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열일곱의 서지우와 일곱살의 유채린은 소나기 오는 놀이터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채린이가 너무 예쁜 지우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중에 결혼하자고 보채고
꼬마답지 않게 속이 깊은 채린은 진심으로 청혼을 받아들인다
시간은 흘러흘러 지우는 군에 입대하게 되고, 그가 군에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
아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는 사고가 일어나 지우의 가족 모두가 사망하게 되고 지우
는 돌연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그로부터 오년 뒤...
채린은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출신인 강지현과 윤동주 백일장에서 대상을 탄 현소심
과 더불어 A3라는 호칭으로 후배 여학생들에게 우상처럼 떠받들여지는데...
<제 9화 그녀들의 남자>
<1>
"빅뉴스!! 빅뉴스!!"
교실문이 벌컥 열리면서 김지영이 호들갑스럽게 교실로 뛰어 들어온다. 자타가 공
인하는 소식통이지만 최근엔 큰 뉴스거리가 없어서 시시콜콜하고 자잘한 것들만 물
고 들어오던 그녀가 오늘은 상당히 의기양양하게 어깨가 한껏 치켜 올라가 있다
"완전 대박짜리 뉴스니까 모두들 주목!"
지영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이들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지영을 쳐다보
았다. 지영은 교탁 앞에 서서 뿌듯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아마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교무실 문턱을 그토록 마르고 닳게 들락거렸을 것이다
"뭐야 김지영! 이번엔 진짜 대박거리 하나 물어온 거냐!"
지영은 그런 질문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언제 내가 특종말고 취급 하는 거 봤냐. 오늘은 특종 중에 최고 특종이다"
"뭔데 그래!"
"니네 우리 담임이 누가 되는 지 모르지?"
아이들이 웅성거리자 지영은 한껏 뽐내는 듯 하이 소프라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원래 우리 담팅 대신에 오는 선생이 우리 반 담임 맡기로 되어 있었다는데, 글쎄
걔가 완전히 꼴통이라지 뭐냐. 이름도 모르는 지방 골짜기 대학교 출신에다가 교
장 추천으로 낙하산 타고 우리 학교 선생으로 오게 되었단다"
지영은 손가락으로 낙하신이 떨어지는 흉내를 내었다
"모야!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그 꼴통이 우리 담임 된다는 거야?"
지영은 가운데 손가락을 펴서 천천히 가로지었다
"노우노우~~~ 그런 신입꼴통에게 담임을 맡길 순 없잖아"
"그럼 뭐야! 누가 담임이 되는 건데!"
지영은 씩 웃으면서 갑자기 자기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8대 2의 가르
마를 만들어 빗으로 빗는 시늉을 냈다
"꺄아아악!!!"
"가르마가 담팅이라니!!!"
당장 교실은 여학생들의 비명소리로 뒤집어졌다
"못 살어 정말!! 그 유치 3류 개그를 맨날 봐야 된다는 거 아니야!!"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가 담팅이라니!! 정말 낭만적이야!!"
그녀들의 반응은 정확히 반반이었다. 강승표의 됨됨이를 썰렁해 하는 쪽과 열광하
는 쪽... 그러나, 그녀들 대부분이 강승표를 환영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큰일이다. 우리 소심이 승표 앞에서는 유독 소심해지는데 이러다 승표 앞에서 픽
하고 쓰러지는 거 아니야"
지현이는 우황청심원을 반으로 갈라서 (그 반절도) 간신히 먹고 있는 소심을 걱정
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도대체 너 같이 깨어 있는 소설가가 그런 유치
썰렁3류개그 하는 인간을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거냐..."
"그렇게 말하지 마... 선생님이 얼마나 순수하시고 섬세하신데..."
"아이구, 그게 섬세냐 주접이지"
지현은 채린에게 동의를 구하듯 쳐다보았다
"체육 대회 때 반티 맞춘 거 하두 부러운 눈으로 보길래 하나 갖다 줬더니 그걸
소풍 때도 입고 오고 학교 축제 때도 입고 오고... 소풍 가서 장기자랑 때 불쌍
해서 노래 시켜 줬더니 학교 교가 4절까지 혼자 꿋꿋하게 서서 부르고... 십년도
더 된 최불암 씨리즈 수업 때마다 한번씩 꼭 하고. 한 다음에 지 혼자 웃고...
아니다, 소심이도 웃었구나"
채린이 지현에게 눈치를 준다. 그러나 지현은 못 살겠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깝깝하잖아! 얘처럼 지적으로 우수한 애가 그런 삼류 로맨티스트에게 푹 빠져 있
는 게 말야!"
채린이 소심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귀여운 맛이 있잖아. 얼마나 순수해. 아직도 최불암 시리즈를 할 수 있다
는 게 말야"
"하여튼, 난 국사 맘에 안 들어. 현소심 너 정도껏 해라. 그러다 국사가 눈치라도
채는 날엔 진짜 드라마 찍는 사태 벌어진다"
"무슨 드라마?"
"요즘 MBC에서 하는 거 있잖아. 채림이랑 감우성 나오고 거 머시냐 선생이랑 제자
랑 사랑하는..."
소심이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친다
"'사랑해 당신'을 말하는구나! 나 그거 너무 좋아하는데!"
지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그런 정신나간 드라마를 좋아하냐! 그건 말도 안 된다구! 절대 안 돼! 그치 채림아!"
채린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야 난 채림이가 아니라 채린이야"
"그래 채린아. 하여튼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채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생님을 짝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을 결혼까지 가져가는 건 어렵지. 정말
어렵고도 힘든 일인 거 같아"
"그래, 그러니까 소심아 너도 그만 승표 정리해라"
소심은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두고 봐... 올해가 지나기 전에 그 사람이 날 여자로 인식하게 만들거야..."
<2>
토요일 오후...
자율학습을 끝낸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학교를 빠져 나가고 있다. 대부분
큰 길에서 대기하고 있는 등하교 봉고버스에 올라타지만 일부는 작은 골목길로 귀
가 하기도 한다
채린과 소심, 지현은 채린의 부모님이 하는 서점으로 가기 위해 골목길로 들어섰다
한 달에 두 번씩 주말마다 채린이 부모님 대신 서점을 보는데 언제나 두 사람이 같
이 서점을 봐 주고 있었다. 셋은 오늘의 최대 화제거리인 '강승표'에 대한 이야기
를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까아아아악!!!"
"엄마야!!!"
앞쪽 골목에서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나더니 여학생 둘이 황급히 뛰어 나왔다
"뭐지?"
그녀들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채린 일행을 지나쳐 그대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지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멀어지는 여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앞에 뭐가 있나 봐?"
소심은 지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 돌아가자..."
"뭘 돌아 가. 그냥 가면 되지"
지현은 소심의 팔을 뿌리치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채린은 소심의 손을 꼭
잡아 주면서 같이 앞으로 걸어갔다
모퉁이를 막 돌았을까...
"으흐흐흐!"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들 앞을 막아섰다
"뭐야!"
지현은 자신을 가로막은 그림자가 남자라는 것을 알고는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으흐흐흐"
그 남자는 자신의 몸을 가린 검은 외투를 천천히 활짝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
신의 알몸을 그녀들에게 보여주면서 음산하게 말했다
"먹고 싶지... 먹고 싶지..."
소심은 자신의 입을 틀어 막으면서 눈을 질끔 감았다. 채린은 소심을 품에 감싸 안
고는 지현의 팔을 잡았다.
"지현아... 그냥 가자..."
지현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남자의 알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퉁명스럽
게 말을 뱉었다
"먹고 싶긴 뭘 먹고 싶어요! 그게 바나나라도 되나!"
지현은 콧방귀를 끼며 남자의 거시기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다음부터 이런 짓 하려면 그거 발기시켜 가져와요. 무슨 번데기도 아니고..."
남자는 황당 + 당황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외투로 알몸을 감췄다
"그만 가자 지현아..."
채린은 지현의 팔을 잡아 끌며 길을 재촉했다
"아냐. 잠시만 기다려 봐"
지현은 남자 앞에 정면으로 섰다. 그리곤, 자신의 교복 치마를 바싹 걷어서 옆구리
에 말아 넣었다
"아저씨, 내가 웬만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요. 마침 자율학습 끝나고 애들이 많
이 나오는데 아저씨 보고 놀랄 거 같아서요..."
지현은 팬티가 보일 정도로 치마를 걷어서 옆구리에 완전히 말아 넣었다. 남자는
지현의 늘씬한 허벅지를 보면서 입을 떡 벌리고 완전히 넋이 나갔다
"미안해요 슈퍼맨 아저씨"
순간, 지현의 다리가 180도 회전하더니 그 자리에서 뒤돌려차기로 남자의 면상을
후려쳤다
"퍼어어억!!"
남자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지현은 남자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달
려들면서 당수로 남자의 목을 후려갈겼다
"파아아악!!"
딱 두 대였다. 남자는 골목 한 옆에 길게 대자로 뻗어 누었다. 지현은 남자의 벌어
진 외투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주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 C여고 후문 골목인데요..."
지현은 즉시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3>
채린의 서점은 한적한 변두리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 크진 않지만 보유한 책
이 많고 앉아서 읽을 수 있도록 편한 의자까지 놓여져 있었기에 찾는 사람들은 꾸
준히 찾아오는 서점이었다
"이제들 오는구나"
채린일행이 들어서자 그녀들을 향해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현민오빠"
채린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조현민...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본과 1학년에 재학중인 그는 180이 넘는 키에 부드러운 안경
이 어울리는 핸섬한 남자이다. 대학동창인 둘의 부모로 인해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냈던 두 사람은 현민이 주말마다 채린의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더
욱 각별하게 친해지게 되었다.
"소심이도 왔네"
"네 오빠도 잘 지냈죠?"
남자들 앞에서는 유독 소심한 현소심이지만 현민 앞에서만큼은 스스럼없다. 부담스
러울 정도로 잘 생긴 타입의 현민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는 남자였다
"나야 언제나 잘 있지... 어! 지현이도 있었구나"
"네... 안녕... 하세요..."
뭐니뭐니해도 가장 놀라운 것은 강지현의 변신이었다. 슈퍼맨 앞에서 발기가 어째
니 번데기가 어째니 하며 당당하던 그녀는 현민 앞에서는 소심이의 '소심'보다도
더 소심한 목소리로 간신히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그래, 소심이 뒤에 있어서 왔는지 못 알아봤다. 인사가 늦어 미안해"
"아... 아니에여..."
지현은 고개를 푹 숙이며 간신히 대답한다. 현민은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지현이는 언제봐도 여성스러운 거 같아. 아마 셋 중에서 가장 여자다울 거야
그치 채린아?"
"으, 응? 아... 머... 오빠 저녁 먹었어?"
"아니, 너희들 오면 같이 먹으려고 안 먹었어"
"그래. 그럼 우리 뭐 시켜 먹자"
채린은 생뚱한 표정으로 지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뭐 먹을래? 너 아까 족발 먹고 싶다고 하지 않..."
"난 간단한 거면 좋아"
지현은 황급히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현민은 괜찮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 먹고 싶은 걸로 먹어. 난 아무거나 좋으니까"
채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현을 쳐다보았다
"그래, 간단하게 족발.."
"김밥 어떠니!"
지현이 급히 말을 자른다. 소심이가 별로라는 듯 말한다
"김밥보단 그냥 족발이 낫다. 우리 족발 먹자"
채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지현을 쳐다보았다
"그래. 족발 먹자. 족발에다가 보쌈하고 같이 시키면..."
"채린아!"
지현이 현민을 등지고 채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여성스럽게) 말했다
"그냥 우리 김밥 먹자... 응 채린아?"
<4>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
"빅뉴스!! 빅뉴스!!"
교실문이 벌컥 열리면서 김지영이 호들갑스럽게 뛰어 들어온다
"뭐야 김지영! 빅뉴스는 저번주에 했잖아!"
"아냐! 이건 그 때보다 더 큰 빅뉴스야!"
지영은 그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된 표정이었다. 아니, 긴장보다도 상당히 억울한
쪽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얘들아... 우리 완전히 엿 먹었다..."
지영이 갑자기 교탁에 몸을 내던지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뭔데 그래 기지배야!"
"뜸 들이지 말고 빨랑 얘기 해!"
지영은 머리를 교탁에 쾅쾅 박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 낙하산 말이야. 우리 담팅 대신에 온다는 그 꼴통..."
"그 꼴통이 왜"
"글쎄... 그 꼴통이 말이야..."
지영은 흐느끼듯 울먹거리면서 오열을 터트렸다
"졸라 잘생긴 킹카였어!"
교실이 또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그 말 진짜냐!!"
"진짜 킹카냐구!!"
지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킹카야. 엄창 걸구 진짜... 아이구 억울해. 그런 킹카 놔 두고 '가르마'가
담팅 됐다고 그리 좋아했다니... 내가 미친년이지 미친년이야"
"지영이 저러는 거 보면 진짠가 보다..."
"진짜라니까! 1교시에 들어오니까 얼굴 확인해 보면 알잖아!"
그녀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수근거렸다. 그네들에겐 '가르마'도 나름대로 괜찮은 담
임이었지만 상대는 킹카라고 하지 않는가... 만약 정말 킹카라면 강승표 따위는 정
말 비교도 되지 않을 뿐더러, 그녀들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강승표가 더욱 하찮
게 보일 것이었다
"이것 봐... 승표가 담팅이 되는 게 아니었다니까"
지현이 투덜거리며 소심을 바라본다
"너 솔직히 불어. 너 승표 담팅 되라고 백일기도 드렸지!"
소심이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쭈 이것봐라. 진짜 백일기도 드렸나보네"
채린이 웃으며 소심의 등을 두들겼다
"괜찮아 소심아. 나도 국사가 담임된 거 찬성해"
그 때였다
"야! 떴다!"
복도에 나가서 망을 보던 여학생 하나가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어때!"
"어떻게 생겼어!"
이구동성으로 질문이 쏟아지자 그 여학생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캡짱으로 생겼어!"
지영이는 '내 말이 맞잖아!' 하는 듯 울먹이는 표정으로 책상에 엎어져버렸다
"뚜벅뚜벅"
복도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끼이익"
새로 온 선생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
아이들은 들어서는 선생을 보고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너무 잘 생겼다...'
'정말 킹카야...'
아이들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교탁 위에 선 선생은 아이들을 쳐다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연 그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
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서지우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서지우...
자신의 아버지가 교감으로 있던 그 곳으로 그는 이렇게 돌아왔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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