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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을 기억하는 방법; '20세기 소년- 우라사와 나오키作'

배재희 |2009.09.08 15:46
조회 125 |추천 0

 

#1.

유년을 기억하는 방법들;

어린 시절의 '친구'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주인공 '켄지'의 '소소한 실수'같은 류의 설정은 사실 독자들에겐 꽤나 익숙한 형태의 서사다. '어디서 봤더라'하며 그리스 신화같은 신화 문헌을 뒤질 필요도 없다. 멀리볼 것 없이 올드보이 '오대수씨'의 그 하찮은 입방정을 떠올려보라. 시원찮은 실수나 무례함이 후일 인류를 멸망시킨다거나, 한 개인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류의 이야기는, 일종의 서사로서의 archytype이며 복수를 작품화 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이 즐겨 애용하는 모티브다. 물론 올드보이와 20세기 소년은 작품의 성격처럼 '상처'가 만든 보복의 스케일에서부터 상대가 안된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생애 초기인 유년기의 혼란스럽고 치기어린 기억들은 생각보다 삶 곳곳에 날선 가시로 남아있게 마련이라는 것.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보시라. 성인이 된 우리들의 세련되고 현명한 자기방어기술과는 다르게, 지난 유년의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불합리와 낯뜨거움과 실수의 하찮은 이야기들로 가득찬 존재였던가. 상처, 슬픔, 몽롱한 유아적 분노와 질투심. 한 인간이라는 소우주는 그 생애의 초기, 헐떡이는 '사상의 지평'(event horizon)으로부터 시린 상처와 노여움, 아픔을 에너지삼아 알껍질을 깬다. 생의 Big-bang과 함께 우리는 부화한다.

 

 #2.

부끄러움을 기억하는 방법; 전후세대와 디지털 시대의 사이, 6,70년대는 왜 중요한가.

'20세기 소년'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재미난 장치들을 살짝살짝 풀어놓곤 한다. '친구'가 몰락한 후, 2015년의 일본 아이들이 UN군들에게서 '쪼꼬렛'을 받아먹는 장면이라던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수도 도쿄에 빼곡하게 밀집한 낡은 기와집같은 장면들은 완벽할 정도로 전후 일본의 참상과 비슷하다. 즉 작가는 자꾸만 잊으려고만 하는 일본인들에게 불편하기 그지없는 '역사적 반복의 문제'를 꺼내어든다. 초인적 존재인 '친구'에 휘둘리는 일당독재의 전형적인 미래일본은 천황에 열광하던 전후 아버지세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모든 '반복'들의 근원에는 '반성의 부재'가 자리한다. 사실 이 작품의 핵심적 장치인 EXPO74의 모토인 '인류의 진보'와 '발전'같은 진부하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긍정적인 수사와 이미지들은, 전후 일본사회가 얼마나 쉽게 그들의 부끄러운 전체주의의 추억들을 잊어버렸는지를 웅변한다.

 

그리고 이는 6,70년대라는 20세기의 격동기를 보낸 일본의 중년들의 가치관이랄까 면모 따위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버블경제의 중심에서 전후 호황을 즐기느라 바빴던 일본에 비해, 서구의 국가들은 68혁명의 치열한 소용돌이를 애써 건너거나, 같은 동아시아의 한국 등은 군부독재의 억압속에서 민주주의의 미명을 열어젖히려 애태우고 있었다. 오직 일본만은 계속될 것 같던 버블경제의 달콤함 속에 '20세기 소년'의 주인공들 같은 일본의 중년들은 전후와 디지털 세대의 간극을 이어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망각해버렸다. 전체주의 문화에 반감이 덜한 일본사회의 고질적인 취약함은 바로 여기서 근간하는 것이니까.

 

#3.

장난을 끝내는 방법; '짜가의 짜가' 장난을 끝내고 마침내 '어른'이 되기.

우스꽝스런 미래군인 복장을 하곤 사람들을 쏴죽이는 지구방위군. 아동취향의 거대한 만국박람회 구조물같은, 작품속의 '친구'의 모든 업적들은 잔혹하고 몰상식하며 납득하기 힘든 놀이들일 뿐이다. 유년의 상처에 몰입해 마침내 인권, 생명, 민주주의 같은 어른들의 풍속적인 이야기들을 조롱하거나, 혹은 감흥을 느낄 정치 사회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그리고 마침내 이것들을 가지고 노는 위험한 '아이'로 커버린 '친구'. 그는 결코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누구도 쉽사리 정체를 눈치 챌 수 없는 '짜가'의 '짜가'로 살아가는, 요즘말로 존재감 없는, 평생에 걸친 숨바꼭질 놀이를 벌이게 된다. 켄지를 따라하는 '짜가' 후쿠베의 '짜가'. 그는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유아 상태에서 정신적 살해를 당한 'Re.Re.켄지' 버전이라고나 할까.

'주체'는 상처를 머금고 그럼에도 생을 부릅떠 알껍질을 깨면서 시작된다. 그 알껍질을 깨기란 얼마나 어렵고 긴긴 상처를 남기던가. 친구의 '광기'라는 것도 사실 문제의 첫 시작이었던 10원짜리 '장난감 뱃지'처럼 지극히 하찮고 작은 맹아에서 움틀지 않던가.

 

이 순간, 삶의 애처러움으로 생의 초반을 아프게 움트고 있는 뭇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아. 너의 아픔은 결코 혼자만의 것은 아니지. '상처'란 말야, 너에게도 나아에도 결코 진부할 수 없는 인류 모두의 '원초아'니까. 문득 '넥스트'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의 노랫말들을 떠올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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