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 지혜네 거실
눈이를 안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지혜, 손엔 눈이 약봉투를 들고 있다. 슬리퍼를 신으며 눈이를 내려놓는다. 집안이 적막하다.
지혜 : (약간 불안히 안쪽을 향해) 엄..마...?
대답이 없자 지혜 방으로 들어서려다 거실 테이블에 놓인 신문이 눈에 띄자 피식 웃으며 걸어가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친다. 눈이가 발 아래 와서 낑낑대자 소파위에 올린다.
지혜: (무심한 표정으로 신문을 넘기다가) 눈아, 서울엔 계속 소나기가 온대, 시원하겠다, 여긴 너무 덥지?
눈이를 보자, 소파 한쪽에서 고개를 자꾸 끄덕이며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고 있다. 지혜 픽 웃다가, 원가 생각난 듯 소파 옆에 놓은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른다.
지혜: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지혠데요, 화영이 집에 있나요?
(낙담한 듯)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혜한테 전화왔었다고 좀 전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수화길 내려놓고 아예 엎드려 자고 있는 눈이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거실바닥을 응시한다.
화면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면서 거실시계가 클로즈업된다. 3시경이다. 다시 화면이 거실 정경을 다 비춘다. 아까와 똑같은 상황에서 지혜가 소파에 앉은 채 잠이 들어있다.
갑자기 눈이가 캉캉 짖는 소리에 지혜 억지로 눈을 뜬다.
눈이가 마당을 향해 난 거실창을 향해 심하게 짖어댄다. 지혜는 눈이를 끌어안고 창을 보는데 너무나 밝고 환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신비로운 빛 사이로 붉으스름한 작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지혜: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아니야, 눈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꿈이야, 짖지마.
곧 눈이가 짖느게 잠잠해지고, 지혜가 떨리듯 천천히 눈을 뜨자, 아까완 달리 창 밖으로 평상시처럼 마당이 펼쳐져 보인다. 그와 동시에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곧 엄마가 현관을 열쇠로 열고 들어서는데 손에 비닐봉투를 몇개 들고 있다.
엄마 : (지혜를 보고) 벌써 왔네? 눈인 괜찮데?
지혜: (지친 표정으로) 응, 엄만 어디 갔다와?
엄마: (거실로 올라와 슬리퍼를 신으며) 요앞 시장에서 반찬거리 좀 사왔지, 오늘은 너 좋아하는 두부찌개 끓여줄께, 있어, 사과나 하나 깍아먹자.
엄마 부엌으로 들어간다. 지혜가 눈일 안고 소파에 지쳐 쓰러지듯 앉아있는데 씽크대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온다. 곧 엄마가 쟁반에 사과와 칼을 담아 들고와 깍기 시작한다.
눈이가 소파에서 내려와 사과를 달라는 듯 엄마 옆에 가서 쳐다본다.
엄마 : (눈이를 보고 ) 기다려라, 좀. (사과 깍으며) 엄마, 벌써 이 동네 아줌마들이랑 친해졌다는 거 아닌, 요 옆집에 반장 아줌가가 같이 수영 다니자는데, (웃으며 지혜를 보다 놀라며) 아니, 너 얼굴이 왜그래? 어디 아픈거 아냐?
지혜: 아니, 괜찮은데.
엄마: 아프면 아프다고 좀 해, (걱정스럽게 보며 다짐하 듯) 너, 진짜 괜찮지?
지혜: (피곤한 듯 웃어보이며) 응, 괜찮다니까, 더워서 좀 지쳐서 그렇지머.
엄마: (안심한 듯) 그래, 이젠 너도 다 컸으니까. (사과를 달라고 낑낑대는 눈일 가리키며) 아휴, 얘 좀 봐라, 누가 자기 안줄까봐, (얇게 썰어준다) 눈이도 많이 먹으셔.
지혜, 엄마 사과 먹으려 아싹아싹 맛잇게 씹어먹는 눈이를 바라보며 웃는다.
# 벌써 환히 해가 뜬 이른 아침, 거실시계 6시 40분경
지혜가 마당으로 나와 대문쪽으로 간다. 신문이 대문 틈에 꽂혀져 있고 담밖을 살피지만 아무도 없다.
실망한 표정으로 우유와 신문을 들고 들어간다.
# 이른 아침, 거실시계 6시 20분경
똑같은 차림의 지혜가 마당으로 나온다.
이틀전과 똑같은 차림의 동진이가 대문옆에 기대서서 신문을 펼쳐 골똘히 읽고 있다.
매미가 벌써부터 시끄럽게 울어댄다.
지혜: (담너머로 동진이를 발견하곤) 저기요,
동진이가 고개를 들어 지혜를 보고는 급히 신문을 접는데 제대로 접히질 않는다.
동진: (구겨진 신문을 건네며 멋쩍은 듯 옆 나무를 올려다 본다) , 되게 시끄럽네.
지혜 아무렇지도 않은척 구겨진 신문을 받아 픽 웃는다.
동진이가 지혜를 한번 쓱 보곤 걸어간다.
화면이 위로 올라가며 골목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동진이는 성큼성큼 걸어가고 지혜는 담장 너머로 서서 바라본다.
# 낮, 동물병원 밖
지혜가 눈이를 안고 걸어온다.
# 동물병원 안
성숙하고 예쁜 미연이가 고모와 앉아서 얘길 나누고 있다.
지혜 : (문 열고 들어서며) 안녕하세요?
고모 : (반갑게 일어나며) 어, 어서와요, 지혜양, 넌이 왔니? 좀 나았나, 어쨌나?
미연과 지혜 서로 의식한 듯 쳐다본다.
지혜 : 거의 다 나은 거 같아요, 이제 잘 먹고요, 잠도 잘 자요.
고모 : 그래, 다행이네, 이리 눕혀보자, 어데 (이리저리 누이를 관찰하며) 진짜 다 낫네, 인쟈 약만 하루 더 먹으면 되겠다, (눈이를 들여다보며 아기 달래 듯) 그지? 우리 넌이 ?
눈이 아무 관심 없다는 듯 하품을 쩍 한다.
미연 : 아우, 진짜 귀엽다.
고모: (장난스럽게) 와, 니도 한번 만져볼래?
미연: (화들짝 뒤로 피하며) 아, 아니요, 됐어요, 그냥 볼래요,
고모: (미연이 모습에 씩 웃다가 생각난 듯) 참, 지혜양도 대구여고로 전학 온댔제? 고2 맞재?
지혜 : 네
고모: 봐라, 미연아, 이 학생도 설서 니네 학교 2학년으로 담 학기부터 전학올낀데, 인쟈 개학해서 보믄 아는 척도 서로 좀 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믄 되겟네.
미연: (약간 새침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이며) 네...예....
고모: 자, 이거 넌이 약, 다 나아도 또 놀러오라카이, 지혜양.
지혜: 네, 그럴께요, 안녕히 계세요, 눈아 인사해야지.
그러나 눈이 귀찮다는 듯 고갤 지혜품에 파 묻는다. 지혜 인사하고 뒤돌아 걸어나오는데, 뒤에서 미연이가 말을 잇는다.
미연: 근데 고모, 걘 왜그렇게 무뚝뚝해요?(한숨) 인젠 가끔 마주쳐도 아는 척도 잘 안해요.
고모: 와? 그라도 걔가 잔정이 억수로 많다.
지혜가 밖으로 나와 문을 닫자 소리가 끊긴다.
지혜 멍한 표정으로 다시 거리를 걸어간다. 맞은편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와 지혜와 스쳐지난다. 그 때 옆 골목에서 동진이가 걸어나오지만 사람들에 가려 지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동진이 동물병원 안으로 들어간다.
# 다시 동물병원 안
동진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미연이 얼굴이 환해지며 일어난다.
미연: (약간 수줍게 웃으며) 동진아, 왔어?
동진: (무표정하게 미연이를 보며) 왜 전화했어?
미연이 머뭇거리자 고모가 끼어든다.
고모: 이 자슥아, 소꼽친구끼리 전화도 하고 그러는기제, 말 하는 뽄새 하고는, 누가 경상도 사내 아니랄까봐(혀 찬다)
동진이는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떡 버티고 서서 아무 말 없다.
미연: 나, <XX문고>에 문제집하고 책 좀 사러 갈려고 하는데, 괜찮으면... 같이 갈래?
동진: 난 살 꺼 없어.
미연 애원하듯 고모를 본다.
고모: 아니다, 고모가 이 참에 니 용돈 좀 줄테니까, 니도 문제집 좀 좋은거 있음 사봐라.
동진: (귀찮은 듯) 꼭 오늘 가야돼?
미연: 니가 문제집 괜찮은 거 좀 골라줘,
동진: 나도 잘 몰라.
고모: 의대 갈 놈이 모르믄 누가 아노, ( 지갑에서 돈을 꺼내 동진이한테 내밀려) 퍼뜩 갔다와라.
동진이 고모에 떠밀려 미연이와 나간다.
# 붐비는 <XX문고>
지혜가 서서 책을 보고 있다. 옆으로 매는 작고 편평한 가방의 열린 틈으로 눈이가 살짝 고갤 내밀고 신기한 듯 여기저기 바쁘게 고개를 돌린다. 이번엔 문고 내에 있는 레코드점으로 간다.
# 레코드점 안
많은 사람들이 음반을 구경하고 있다.
지혜 천천히 걸으며 구경하다가 , 김광민의 피아노cd '보내지 못한 편지' 를 고른 후, 계산대를 향해 걸어간다. 그 때 앞쪽으로 동진이와 미연이가 함께 걸어온다. 지혜 바로 앞으로 걸어오는 둘을 발견하곤 엉겹결에 옆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고개를 숙인다. 매장 비치용 cd 가 저저로 플레이되기 시작한다. 지혜의 귀를 통해 김광민의 연주곡 '보내지 못한 편지' 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화면 가득 흐르는 가운에 동진이와 미연이가 지혜 곁을 스쳐 지나간다.
지혜 고개를 숙이고 음악을 듣는 척 하다가 천천히 고갤 돌려 그 둘을 바라본다. 둘은 가요 cd 진열대 앞에 멈춰서서 고르고 있다. 그러다가 동진이 뭐라고 하자 갑자기 미연이 웃음을 터뜨리며 매우 즐거워 보인다.
지혜 눈이 계속 동진이를 쫒는다. 잠시 후 사람들에 묻혀 동진이의 모습이 사라지자, 지혜는 다시 고갤 돌리고 슬픈 표정으로 이어폰을 내려 놓는다. 그 때 갑자기 요란한 복장의 지혜 또래 여자얘가 나타난다.
여자얘: ( 가방에서 고갤 내민 눈일 보며 호들갑스럽게) 어머, 얘좀 봐, 너무 귀엽다 !
(옆의 남자얠 치며) 야, 이 강아지 좀 봐, 진짜 이뿌지않냐?
남자얘 : ( 같이 호들갑스럽게) 와우, 진짜 구엽다, 구여워
여자얘: (지혤보고 친한 척 하며) 언니, 좀 안아봐도 되죠?
지혜 : (약간 당황한듯)아..네, 잠깐만요, 꺼내구요.
지혜가 가방 지퍼를 열려고 고갤 숙이자 여자얘가 지혜 뒤에 서있던 또다른 남자얘에게 눈짓을 한다. 그러자 그 남자얘가 지혜 베낭에 슬쩍 손을 댄다.
그 순간, 동진이가 남자얠 세차게 밀치며 나타난다.
동진 : (지혜 손을 꽉 잡고 끌어당기며) 뭐하냐, 그만 가자.
지혜 놀란 눈으로 동진이에게 이끌려 레코드점 매장 밖으로 나간다. 지혜가 골랐던 김광인의 cd는 플레이어 밑에 그냥 놓여져 있고, 소매치기들은 둘의 뒷모습에 낮게 욕지거리를 하곤 건들거리며 사라진다.
# 다시 문고 내
레코드점을 나와 문고 내의 책 진열대 사이를 아무말 없이 계속 걷다가 그제서야 동진이가 지혜의 손을 놓는다.
동진: 너,...(뭔가를 말하려다 멈추고)...저긴 강아지 데리고 들어오면 뭐라고 해.
지혜: (눈을 내리깔며 ) 몰랐어.
동진: 친구가 기다려서,..간다. (가려다 말고) 여긴 소매치기도 있으니까 조심해라.
동진이가 가자 지혜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반대편으로 사람 사이를 헤치며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