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인四색 # 5
현의 생각
자신을 ‘단’이라 소개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이끈 곳은 건물 이층 중앙에 위치한 넓은 식당이다. 마치 임금님의 수라상처럼 커다란 식탁에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음식들로 즐비하다. 식탁의 맨 윗자리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의 신사가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앉아있다. 인자해 보이는 얼굴. 나지막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정중한 목례와 더불어 그는 내게 말을 건넨다.
“손님을 모시기에 너무 누추한 집이군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
본능적으로 고개를 약간 숙이긴 했지만 아직도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꿈을 꾸는 듯 했던 몽롱하던 기분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이며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굴까?
우의 생각
나는 전쟁고아다. 어린 나를 돌봐주고 아껴준 고마운 분이긴 하지만, 지금 나의 아버지는 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다. 6.25,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폭격. 그 소름 끼치는 소리. 축제에서 쏘아 올리는 대형폭죽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하지만 그보다 훨씬 날카로운 그 소리는 ‘꽝’ 하는 엄청난 굉음을 부르는 죽음의 소리이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짧디 짧은 유언을 기억한다.
“안 돼!”
그리곤 나를 아주 꼭…… 안아주셨다.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여기 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과 커다란 바위, 그리고 그 위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 보던 ‘악’이 있었다. 그때 악과 내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나는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억울하나?”
“……”
“힘이 없는 자는 죽는다.”
“엄마…… 아빠는?”
“죽었다.”
눈물이 슬픔을 기다려 주지 않은 것은 처음 이였다. 인상을 쓸 사이도, ‘으앙’ 하는 울음소리를 낼 여가도 없었다.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주르륵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우는 것을 한참이나 기다렸던 악은 나에게 말했다.
“죽는 것이 슬프다면, 너를 불로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분..노..분싸?”
“불로불사다……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단 뜻이다.”
분노분싸가 되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한 참 지나서야 안 것이지만, 그때 나는 엄마, 아빠가 죽었다고 해서 내게도 죽음이 찾아올까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물었다.
“엄마 아빠를.. 죽지 않게.. 그런 건 없어요?”
훌쩍거리며 묻는 나에게 악은 간단히 대답해 준다.
“죽기전이라면 모르지만, 죽은 후에는 방법이 없다.”
“으 앙~”
“하지만 네가 영원히 살다 보면 어머니,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지도 모르지……”
“… 정.. 말?”
“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럼 분노분싸… 해주세요……”
“불로불사다.”
“……”
순간 난 악의 얼굴에 떠오른 잔잔한 미소를 본 듯 했다. 악은 바위에서 내려와 내 바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얼굴을 마주 하고는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말을 건넸다.
“세상에 거저 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네가 원한다면, 너를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게 만들어 주겠지만, 너 역시 나를 위해 한 가지를 해야만 한다. 할 수 있겠니?”
“그게.. 뭔 대요?”
“차차 알게 될 거야…… 너의 이름은 ‘우’로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를 아버지로 불러라.”
그리곤 눈앞이 흐려졌다.
단의 생각
현을 만찬장으로 안내하면서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을 느낀다. 피는 우리 힘의 근원. 나를 만든 악은 나 이전에도 수천 수만의 피를 마셔댔다. 나를 만든 이후에도 피에 대한 절대적 굶주림을 가진 녀석은 손님들로부터 내가 더 많은 피를 마시는 것을 단 한번도 허락 치 않았다. 고로 힘으로 녀석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 하다. 내가 찾아낸 방법은 Lamed Wufniks – 라미드 우프닉스. 나의 희망이다. 귀여운 것.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던 야훼가 선량한 사람이 열만 되어도 멸하지 않는다고 말 한 것이 그들 탄생의 기원이라 한다. 세상에 36명 만이 존재하고 지극히 선한 존재이기에 물욕 없이 평생을 가난하게 사는 존재들이다. 자신이 라미드 우프닉스라는 것을 안 순간 그 자리에서 죽게 되며 그를 대체할 라미드 우프닉스는 탄생하게 된다. 세상이 신으로부터 멸망 당하는 것을 막아온 인간들 최후의 보루 격인 셈이다. 이층 맨 오른쪽 방, 고서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난 라미드 우프닉스가 실제 한다는 것을 발견해 냈고, 사십 년도 더 지나 우연히 ‘현’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서에 따르면 악마는 라미드 우프닉스의 선한 기운을 당해 낼 수 없기에 감히 그 근처에도 범접하지 못한다 했다. 그렇기에 라미드 우프닉스는 평생을 살면서도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 선함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라미드 우프닉스가 명을 다하여 죽는 것은 관계가 없으나 이를 임의로 죽이는 것은 죄악.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선한 존재를 죽인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다. 나는 녀석이 라미드 우프닉스를 죽이게 할 작정이다. 저주받은 악마의 힘을 지니고 사는 우리지만,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한 악마처럼 라미드 우프닉스를 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악마에게 받은 힘으로 극선의 존재를 죽인다면……? 오늘 나의 지루한 삶 동안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즐거운 볼거리가 생길지 또 모를 일이다. 능글능글한 녀석의 멘트가 오늘따라 조금은 귀엽게 보인다.
“손님을 모시기에 너무 누추한 집이군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악의 생각
오늘따라 단이 손님을 데려오는 시간이 조금은 길게 느껴진다. ‘또깍… 또깍…’ 분명히 오고 있지만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기분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신에게 버림 받은 존재. 저주 받은 괴물. 나와 나를 닮은 존재들을 칭하는 또 다른 수식어 들이다. 허나 내가 인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 역시 그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란 것이다. 근 오백 년은 되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것은. 나 역시 이 땅에 태어나 살았던 백성 이였다. 비록 종의 아들로 태어나 힘든 일만을 해야 했고, 천한 신분을 벗어 날 수 없는 ‘천 것’ 이였지만 나는 그때 나의 삶에 만족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인간들을 죽여왔던 내가 새삼 ‘살인은 죄다.’란 궤변을 늘어 놓진 못할 것이다. 고로 종이라는 이유로 나의 아버지를 매질로 죽이고 어머니를 열흘간 물 한 방울 주지 않은 채 옥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한 것을 죄라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나를 그대로 살려둔 것은 죄다. 나를 그대로 살려두고 내가 그들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의 오만은, “너의 목숨이라도 건진 것을 천행으로 알라!" 이렇게 지껄였던 그들의 패악을 내 감히 죄라 말한다. 목숨을 걸고 훔쳐 낸 대감마님의 금송아지를 이웃마을 용한 박수에게 던지며 난 복수의 길을 구했다.
“복수를 원하면 넌 영원히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돼!”
앙칼진 박수의 경고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했다.
“할겁니다. 하게 해 주세요.”
“어리.. 석은.. 놈.”
“무어라 하셔도 좋습니다. 이대론 억울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이대론 억울해서 살수도 없습니다. 영원히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건 지금도 매한가지 아닙니까!”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박수의 눈. 그러나 밤눈에도 무척이나 커 보였던 대갓집 황금송아지와 나의 모든 것을 건 부탁을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끼이익……’
만찬장의 문 열리는 소리가 단과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린다.
“손님을 모시기에 너무 누추한 집이군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익숙한 목례를 하며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난 손님을 영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