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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수염] 사랑 밀어내기 (21)

말글눈 |2003.05.31 01:04
조회 381 |추천 0

21. 납치

 

 


밤 9시 반쯤.
신애는 여느 때처럼 집 앞에서 택시를 내린다. 저만큼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인다. 골목길에 승용차가 서 있는 건 늘상 보아 온 일이지만 오늘 따라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이상한 느낌은 바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대문 앞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뒤에서 어떤 억센 손이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신애는 입을 틀어막힌 채 주르르 검은 승용차까지 끌려간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또 한 사람이 신애의 입에다 재빨리 테이프를 붙인다. 차는 금방 출발했다. 신애를 끌고 왔던 사내가 신애의 손과 발을 테이프로 단단히 묶어 버리더니 바닥에 처박는다. 도대체 말 한마디가 없다. 신애는 바닥에 엎드린 채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만 보던 납치라는 것이구나. 몸값으로 얼마나 요구할까. 1억? 2억? 아버지의 재력으로 보아 하루이틀 새 이삼억 정도는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없는 범인들이 과연 자신을 무사히 보내 줄 것인가. 아버지는 경찰에 연락을 할까 안 할까. 경찰에 알리는 날엔 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영화에서는 범인들이 흔히 그런 협박을 한다. 아버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신애는 문영이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차는 섰다 달렸다를 반복하면서 한 시간쯤 달리더니 덜컹덜컹 하는 비포장도로에 들어섰다. 그리고 한 십분쯤 지나 멈춰 선다. 신애가 차에서 끌려 나온 곳은 공사를 하다 만 널찍한 공터였다. 두 사내는 신애를 마치 인형처럼 가볍게 들어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차에 옮겨 실었다. 신애는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이 문영의 지프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앞 좌석과 뒷 좌석 사이의 바닥에 엎드려 누운 채 신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본격적인 유괴범이 아니고 문영이라면 별다른 위험은 없는 셈이다. 사랑과 질투에 눈이 멀어 사람들을 시켜 자신을 납치한 사내. 얼마나 낭만적인가. 아마도 며칠 동안 가둬 놓고 싫증이 나도록 섹스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강요할 것이다. 두 가지 다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다. 섹스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선생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우리 결혼하자, 이렇게 꼬드기면 안 넘어갈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집에서야 걱정이 태산 같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지 문영의 비위를 맞추어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자포자기에 빠진 문영에게 칼부림을 당해 목숨을 잃는 수도 생길 것이다. 신경정신과에 가 봐라, 경찰에 신고하겠다, 그런 소리를 듣고 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애는 비로소 자신이 너무 심했다고 후회를 한다. 그러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이 엎지러진 물을 어떻게 주워 담느냐 하는 게 문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정하고 나자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문영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뿐이다. 도어를 여닫는 소리가 나자 신애는 끙끙거리며 돌아누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운전석에서 돌아앉아 이쪽을 들여다보는 문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둠 속이지만 신애는 문영의 타는 듯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시동을 걸더니 차가 출발했다. 보나 마나 옥천 산장으로 가겠지. 문득 문영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딸 같은 제자를 좋아하게 되어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차는 한 시간쯤을 달리더니 이윽고 속력을 낸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것 같다. 그때 핸드폰이 울린다. 신애의 핸드폰이다. 문영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좌석 너머로 신애의 몸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내더니 창밖으로 힘껏 던져 버린다. 한 가지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손만 묶여 있지 않았으면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 놓고 기회를 엿보는 건데 이미 늦어 버렸다. 아마 동호였을 것이다. 내일쯤이면 온 집안이 벌컥 뒤집어지고 동호도 자신을 찾아 온 시내를 헤매고 다닐 것이다. 문영이 과연 며칠 동안이나 붙들어 둘 것인지 그것이 문제다.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윽하게 바라보던 문영의 눈초리.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그 순진함. 누드를 그릴 때 화장실로 달려가 자위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의 순결을 지켜 주었던 다정함. 그리고 자신을 만나고 싶어 주위를 맴돌며 간절하게 매달리던 나날들……. 이 남자는 절대로 자신을 해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놀란 나머지 심신이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다. 차가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신애는 머리를 도어에 대고 안간힘을 쓴 끝에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소리를 질러 보지만 콧소리밖에 나오지 않고 그 소리는 덜컹거리는 찻소리에 묻혀 버린다. 신애는 운전석을 머리로 힘껏 들이받았다. 세 번째 가서야 반응이 온다. 문영이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본다. 신애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콧소리를 내자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어 준다.
오줌 마려워요! 금방 싸겠단 말예요!
신애가 소리를 지르자 문영은 잠깐 생각해 보더니 차분하게 말한다.
손을 풀어 줄 테니까 아무 짓도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요? 우선 오줌은 싸고 봐야 할 거 아녜요?
문영은 차에서 내려 뒤쪽으로 돌아오더니 신애의 손을 풀어 주었다.
발은요?
발은 안 돼. 이 깜깜한 데서 도망쳐 버리면 속수무책이니까.
발이 묶인 채 어떻게 오줌을 싸란 말예요?
팬티만 내리면 되는데 못할 거 뭐 있어.
문영은 신애를 번쩍 안아 길가에 내려놓았다.
저쪽으로 가요. 그렇게 버티고 서 있으면 오줌이 안 나오잖아요?
잔머리 굴리지 말고 빨리 볼일이나 봐.
그럼, 돌아서 있기라도 해요.
알았어.
문영이 돌아서자 신애는 창피를 무릅쓰고 시원하게 볼일을 보았다. 그리고 살그머니 발목의 테이프를 떼어 보려는데 날카롭게 찌익 소리가 난다.
잔머리 굴리지 말라고 그랬지?
신애는 다시 번쩍 들려 차에 태워졌다. 손도 다시 묶였다. 그러나 입은 가리지 않는다. 인적이 없는 곳이라 소리를 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신애가 물었다.
선생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문영은 대답 대신 액셀을 힘껏 밟는다. 차는 산길을 숨가쁘게 차고 올라간다. 신애는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차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질 판이다. 안 그래도 잔뜩 심기가 불편한 운전수를 자극해서 끔찍한 사고를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산장에 도착한다. 엔진을 끄자 귀가 멍할 정도의 고요가 밀려든다. 서울에서 납치되어 여기까지 실려온 것이 아주 오래 전 일만 같다. 문영이 차에서 내리더니 뒷문을 열고 화물칸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절그렁 절그렁 하는 쇳소리가 난다. 자세히 보니 쇠사슬이다. 신애는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장난이 아닌 것이다. 문영은 신애의 손과 발에 감겨 있는 테이프를 떼어내더니 한쪽 손목을 우악스럽게 꽉 잡은 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캄캄한 집안에는 으시시한 냉기가 감돈다. 문영이 신애를 벽난로 앞에 앉혀 놓고 섬뜩한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 얌전히 앉아 있어. 섣불리 움직였다간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알았어요.
불이 밝혀진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희미한 스탠드 불빛뿐이다. 납치범은 지금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싶은 것이다. 이어서 보일러를 올리고 벽난로에 불을 지핀다. 신애는 한기를 느끼며 벽난로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두 손을 펼친다. 옆에 앉아 문영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타오르는 불길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이제는 괜찮겠다 싶어 신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본다.
선생님, 이제부터 절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문영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나도 몰라.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절 여기까지 끌고 왔을 땐 목적이 있었을 거 아녜요?
문영이 비로소 신애를 돌아본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는 것 같다. 오싹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랑과 증오로 눈이 먼 이 남자를 자극하는 건 자살행위다. 어떻게든지 저 분노를 누그러뜨려 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래서 신애의 목소리는 내심의 공포와는 달리 자꾸 상냥해진다.
예?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세요. 궁금해 죽겠잖아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뭐든지 다 할 각오가 돼 있어요. 그러니까 절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지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러자 문영의 입에서 정말 무서운 소리가 떨어진다.
신애 넌 죽어야 돼.
신애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힌다. 자신의 잘못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오는 돼 있었지만 정말 죽인다는 소리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머리를 분주하게 굴려 본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새파란 청춘에 이런 식으로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어떻게든지 설득을 해서 이 남자로 하여금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신을 안아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눈치를 채게 해서는 안 된다.
제가 죽어야 된다구요? 그럼, 죽죠 뭐. 그런데 제가 죽은 담에 선생님은 어떻게 되는데요?
나도 같이 죽을 거다.
일이 점점 더 고약하게 꼬여 간다.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제가 그렇게 나쁜 앤가요? 죽을 만큼 나쁜 짓을 한 게 있어요?
있지.
그게 어떤 건지 설명 좀 해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 죽을 만큼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어요.
넌 애인도 있고 애인과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순결해. 그러니까 그 순결이 더 이상 오염되기 전에 죽어야 돼.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한 넌 자유롭지 못해. 나 역시 니가 살아 있는 한 포기하지 못하고 피가 마르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해. 우리 둘 다 죽어 버리면 그 모든 게 끝나는 거야.
그렇다면 제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단 말씀이네요?
없긴 왜 없어. 넌 내 믿음을 배반하고 내 순진함을 농락하고 나중에는 내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했어. 그래서 화가 나게 만들었어. 그것만으로도 넌 죽음을 피할 수 없어.
선생님을 무시하고 모욕해서 화가 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그 점에 관해서는 정말 사과드려요. 하지만 선생님이 절 괴롭힌 걸 생각해 봐요. 저도 제 인생이 있고 제 생각이 있고 제 생활이 있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제 생활에 끼어 들어와서 부당하게 간섭하고 괴롭혔잖아요? 선생님한테 그럴 만한 권리가 있나요?
권리는 없지만 누구를 좋아한다는 건 순전히 내 자유 의지야.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괴롭히는 자유까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 끝난 일이니까 더 이상 얘기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절그렁거리는 쇠사슬을 가져 왔다. 그 쇳소리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신애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한 그대로였다. 문영은 먼저 신애의 허리에 바싹 조여서 쇠사슬을 두르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5미터쯤 되는 반대쪽은 자신의 허리에 감더니 역시 자물쇠를 채웠다.
자, 이렇게 해서 우린 한몸이 된 거야. 이제부터 우린 항상 같이 움직여야 돼.
이렇게까지 하실 거 뭐 있어요. 이 깊은 산속에서 제가 도망쳐 봐야 어디로 가겠어요?
천만의 말씀. 여기서 10분만 뛰어 내려가면 사람 사는 동네가 나오거든. 자, 일어나서 날 따라 와.
문영이 쇠사슬을 질질 끌고 가면 신애가 두 손에 쇠사슬을 감아 쥔 채 따라간다. 그것은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문영은 진지했다. 주방에 가서 먹을 것과 술, 음료수 같은 것들을 챙기더니 다시 벽난로 앞으로 돌아와 앉는다.
자, 죽을 때 죽더라도 우선 배를 채우고 보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더라.
그러면서 잔을 채운다. 신애는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것으로 가장 어려운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잘하면 이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술을 마시게 해야 한다. 그것도 곯아떨어질 정도로 아주 많이. 신애는 병마개를 따고 잔을 채웠다.
정상적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선생님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축하해요.
신애는 문영의 잔에 자기 잔을 부딪친 다음 살짝 한 모금을 마신다. 술에는 자신이 있지만 지금은 조금씩 마시고 취하지 말아야 한다. 문영은 잔을 단숨에 비운다.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그러나 다시 잔을 채운 문영이 그 기대를 무참하게 깨 버린다.
너 지금, 너는 조금만 마시고 나를 취하게 만들어서 어떻게 해 볼 생각이지? 꿈도 꾸지 마. 넌 열쇠가 어디 있는 줄 모르잖아? 그렇다고 날 둘러메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신애는 화가 나서 단숨에 잔을 비워 버린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우며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아까 저는 아직도 순결하다고 그러셨는데 그럼, 어느 정도가 돼야 오염되는 거예요?
성욕의 노예가 되어 남녀간의 진실한 애정이나 인간관계를 망각하고 오로지 쾌락만 추구하게 되면 그게 바로 오염된 거야. 인간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거든.
그럼, 성욕을 아예 무시하거나 참고 이겨내면 그게 바로 순결한 건가요?
단순히 성욕의 문제가 아니야. 성욕 때문에 인간끼리의 신뢰, 의리, 애정이 무너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순결을 오염시키는 거야.
전 그럼, 벌써 오염이 되고도 남았는데요.
뭐?
선생님이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씀드릴 테니까 화 안 내겠다고 약속하세요.
문영은 어쩐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마지못해 대답한다.
약속하지.
전 동호라는 남자친구를 만나서 벌써 오래 전에 순결을 잃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문영은 충격을 받는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본인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황당하기만 하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곤혹스럽다. 그런데 신애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요즘은 일주일에 많으면 세 번, 적어도 두 번쯤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왜 그렇게 자주 관계를 갖는지 궁금하시죠?
문영은 뚫어지게 바라만 본다.
섹스가 좋아서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고상한 취미도 많죠. 음악, 미술, 문학, 스포츠… 심지어는 골프나 바둑 같은 것도 섹스보다는 고상한 취미로 쳐주죠. 하지만 섹스는 취미 차원이 아니에요. 그건 인간의 본질이에요. 마음껏 즐기고 되도록 많은 자손을 퍼뜨려라… 그래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구조가 섹스에 적합하도록 진화한 거 아니겠어요?
문영의 대꾸가 퉁명스럽다.
그래서?
제가 섹스를 좋아하는 건 제가 뭐 특별히 음탕한 여자라서 그런 게 아녜요. 전 그런 신체구조를 타고 난 것뿐이에요. 남자의 손길만 닿아도 징그럽다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하루라도 남자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는 여자도 있어요. 그런 여잘 색정광이라고 한대요. 하지만 그 여자 죄가 아니고 타고 나기를 그렇게 타고 난 걸 어떻게 하겠어요? 저도 되도록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그래서 사람들 눈치 보면서 여관 출입 안 하고 자유롭게 매일 밤 마음껏 즐기고 싶어요. 이래도 제가 아직 순결한가요? 아직도 오염이 안 됐어요?
아직은 순결하지. 내가 말하는 순결은 육체적인 기준이 아니야. 니가 아무리 섹스를 즐겨도 넌 정신적으론 아직 때묻지 않았어.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긴 한데 내가 니 작전에 말려들 거라고 착각하지 마. 너 지금, 내가 너한테 혐오감을 느껴 가지고 다 포기하고 풀어 줄 것을 기대하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야.
신애는 한숨을 쉰다. 눈치가 너무 빠르다. 그리고 일부러 자극적인 얘기를 꺼냈는데도 흥분하는 기색이 없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 남자의 처분에 맡기고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신애는 화가 나서 또 술을 따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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