살 속에서, 마치 장난처럼 어린 아이들이 땅에 그려놓은 선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랑을 만질 수 있는 곳에서, 고독한 한숨이 낮은 탄식을 토하는 곳으로. 분명한 존재감 속에서,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 벽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평면으로 옮겨 섰다. 그저 한발자국 정도였다.


“안아주세요. 모든 것을 잊고 싶어요.”


새처럼 파들거리며 당신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눈앞도 볼 수 없는 단단한 어둠 속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당신을 느끼며 내 품에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잠들기 바랐지만, 해가 떠오르고 커튼 밖이 파랗게 밝아오자 흐트러진 시트 위엔 새우 같이 등을 구부린 내가 있었다. 그 아침 나는 공허를 안고 있었다. 비로소 당신이 잊고 싶어 하는 긴 목록 중에 나도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물 흐르는 소리만 흘러나오던 말없는 전화도 더 이상은 걸려오지 않았다. 행성의 시간은 부서지기 쉬운 약속만으로 채워졌고, 은밀해졌고, 침묵했다.


스크래치가 심한 LP판처럼, 일상은 한번 튀어 오르고 난 뒤 느리게 반복되었다. 감기처럼 지나갈 줄 알았던 사랑은 이미 몸살을 넘어 심각한 전이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간들처럼 그리움도 예고되지 않은 것이었다. 달이 파랗게 돋아날수록 늦어버린 사랑도 새파랗게 돋아난다. 달빛이 이 행성의 점령하며 뽐내듯 행진할 적에, 나는 식민지의 침묵하는 시민이 되어 길가에서 있을 뿐이었다.


달이 뽀얗게 침몰할 때, 사랑은 어딘가 지구의 건너편에 두고 달만 홀로 앞산 너머로 돋아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달이 새로 돋아나는 시간마다 스스로의 고독을 희석시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이별은 각자의 몫이었다. 사랑 안에 숨겨진 냉혹함은 그런 것이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내가 어떤 의미 있는 시간을 지닐 수 있겠는가? 이별 앞에서처럼 무력했던 것처럼, 당신의 눈물 앞에서 그토록 무력했던 것처럼, 그리움 앞에서도 나는 철저히 무력했다.


“그만 드세요. 더 이상은 술을 팔지 않겠어요.”


한동안 혼자인 나를 보며 개성집 주인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란 말이지? 뭔가 방법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나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골목길의 꺼져 내리는 지표를 밟으며 목성만큼이나 인력이 강한 거리를 흘러갔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싶을 때, 절망은 늘 현실이었다. 아카시아 향기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어느 날 술에 취하여 거칠게 냉장고를 열었을 때, 당신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체다 치즈에는 파란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내 가슴에도 푸른 우울이 가득했다. ‘바보같이...’ 뜨거운 것이 목을 메이게 했다. 와인은 떨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나는 당신을 떠오르게 하는 모든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려 필사적이었다. 냉장고에 기대어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린 채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달빛이 사각의 창을 넘어 발가락 끝에 닿아 있었다. Blues for Elise, Wolf Hoffmann 의 기타소리가 검게 닫힌 공간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때, 말라붙어 하얗게 갈라진 입술에선 의미를 알 수 없는 바람만 쉿쉿! 배어 나오고 있었다. 시간은 느리고 꾸준하게 흘러간다. 어린모들의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당신과 나의 약속은 그저 무의미한 바람이 되었을 뿐...



들녘의 고요한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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