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애원
문영은 해쓱해진 얼굴을 하고 설계사무소 친구를 찾아갔다.
옥천 산장을 자네 앞으로 등기해 줄 수 있겠나?
그건 왜?
문영은 삼촌 얘기를 해 주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인간이 유일한 혈육이거든. 내 재산이 그 인간한테 넘어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다니? 자네 지금 암이라도 걸렸단 말인가?
그렇진 않지만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잖아? 거기다 그 인간이 경찰서 정보계장 출신이거든. 내 이름으로 등기를 해 놓으면 어떻게든지 찾아낼 거야. 그래서 부탁하는 거니까, 성가시겠지만 자네 이름 좀 빌려 줘. 물론 세금 같은 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리고 혹시 그 인간이 자네를 찾아오더라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 줘. 전화도 자네 앞으로 하고, 나는 완전히 실종자가 돼 버릴 테니까.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만, 남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 놓고 불안하지 않겠어? 내가 덜컥 팔아먹기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그 인간한테 넘어가는 것보다는 그 쪽이 훨씬 더 속 편해.
문영은 대지와 임야, 그리고 자동차까지도 친구 앞으로 등기를 옮겨 놓았다. 물론 주민등록도 서울에 그대로 두었다. 삼촌이라는 인간을 따돌리는 것은 물론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도피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제 채운산장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신애와 설계사무소 친구, 둘뿐인 셈이다. 마을사람들과 토굴에 산다는 몽석 스님이 있지만 그들은 문영의 이름 석 자도 모른다. 신애에 대한 마음도 정리가 됐으니 이제 꽁꽁 숨어서 자신만의 생활에 열중하면 된다. 벽돌 조각으로 갈겨 준 신애의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죽일 생각으로 힘껏 갈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처는 입었겠지만 별일은 없을 것이다. 또 형사가 찾아온다 해도 목격자가 없으니 굳세게 오리발만 내밀면 된다. 새벽녘에 산장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자 그대로 완전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신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은 굉장한 충격이다. 그것도 스커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을 정도로 진한 사이다. 그 남자아이의 뒤통수를 갈겨 준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신애를 잃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절망을 느낄 뿐이다.
그렇게 형사가 찾아올까 말까 조마조마하게 지내고 있는데 불쑥 몽석이 찾아왔다. 또 술 생각이 났나 보다 싶은데, 비닐 봉지에서 무엇을 한 주먹 꺼낸다.
산에서 캐 온 더덕입니다. 반찬이나 하시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해서 먹는 거지요?
더덕, 안 잡숴 봤소?
음식점 같은 데서 더러 먹어 보긴 했지만…….
음식점에서 내놓는 것은 밭에서 키운 양식 더덕이지요. 산더덕은 벌써 냄새가 다릅니다. 이렇게 칼로 긁어서 껍질을 벗겨 가지고 방망이로 팡팡 두들겨 넓적하게 펴 논 담에 고추장을 발라서 바삭바삭하게 구워 먹으면 기가 막히지요.
아, 그래요?
물기가 없이 바삭바삭하게 구워야 제 맛이 난다는 거 잊지 말아요. 그럼, 갑니다.
스님, 잠깐만요.
그래도 이웃이라고 찾아와 더덕을 나누어 주는 정이 고맙다. 그냥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다.
스님, 바쁜 일 없으시면 들어가 약주나 한잔하고 가시지요.
산중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있는 중이 바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럼, 들어가시지요.
술이 있습니까?
있으니까 모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거 번번이 신세가 많습니다.
사실 채운산장은 작은 술창고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산 마오타이와 공부가, 천진고량주에서부터 로얄살뤼트, 발렌타인, 조니워커, 문배주, 안동소주, 이강주 등 동서양의 이름난 술들이 빼꼭하다. 체로키 지프와 함께 이것은 문영이 돈을 아끼지 않는 두 가지 사치 가운데 하나다. 술을 꽤 즐기는 편이면서도 쓴 소주밖에 마실 수 없었던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다.
야, 이거 참 오랜만에 귀한 술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마오타이를 내놓자 몽석은 드러내 놓고 반색을 한다.
술 하면, 역시 중국 술이지요. 그 가운데서도 이 마오타이가 단연 군계일학이구요.
아니, 스님이 어떻게 그렇게 술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날 때부터 중이 어디 있습니까. 머리 깎기 전에 세상풍파 다 겪어 봐서 아는 거지요.
스님이 되신 지는 얼마나 됐는데요?
십년 다 돼 갑니다. 그래도 득도를 못 해 가지고 이렇게 토굴을 파고 들어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겁니다.
그럼, 사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다 오셨습니까?
중한테 지난 사연은 묻는 게 아닙니다. 가족도 친구도 모든 사연도 다 가슴속에 묻어 버리고 중이 되었으니까요.
스님 말씀 듣고 보니까 그렇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술을 마셔도 참선하는 데 지장은 없습니까?
계율 말이지요? 계율이라는 건 지붕 위에 올라갈 때 쓰는 사다리와 같은 겁니다. 지붕에 올라간 사람한테는 사다리가 필요없듯이,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사람한테는 계율이 필요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얘기다. 말이 되는 소리 같다.
몽석은 마오타이 한 병을 말끔하게 비운 다음 휘적휘적 토굴로 올라갔다.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일도 없고 술 취한 티도 내지 않는다. 원래 그런 건지 머리를 깎고 수양이 돼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산중에 들어와 쓸 만한 술친구를 하나 사귄 셈이다. 토굴이란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 그러자 졸음이 밀려 온다.
소파에 쓰러져 한잠 푹 자고 났더니 어느새 밤이다. 출출해서 요기를 좀 하긴 해야겠는데 먹을 것이 영 마땅치 않다. 냉장고에는 냉동시킨 고기와 젓갈 김치 따위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장을 보러 갔다온 지도 한참 되었다. 더덕을 구워 볼까 했지만 껍질을 벗기는 일이 성가시다. 결국은 라면으로 때우고 만다. 자취생활 20년에 아주 라면 체질로 굳어 버리고 만 것 같다. 요기를 하고 나니 또 술 생각이 난다. 이래선 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강주 한 병을 꺼내 온다. 도수는 높으면서도 배와 생강으로 담아 쓴 맛이 안 나는 술이다. 해장술로는 그만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서 술이 부쩍 늘었다. 여유가 생긴 탓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애 때문인 것 같다. 신애를 알고 나서부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애를 좋아하게 되고 나서부터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문영은 신애의 누드를 꺼내다 이젤에 걸어 놓고 그걸 보면서 술을 마셨다. 짜릿한 자극과 함께 멍한 슬픔 같은 것이 밀려 온다. 아직도 손바닥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허벅지와 음모의 촉감.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던 숨막히던 순간. 그리고 그 사랑스런 아이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 한 폭의 누드로 남아 있다. 술이 오를수록 자꾸 슬퍼진다. 그 아이와 좀더 오래 만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오로지 신애의 남자 친구라는 그 자식 때문이다. 그러자 울컥 화가 치민다. 스커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은 채 헐떡거리며 애무를 하던 생각을 하자 금방 미칠 것만 같다.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왔다 갔다 해 보지만 진정이 안 된다. 밖으로 나간다. 싸늘한 산공기가 밀려 온다. 솔바람이 지나가고 가까운 곳에서 소쩍새가 울고 있다. 꼭 자신의 처지만 같아 처량하기 그지없다. 좋아, 올라가서 한번만 더 만나 보자.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 이렇게 미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소쩍새는 밤새도록 울 작정인 모양이다.
문영은 지프를 옥천역 주차장에 세워 놓고 기차를 탔다. 복잡한 서울 거리에서 운전을 한다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다. 또 차를 산 다음부터 주로 시골로만 돌아다녀서 시내 운전에 자신도 없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문영은 그 생각으로 끝없이 괴로웠다. 여기서 그만두자. 아니다, 한번 만나 보고 나서 결정하자. 두 시간 동안 이렇게 변덕을 부리기를 열 번도 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고생과는 달리 결론은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신애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만나기를 거절해 버렸던 것이다.
만나서 무슨 얘길 해요? 전 선생님하고 할 얘기가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서로 자기 갈 길을 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충격이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어질어질 현기증까지 느껴진다. 뭐라고 할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 알았다.
겨우 한마디를 하고는 대합실 벤치에 가서 주저앉는다. 이제 서로 자기 갈 길을 가야 할 때가 되었다. 그 무정한 한마디를 듣자고 가슴을 설레면서 그 먼 길을 달려왔단 말인가. 정신이 들자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오른다.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나를 가져도 좋다고 했던 일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다던 맹세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끈끈하고 아슬아슬했던 그 많은 대화들은 무슨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화가 치민다. 이것은 심각한 모독이며 배신이다.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하루 아침에 이처럼 모질게 변덕을 부리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좋아, 니가 그렇게 마음이 변했다면 나도 과감하게 미련을 버린다. 그렇지만 한 번은 만나야 한다. 만나서 확실하게 대답을 들어 봐야 한다. 서로 만날 때야 우연이라고 하지만 끝장을 낼 때는 무언가 해명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인간 관계에서 서로 버릇 들여진 시간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문영은 곧장 택시를 타고 신애의 학교를 찾아갔다. 잘 가꾸어진 교정에는 늦가을 낙엽이 잔뜩 깔려 있는데, 아무 근심걱정 없어 보이는 젊은 아이들도 낙엽만큼이나 많아 보인다. 문영이 다녔던 캠퍼스 풍경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미대 건물로 가서 신애를 찾아내는 일은 조금도 어려울 게 없었다. 문영 자신도 미대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강의실 복도에서 만난 신애의 첫마디는 그렇게 퉁명스러울 수가 없다.
할 얘기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왜 찾아오셨어요?
넌 없을지 몰라도 난 할 얘기가 남았어.
그게 뭔데요?
어디 나가서 얘기 좀 하자.
다음 시간에 강의가 있어서 나갈 수 없어요.
멀리 가자는 게 아니고 요 앞에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잔 말이야.
그렇게 사정하다시피 해서 간신히 교정 잔디밭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막상 잔디밭에 마주 앉으니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그럴 것이다. 신애가 재촉을 한다.
빨리 말씀하세요, 강의에 들어가야 한단 말예요.
문영은 잠시 원망스러운 눈길로 신애를 보다가 어눌하게 말한다.
니가 갑자기 왜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게 있니?
잘못요? 저하고 선생님은 미술 교습으로 알게 된 사이예요. 그러니까 미술 교습이 끝난 다음에는 그만 놔 줘야 하는 거 아녜요? 보상도 충분히 받으셨잖아요?
보상도 충분히 받았다는 말에 울컥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난 지금 보상을 더 받기 위해서 널 만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그만 놔 달라는 소리는 또 뭐야? 내가 언제 널 붙들고 있었단 말이냐? 내가 너를 죽도록 사랑해서 목을 매달기라도 했단 말이야?
목을 매달 정도는 아니지만, 제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아요?
무슨 눈치?
선생님이 절 여자로 보기 시작한 거 말예요. 처음엔 그냥 제자로 귀엽게만 보다가 지금은 한 여자로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만나고 싶어하고 이렇게 학교까지 쫓아오게 된 거 아녜요? 제 말이 틀렸어요?
꼭 그렇다기 보다는…….
말꼬리가 흐려진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속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그만 울어 버리고 싶어진다. 신애가 마치 그런 입장에서 구원이라도 해 주듯 서둘러 마무리를 짓는다.
선생님이 절 아껴 주시는 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세요. 선생님하고 저하고 나이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카운트 펀치를 날린다.
선생님은 낭만적으로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한텐 징그럽기만 할 뿐이에요. 그리고 저한텐 이미 애인이 생겼단 말예요.
문영은 아무 할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