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을 하던 날,
후임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는, 군생활 좀 잘하긴 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옛날 군대도 아니고, 이미 군대에 정이 사라진지는 오래 되었고 - 내가 처음 들어갈때까지 우리 부대의 폐쇄적인 특성상 구타가 있긴 있었으나, 타부대는 구타나 욕같은게 사라진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후임들이 적어서 올리는 소원수리 - 우리는 데스노트라고 부르는 - 가 무서워서 후임들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고 아예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지금의 군대.
이미 되돌릴수 없이 망가져 버린 군대 환경속에서, 선임이 전역하는게 섭섭하다고 울어주는 후임녀석이 있다는건 그나마 군생활 조금 잘했다는게 아닌가 하고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행보관과 점심식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지긋지긋한 강원도 땅을 떠나왔다.
이해할수 없는 이유이건 어쨋건 간에 영창을 두번 다녀온 까닭에 15일 늦은 전역.
그리고 서울에 도착해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을때,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 아산병원으로 날았다.
약간의 부연설명을 하자면,
알다시피 경찰이셨던 아버지는, 일개 이파리경찰로 시작해서 오로지 진급시험을 통해서 - 인사진급 을 제외하고 - 무궁화두개를 다셨고, 그런 무서운 집념을 항상 나는 존경해 왔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살과 뼈를깍으면서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분의 몸이 너무 많이 상했던 까닭에 간염보균자였던 아버님의 몸은 엉망이 되고 말았고 결국 간경화 말기 까지 번졌다.
공교롭게도,
내가 군대를 들어간 뒤부터, 몸에 복수가 차서 배가 불러오고, 황달이오거나 정체불명의 열이 나는 등의 증상이 계속 되었고 그냥 놔두면 완치의 가능성이 없었다. 악화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의사의 말.
나는, 2년차 휴가때 홍대에 있던 내 오피스텔을 팔았다.
군대가기전 1년간 LG모러닝센터에서 강사하면서 벌었던 돈이 우현하게 모의드사 주식 산것과 맞물려 얻은 돈으로 샀던 내 유일한 부동산. 뭐 얼마 나오진 않았으나 돈땜빵은 어느정도 되었다.
문제는, 다른곳에 있었다.
나는 의사와 단독적으로 상의하고 간이식수술을 강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군대안에서 전화로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건강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있을까. 우리아버지는 어렸을적부터 너무 강했던 사람이었다. 오랜 투병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이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드는 나의 신.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는 나의 신이었고. 나 역시도 그 신이 차마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할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촉박하게 목을 졸랐고, 정체불명의 열과 계속 차오르는 복수는 아버지의 배속으로 차오르고 수치는 계속 올랐다.
나는 2년차 휴가때, 중국행 티켓을 얻었다.
내가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태어난 후로 지금까지 쭉 교회를 다녀온 까닭에, 잘 아는 교회의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고 - 종교인의 귀감이 될만한 그분은, 목회를 전도사에게 맏기고 아버지를 데리고 중국으로 날았다.
왜 중국인가.
중국에는 사형수들이 아직 많이 있다.
한국에서 간 기증을 받기라는건 사실 하늘에 별따기 수준으로 거의 기대할수가 없는 실정이고,
때문에 사형수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그들의 장기를 이식받는 방법이 있다.
도덕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포상휴가를 나온기간동안, 나는 내가 할수 있는 모든 편의를 다 마췄다.
그리고 휴가 복귀 한달후,
수술은 성공했다. 나는 실패할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아버지의 집념은, 병따위가 어찌할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년여간의 요양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나서 두번째 문제가 찾아왔다.
내가 군대를 가있는 동안,
집에서 유일하게 생활비를 버는것은 아버지의 몫이었으나,
병샐활로 인해 2년을 쉬셨고 수술비와 잡다한 병원비로 3억이 약간 넘는 돈을 사용하고나니.
이제 우리집에 모든 통장은 잔고가 제로였고,
있던집은 팔고 전세로 들어가고 다행히도 분양받은 아파트 하나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상황이 낙관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리 비관적이지도 않았다.
뭐, 전 글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대학생될때까지 오로지 외식한번 정말 한적 없었고
반지하 생활을 14년 - 옥탑 지하- 반지하 루트로 스무번 이상 옮겨다닌 생활을 해봤던 나로서는 지금의 삶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전역날,
수술휴유증으로 찾아오는 당뇨와 고혈압 그리고, 감염부위의 염증으로 짐작되는 알수 없는 열이 찾아왔고. 때문에 아버지는 공무원 병가 휴직기간인 1년이 지났기 때문에, 아픈몸으로 회사에 나가셨다가 결국 쓰려졌다.
이쯤에서 아버지가 입원하셨던 병원을 한번 살펴보자.
현대 아산병원은 서울에 위치하는데, 특히 장기이식분야에서 권위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뭐 특별히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입원시스템이 개같이 열악한 곳중에 하나인데 특히 응급실은 언제나 초만원 - 거의 들어갈 자리도 없다.
대부분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들어가는 자동문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환자를 눕히고 하루 이틀을 대기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때로는 4~5일까지도 앞에 대기해야 들어갈수 있다.
어머니는 쓰러진 아버지를 응급실 앞에 눕히고 2일간을 대기하신 상태였고, 내가 도착했을당시 열이 39.7 나는, 이정도 열나는 사람이 수액도 제대로 못맞는 현실에 대해 이해를 할수가 없었다.
때문에, 성격대로 응급실에서 깽판을 놨다.
응급실 앞의 세이프가드들과 30여분간 치고 받으니 그제서야 겨우 담당의사가 내려오는데 이새끼 꼬라지도 완전 가관이다.
생긴건, 오타쿠 도서관에 20년정도 삶아놓은 면상인데, 만나는 간호사들마다 싸움질. 왜 이새끼가 안내려왔는지 알것같았다. 하여간 그래도 담당의사라서, 이새끼 진단을 받아야 되니 하고 응급실에서 하루 대기 하고 3일간 밤을 꼬박샌 어머니를 집에 돌려보냈다.
이틀동안 담당의사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나뿐만아니라 아버지가 아픈데 이런 개같은 대우를 받으면, 누구라도 눈이 안돌아 갈수 없지 않나. 어릴적 불알친구들을 데리고 원장실로 찾아갔다가 뺀지를 먹고 이번엔 이식병동 연구실에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 했다.
백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열이 49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람이 입원을 안시켜 줘서 죽어간다. 살려달라고 반애원 반협박조로 이야기 하자 대충 알아듣는 눈치였다. 운좋게도 마침 이식병동에 2인실이 빈다고 하여서 바로 자리를 빼주었다.
입원 수속을 받고.
일단, 지금 전세집을 빼고 병원 가까운 곳으로 오피스텔을 하나 전세를 냈다.
집안물건들은 사촌형 트레일러에 처박고, 주요 물건만 챙겨서 이사를 했다.
친구녀석들이 도와주었고 때문에, 하루에 그나마 두세시간은 눈을 붙일수 있었다.
간이식은, 수술한다고 끝나는것이 아니라.
몸에서 거부반응이 없어져야지, 몸이 받아들이는 상태가 된다고 했다.
또, 이식 후에는 각 합병증이 올수 있는데 당뇨나 고혈압이 가장 잘오는 병들이다.
아버지는 또다시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고 했다. 최소 3000..
별수 없이, 잔돈이라도 벌어야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사가 끝나고 아버지 병간호를 어머님께 맡기고 풀타임 알바를 구하기 시작했다.
노가를 뛰고 싶었으나, 전역을 막한 상태라 아는 오야지 없이 일하기는 걱정됐고 한당정도 일반 알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넘어갈 생각이었다.
어짜피, 한달에 200을 뽑으려면 한가지로는 안되고, 시간당 알바보다는 원급제직원으로 들어가는게 빠른데 - 일단 술집부터 돌았다.
4~5군데를 돌고나서, 골목 어귀를 지났는데, 광고지 전단이 유난히 눈에 안뛰었다.
-_- 맞다. 신기하게 눈에 안뛰는 전단이 전봇대에 붙여져 있더라.
월 200/숙식제공/피씨방
어쨋거나, 구라던 진짜던, 쳐봐야 하는거 아닌가.
경쟁자를 막기 위해 전단지를 뜯어서 곱게 접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전단지가 네개정도 더 붙어있어서 그것도 떼었다. 상태를 보니 당일 붙인듯 했다.
대체 뭘까. 이곳.
월 200에 피씨방이라. 숙식까지 제공한다면 9시간 이상 알바..
일단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어짜피 첫패 받는건. 배팅비가 필요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