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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11)

말글눈 |2003.05.28 22:26
조회 441 |추천 0

11. 누드의 끝


발그레하게 술기가 오르기 시작한 신애의 얼굴은 이미 어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직도 성숙한 여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무엇을 허락할 것만 같은 매혹적인 표정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문영은 이 시간이 되도록 오래오래 계속되기만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널찍한 화실에는 두 사람뿐이고 마치 무슨 음모라도 진행되는 것처럼 적막이 감돈다. 누드를 제출한 다음 작품이 끝난 것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신애가 그 적막을 깬다.
이번 출품한 작품, 정말 맘에 드세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선택의 여지가 없지. 최선을 다 했고 작품은 이미 내 손을 떠났으니까.
하여튼 다시 한번 축하해요. 선생님 그 동안 애쓰신 거 제가 직접 같이 겪었으니까요.
모델이 너무나 훌륭해서 이번엔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신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꾸 그러지 마세요. 진짠 줄 알고 아예 직업모델로 나서면 어떡하시려구요.
그래선 안 되지. 넌 모델이 아니고 모델을 보면서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될 사람이니까.
이것은 문영이 실수한 대목이다. 문영은 이미 신애를 계속 더 만날 수 있는 핑계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처음에 그리려고 했던 초상화였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초상화 얘기를 꺼내자 신애가 딱 잘라 말했다.
전 화가가 될 사람이니까 그래선 안 된다면서요? 모델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해요. 그리고 점점 더 바빠지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시간 내는 것도 힘들더라구요. 하여튼 이번 누드 모델한 거 좋은 경험이었어요.
문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너무나 속이 보이는 소리를 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아 참, 내가 지금 충청북도 옥천에다 집을 짓고 있다는 얘기했던가?
집을 지어요? 어떤 집을요?
어떤 집은. 내가 그림도 그리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다가 죽을 집이지. 집을 다 짓게 되면 집들이를 할 건데 너도 참석할래?
물론 참석해야죠. 어떻게 생긴 집인지 보고 싶은데요.
초상화는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지만 다시 또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다. 신애가 묻는다.
선생님 그럼, 집도 장만하고 그랬으니 이제 결혼하실 건가요?
글쎄, 아직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럼, 언제 결혼할 건데요?
나도 모르지. 난 결혼상담소를 찾아가거나 중매로 하는 결혼은 딱 질색이야.
연애결혼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씀이네요?
물론이지. 난 아직도 그 환상을 못 버리고 있어. 꿈에도 그리던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나하고 맺어지는 환상 말이다. 아마 평생 못 버릴 거야.
그런 여자가 영영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독신으로 살다 죽는 거지, 뭐.
인생을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세요. 좋은 여자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아이들도 낳고 그럼 오죽 좋아요?
아마 내가 자라 온 환경 탓도 있을 거다. 어려서부터 너무 고생을 하고 사람들한테 학대를 당해서 대인기피증이 성격으로 자리잡았어.
하지만 저한텐 잘해 주셨잖아요? 아무 사심없이요. 다른 여자들하곤 그렇게 안 돼요?
넌 특별해.
어떻게 특별한데요?
아름답고 순결해.
그럼, 제가 프로포즈하면 저하고 결혼해 주실 거예요?
사람 놀리지 마라. 정말인 줄 알고 미쳐 버리면 책임질 거니?
신애가 웃음을 터뜨린다.
선생님은 역시 순진해요. 그리고 너무 용기가 없어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쯤 사랑을 고백해 볼 수도 있잖아요? 나이 차이 같은 게 무슨 문제가 돼요?
나이 차이가 문제가 아니고 나한테 니 행복을 가로막을 권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넌 아직 젊고 앞날이 창창해. 아마 지금쯤 너한테 반해 가지고 쫓아 다니는 남학생이 다섯 명도 넘을 걸? 그런 애들하고 어울려 청춘을 즐겨야 할 나이에 이 냄새나는 노총각 마누라로 들어앉아서 견딜 수 있을 것 같니?
그러니까 용기가 없다는 거예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 아녜요?
그만 해라, 자꾸 비참해진다.
신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싸악 가신다.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할 모양이다.
처음 누드를 시작했을 때 말예요.
응.
선생님, 화장실에 가서 자위행위하셨죠?
왜 또 그 얘기를…….
끝까지 들어 보세요. 그때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선생님이 얼마나 순진한지도 알게 됐구요. 전 그때 자진해서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어요. 선생님한테 흑심이 있었다면 저를 얼마든지 안아 볼 수도 있었는데 선생님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 고비를 넘기셨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 얘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가 뭐냐?
오늘 선생님하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힘들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아직도 절 원하신다면 지금 가지세요.
문영은 할말을 잊은 채 멍하니 신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 이상한 팔자다. 지금까지 관계를 가졌던 정숙이나 화영이나 모두 여자 쪽에서 먼저 유혹을 해 왔었다. 그런데 세 번째 여자라고 할 수 있는 이 아이마저 자기를 가지라고 한다. 남자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문영은 괴롭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넌 지금 순결하고 앞으로도 순결해야 돼. 이 세상 여자들이 모조리 더럽혀졌다고 해도 한 명쯤은 순결을 간직할 필요가 있잖니?
신애의 얼굴에 다시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오른다.
선생님은 순결에 대해서 참 전근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순결이란 더럽혀지기 위해서 있는 거고 처녀막이란 터지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제가 수녀예요? 제가 언제까지 순결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세요? 애인이 생기고 약혼자가 생기고 결혼을 해도 순결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말이다. 이건 내 신앙 같은 거야.
알았어요. 선생님 취미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죠, 뭐. 그 대신 마지막으로 제 누드를 다시 한번 보여 드릴게요. 이건 괜찮겠죠?
문영은 말문이 막힌 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부터 온몸에 열이 올라 입안이 바싹 말라 붙었기 때문이다. 신애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문영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이런 말이 있죠? 미인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가꾸고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선생님은 제 보잘것없는 엽기적인 누드를 알아주신 분이에요. 그래서 다시 보여 드리는 거예요.
신애가 알몸으로 눈앞에 서 있다. 침을 삼키려고 해도 바싹 마른 입안에는 이미 한 방울의 물기도 없다. 문영은 위스키 한 잔을 단숨에 마신다. 비로소 목구멍의 갈증이 가시는 것 같다. 그리고는 마치 리모콘에 의해서 움직이는 로봇처럼 일어나 신애의 나체에 다가갔다. 얼굴을 만져 보고, 목을 만져 보고, 젖가슴을 만져 보고, 배와 엉덩이를 만져 보고, 맨마지막으로 허벅지와 털이 보송보송한 사타구니를 만져 본다. 신애가 야트막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튼다. 그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사고가 일어난다. 문영이 신애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짐승처럼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 1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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