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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9)

말글눈 |2003.05.27 10:21
조회 523 |추천 0

9. 누드


신애 아버지에게 받은 코스모스 통신의 주식값은 한 달 평균 250원 가량씩 상승하고 있다. 코스모스는 광섬유를 생산하는 업체라고 한다. 문영은 광섬유라는 게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또 한번 대박이 터질 것만은 확실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점쟁이식으로 얘기하자면 이제 삼재가 끝나고 대운이 들어선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해서 문영은 화가로서도 성공 못하고 별다른 재주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 인간한테 공짜나 다름이 없는 주식이 대박을 터뜨려 주고 또 한번 대박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대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영은 일생일대의 이 대운을 마음껏 즐기기로 하였다. 그래서 운전면허를 딴 다음 그랜드체로키 지프를 한 대를 샀다. 그랜드체로키는 자그마치 5천만원이나 하는 대단히 비싼 차다. 거기다 미국차답게 휘발유도 엄청 잡아먹는다. 그 대신 힘이 좋고 고장이 없으면서 안전성이 뛰어난 차다. 국산차에도 갤로퍼나 코란도와 같은 성능 좋은 지프가 많이 있지만 문영은 무리를 해 가면서 미국차를 선택했다. 벼락부자의 허영심이나 자기 과시가 아니다. 미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달구지를 몰고 다니던 100년 전부터 자동차를 만들었던 나라다. 더구나 자동차는 생명과 직결돼 있는 물건이다. 애국심이나 비용에 상관없이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차가 가장 좋은 차인 것이다. 그 다음에 할일은 그랜드체로키를 몰고 전국 곳곳을 누비는 일이었다. 그 동안 못해 본 여행을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경치 좋은 곳에 오두막을 지을 만한 집터를 구하는 일이다. 문영은 주로 아직 포장이 되지 않은 깊은 산골을 찾아다녔다. 강변이나 바닷가가 더 운치는 있겠지만 되도록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주위사람들에게 구박만 받고 자랐기 때문에 사람이 싫은 것이다. 문영의 의사 친구는 그것을 대인기피증이라고 했다.
산골 마을에는 가는 곳마다 빈집들이 수두룩했다. 또 농사를 포기해서 잡초만 우거진 노는 땅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뚝 떨어져 있고 곁에 골짜기 물이 흐르면서 앞이 툭 트인 그런 명당자리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듬해 봄이 지나고 한여름이 될 때까지도 문영은 고독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가는 곳마다 새로운 경치를 구경하고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일에는 남다른 즐거움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그만큼 팔자가 좋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허전한 게 있다. 혼자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옆자리에 누가 같이 좀 있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경치를 구경하고 같이 음식과 술을 즐길 상대가 그리웠다. 며칠씩 돌아다니다 화실에 돌아오면 그 외로움이 더욱 절실하게 사무친다. 텅 빈 화실에는 이제 곰팡이 냄새가 떠돈다. 젊고 싱싱한 여자애들이 북적거리던 때가 그리워진다. 신애가 그리워진다. 한번쯤 찾아올 때도 됐는데 싶지만, 신애한테서는 전화 한 통화가 없다. 대학생활을 시작해 미팅이다 무어다 해서 한참 정신없이 빠쁠 때라고 이해는 하면서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오라는 신애는 소식도 없고 엉뚱하게 삼촌이 또 나타난다. 문영은 신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화진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매달 용돈을 부쳐 줘서 정말 고맙다.
삼촌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면서 눈치를 살핀다. 처음 만났을 때 큰소리를 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큰소리를 쳐 봐야 통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작전을 바꾼 것 같다. 문영의 짐작이 맞았다. 삼촌은 투자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자꾸 생활이 어렵다는 것만 강조한다. 또 숙모가 위궤양으로 고생하고 자신도 풍치 때문에 이빨 몇 개를 뽑아야 한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그래도 문영이 건성 대답만 하며 스케치를 계속하자 그만 포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짜 용건을 내놓는다.
숙모하고 나하고 병원에 좀 가 보려고 하는데 한 오십만원만 보태 줄 수 없겠니?
자존심이 상하는지 삼촌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불쌍하고 처량해서 문영은 순간적으로 한 백만원쯤 줘 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금방 마음이 바뀐다. 벌써 오래 전부터 이 인간을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의료보험 없어요?
보험이야 있지만 약값이 비싸서 말이다. 그리고 치과는 의료보험이 안 되잖아?
왜 안 돼요? 의치나 보철은 안 되지만 이빨을 뽑는 건 보험처리가 돼요. 의치는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해 넣으면 되구요.
문영은 삼촌에게 이십만원을 줘서 보냈다. 기분이 영 찜찜하다.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너무 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할 걸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어디 이민이라도 가기 전에는 피할 도리가 없는 일이다. 한 달에 오십만원씩 보내 주는 용돈은 물론 아예 인연을 끊어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갑자기 술 생각이 났다. 냉장고에는 맥주와 포도주밖에 없다. 문영은 밖에 나가 국산 양주를 한 병 사다가 그걸 마시면서 자정이 넘도록 신애의 초상화를 그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초상화에다 쏟아 부은 정성이 통했던 모양이다. 초상화가 거의 다 완성돼 갈 무렵 거짓말처럼 신애가 나타난 것이다. 문영은 허겁지겁 초상화를 치우고 초상화의 주인공을 맞아들였다. 신애는 양주 두 병과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왔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지만 입술에는 분홍색 루즈가 또렷했다. 마치 다른 데는 보지 말고 내 입술만 주목해다오 하는 것처럼 자극적이었다. 확실히 요즘 애들은 무얼 안다.
일찍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물어보지도 않고 양주병을 따면서 신애가 말했다.
무지하게 바빴지? 나 같은 촌뜨기도 입학하고 나서는 정신없이 바빴는데, 너 같은 미인이야 오죽하겠니?
어머, 절 미인이라고 생각하세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그래.
다른 사람들도 다 선생님처럼 생각한다면 좋겠네요.
그 동안 혹시 애인은 안 생겼니? 너 따라다니는 남학생들이 엄청 많을 걸?
많긴 한데, 사귈 만한 애는 하나도 없어요. 다들 엄마 젖을 먹다가 온 마마보이들 같아서요. 너무 유치해서 얘기 상대가 돼야 말이죠.
듣기 좋은 소리다. 좋아하는 애가 하나 생겼는데요 하고 나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염려를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 때문인지 갑자기 초상화를 보여 주고 싶어진다. 한 점이라도 점수를 더 따려는 남학생처럼. 그러다가 또 갑자기 마음이 바뀐다. 진짜 초상화를 그려 보고 싶다는 쪽으로 욕심이 생긴 것이다. 문영은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이번 가을 미술대전에 출품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래요? 이번엔 대상을 받든가, 최소한도 특선은 하셔야죠.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 초상화 쪽이 좋을 것 같아. 요즘 젊은 작가들은 관심을 안 가지는 분야거든.
왜요?
너무 정적이고 낡은 소재란 거지. 하지만 미술이란 게 원래 인체와 자연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했어. 그래서 얘긴데 신애 너, 내 모델 좀 해 줄 수 있겠니?
제가요? 이렇게 못 생긴 모델 써 가지고 대상을 받으실 수 있겠어요?
넌 니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니?
그럼요, 키도 작달막하고 가슴도 없고 히프도 없고 얼굴도 제멋대로 생겼으니까 못생긴 거죠.
니 얼굴이 왜 제멋대로 생겼어? 눈이 좀 과장되긴 했지만 균형이 잘 잡힌 얼굴이야. 화가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신애는 일주일에 한 번씩 편할 대로 와서 모델을 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는 당장 시작하자며 등나무의자를 끌어다 놓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거기다 대고 이러니저러니 잔소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문영은 얼른 20호짜리 캔버스를 꺼내다 놓고 숨가쁘게 스케치를 시작했다. 드디어 성공했다. 미술대전 출품까지는 아직도 4개월이나 남아 있다. 이 아이를 일주일에 한 번씩, 적어도 열여섯 번은 더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애는 다소곳이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영이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완벽하리만큼 훌륭한 연출을 하고 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꼼짝 않고 있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문영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선생님, 초상화는 아무래도 약하지 않아요? 기왕이면 누드가 어때요?
문영은 어리둥절했다.
누드? 누드가 초상화보다 강렬하기야 하지만, 난 니 초상화를 그려 보고 싶어.
제 누드는 어때요? 누드 모델로는 너무 약할까요?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팔등신이나 풍만하고 성숙한 여자보다는 저같이 빈약하고 엽기적인 누드가 작품성이 더 있을 거예요. 한번 해 봐요.
그러더니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진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다. 온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고 귓속에서는 윙 하는 이상한 소리가 울린다. 원래 좀 엉뚱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파격적일 줄은 몰랐다. 몸매는 빈약하지만 뽀얀 살결이 눈이 부시다.
이건 어때요?
신애는 책을 한 권 갖다가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앉더니 책을 펼쳐 든다. 다리 하나는 밑으로 내려뜨리고 또 하나는 무릎을 굽혀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 무성하지는 않지만 검정보다 갈색에 가까운 음모와 거무스름한 성기가 정면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제 막 복숭아만큼 솟아 오르기 시작한 젖가슴이 애처롭다. 목에서부터 팔과 다리까지도 가냘프기만 하다. 그 어디에서도 풍만한 여체라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신애의 말대로 엽기적인 누드인 것이다.
어때요, 이 정도면 됐어요?
문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럼, 시작하세요.
잠깐만, 나 화장실에 좀 갖다 와서.
문영은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 지퍼를 내렸다. 오줌이 마렵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빳빳하게 팽창해 있는 그 물건은 엉뚱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문영은 서둘러 자위를 끝냈다. 그리고 물을 내린 다음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남자의 욕정은 그래서 편리하다. 사정만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진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문영은 스케치를 시작했다.
이제는 신애의 알몸을 순수한 모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애의 연출은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다. 타고난 감각인 것 같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 때 신애가 시선은 여전히 책에다 둔 채 묻는다.
선생님, 아까 화장실에 가서 뭐 하고 오셨어요?
또 다시 숨이 턱 막히면서 얼굴이 화끈해진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텐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위행위하셨죠?
문영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도무지 할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부끄럽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자연스런 일이잖아요? 그걸 하고 나니까 이젠 잡념없이 그릴 수 있겠지요?
문영은 의자를 끌어다가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서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걸 다 망쳐 버렸나 싶으면서 귓속에서 다시 그 이상한 소리가 윙윙거린다.
선생님, 정말 괜찮다니까요. 잠깐 쉬었다가 할까요?
신애가 책에서 시선을 떼며 말한다. 문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렸다는 절망감, 그리고 가장 부끄러운 대목을 들켜 버렸다는 수치심 때문에 눈앞이 캄캄하다. 그런데 신애가 차분한 목소리로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시라니까요. 저도 가끔 자위행위를 하거든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 저렇게 순결하게 생긴 아이가 자위행위를 하다니. 아마도 선생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신애는 침착하게 이야기를 더 밀고 나간다.
선생님 학교 다닐 때는 그런 게 없었지만 저희들 때는 순결교육이라는 과목이 따로 있었어요. 여성과 남성의 신체 구조와 생리, 임신의 메커니즘, 성병…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죠. 결국 결론이 뭔지 아세요?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차라리 자위행위로 해결하라는 것이었어요. 임신을 하거나 성병에 걸렸을 때의 고통을 미리 예방하자는 거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간직하는 것은 아주 소중하다는 것을 배우는 거예요.
문영은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신애의 말이 크게 위안은 되었지만 앞으로는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제가 선생님을 착하고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에요. 제가 홀랑 벗고 무방비 상태로 있는데도 화장실에 가서 자위행위로 해결하는 바로 그 점 말예요. 얼마나 신사적인 행윈지 모르시겠어요? 다른 남자들 같으면 참지 못하고 그냥 덤벼들었을 거예요. 그러니 아무 생각 마시고 작품에 열중하세요.
문영은 용기를 내서 다시 캔버스 앞으로 가 연필을 들었다. 그러나 손이 떨려 도저히 그릴 수가 없다. 한숨과 함께 연필을 던져 버린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미안하다.
미안하긴요. 자연스런 일이잖아요? 다음 주에 다시 시작해요.
넌 괜찮겠니?
그럼요. 뭐가 달라진 게 있어요? 너무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라니까요. 모른 척하고 그냥 넘어갈 걸 그랬나?
아니야, 잘 지적해 줬어. 너하고 나 사이는 투명해야 하거든. 특히 작품을 만들 땐 말이야.
좋은 말씀이에요. 이제 옷을 입어도 돼요?
조금만 그대로 더 있어 주겠니? 보고 있으니까 눈이 너무 행복하다.
얼마든지요.
그러더니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리고 활짝 벌린다. 닫혀 있던 거무스름한 성기가 벌어지고 발그레한 속살이 살짝 드러난다. 정말 대담한 도발이다. 아니면 병적인 노출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영은 그만 눈을 돌린다. 그러자 신애가 웃음을 터뜨린다.
작품으로 보기에는 너무 야하죠? 혼자 살면서 화장실에 가 자위행위를 하는 선생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보세요. 실컷 보세요.
그만 해.
문영은 울음이 나올 것만 같다.
벌써부터 그렇게 마음 약하게 나오시면 안 되죠. 작품을 완성하자면 아직도 멀었는데.
그러면서 신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 10편에 계속..

사랑은 밀어내김과 당김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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