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대란, 사채의 덫, 케이블티비를 휩쓰는 제2금융권의 대출 광고들.... 돈이 없는 절박한 사람들을 점점 더 돈 없게 만드는 사회. 이곳은 나름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는 대한민국이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조금씩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소액신용대출이다. 최근 신문기사를 통해 몇 번 접했는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소액신용대출의 씨앗을 누가 심었는지, 이 책이 이야기해준다. 방글라데시의 유누스가 시작한 그라민 은행이 바로 그 시작! 대강 이름 정도만 듣고 알고 있었는데, 벌써 시작한지 몇 십 년이 흐르고 있는 사업이란다.
"대출도 기본권"이라는 생각과 함께, 공동체를 꾸려 신용을 담보하고, 돈을 퍼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돈을 퍼담을 수 있도록 도구를 쥐어주는 사업. 몇 십억 아니 몇 조원씩 원조를 받고 있으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에서 이런 사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게 사실은 놀랍다. 그랬기에 그 리더인 유누스가 대단해 보이는 것이고.
어쩌면 이런 생각은 놀라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식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던 이야기는 오래도록 있어온 잠언이 아닌가. 이것을 단순히 가족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작은 실험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기틀을 잡아나간 그 실천력이 지금의 성과를 이뤄낸 것이리라 생각한다.
소액신용대출은 언제나 은행업 이상의 일을 했다. 그라민재단의 의장 수잔 데이비스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가난한 여성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전략이다. 이 산업이 이제 막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나가려는 중요한 시점에서 최초의 목적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출은 수단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도 수단이다. 규모도 수단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가난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들의 꿈을 맘껏 펼치며 살 수 있도록 사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소액신용대출의 목적이다. - p11,12
책을 읽는 내내 방글라데시의 수많은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남편을 잃고 홀로 딸들을 키우며 행상을 하는 여인, 앓아 누운 남편을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하는 여인, 늘 하루에 두 끼만 먹다가 가끔은 하루에 세 끼도 먹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여인, 자신은 돌볼 새도 없이 동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돕고자 하는 여인…. 그들은 그저 집에서 애만 보던, 혹은 남편에게 맞고 살던, 길거리의 한 가운데로는 걷지 못하고 늘 곁길로만 걷던 그런 여인들이었으나 그라민은행을 통해 행상이든 암소키우기든 옷감짜기 등의 자기 일을 하며 자신의 가정을 경제적으로 자립시켜나갈 수 있었다.
그녀들이 세상과 만나기까지는 물론 유누스 직원들의 힘이 컸다.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서류를 검토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통보하는 것에만 익숙하던 그 시절 다른 은행들과 완전히 달랐다. 아래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은행은 어떻게 그렇게 높은 이자를 받죠?" 내가 물었다.
"첫째, 우리는 주마다 분할 상환금을 받아요. 둘째, 우리가 채무자들에게 직접 가요. 그리고 그들이 빌린 돈을 어떻게 쓰는지 감독하죠. (중략) 셋째, 우리는 약속을 지켜요. 우리는 3시에 만나기로 했다면 반드시 3시에 그곳에 있어요. 오늘 대출금을 지불할 거라고 말하면 반드시 오늘 지급하죠. 그리고 내일이 상환일이라면 내일 반드시 돈을 받아요." - p140
이런 많은 것들이 감동적이지만, 그보다도 이러한 모델 자체가 하나의 희망이 되어준다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라민은행을 세계 10억 인구라는 극빈자들의 빈곤탈출을 돕는 특별한 금융업 정도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라민은행은 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것을 보여주었다. 바로 첫째, 복잡한 사회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둘째, 그 해결책을 실행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셋째, 기업가 정신으로 비용 대비 효과를 고려해 실천하는 과정을 말이다. 그 과정은 방글라데시든 미국이든 어디에나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 p442
요즘의 여느 책들보다 살짝 두꺼운 이 책을 만원지하철 안에서 어렵게 무겁게 들고 읽으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현장에 답이 있고, 단순하게 생각할수록 진실에 가까우며, 행동을 했을 때야만 진짜 빛이 난다는 것. 알면서도 또 한번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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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합리적인 인간은 스스로 세상에 잘 적응하지만 비합리적인 인간은 세상을 자기에게 적응시키려 애쓴다. 따라서 모든 진보는 비합리적인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 조지 버나드 쇼
p38 결국 그라민은행은 자신을 이념 문제로 축소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그라민은행은 역사에서 선례가 없는 기관이다. 그라민은행은 비용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인 동시에 가난과 배고픔을 퇴치하기 위한 사회적 기업이다.
p72 국가의 가난을 우선시하는 생각은 실제로 개인이 겪는 가난의 실체를 가려왔다. 개인의 가난은 금방 이해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과정의 결과에 불과했다.
p73 결국 부는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꾸준하고 냉정하게 가난한 사람에게서 부자에게 흘러간다.
p78 누르자한이 말했다. "내가 적절한 시범 사례가 된다면 다른 여성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해도 그들을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는 되겠지요."
p144 유누스가 내게 말했다. "우리는 거슬러 흐르는 물이에요. 다른 은행들은 위를 보지만 우리는 아래를 봐요. 다른 은행들은 당신보고 자기들에게 오라고 하지요. 우리는 직접 채무자들에게 갑니다. 다른 은행들은 당신에게 소유권을 요구해요. 우리는 그것을 잊으라고 합니다. 다른 은행들은 당신에게 법률 문서에 서명하라고 하지요.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 그러면서 우리는 수백만 달러를 다룹니다. 다른 곳의 사업은 경험과 자격증을 요구해요. 우리는 그런 건 생각하지 말라고 하죠. 그리고 여성들은 돈을 버는 활동을 못 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여성들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대대로 여성들은 남자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말하라고 강요 받았어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함께 말하고 구호를 외쳐요."
p289 데토스는 유누스처럼 자본주의가 가난을 충분히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좌파들을 비판하면서 부의 부균형은 자유시장경제 체제 때문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빈곤'이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 체제를 가장 잘 이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p444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목적들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 "사회적인 책임의식이 있는 자본가 기업"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