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할머니는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 희생양"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기지촌 할머니 돌보는 평택 햇살센터 우순덕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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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3 16:09 (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방송
기사 내용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의 딸로 태어나 6.25전쟁 후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감당해야 했습니다.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 등 집안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우리의 큰 언니, 누나들이 있었습니다.
기지촌에서 숱한 고생을 겪어야 했던 이들은 주로 50대 후반에서 70대 후반까지의 여성들로, 노령이 된 지금은 돌아갈 고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해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대부분 혼자 살고 있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2002년 봄부터 평택 안정리로 내려가 할머니들을 돌보고 말벗이 되어주고 저마다 아픈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 햇살센터를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순덕 원장인데요, 벌써 5년이 넘었습니다.
감리교 신학대를 졸업한 우순덕 원장은 오로지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 객들을 보호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하는데요, 평택 햇살센터 우순덕 원장을 8월 23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삶의 그늘을 햇살로 수놓은 곳 ‘햇살센터’
▶ 정식명칭이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이고 줄여서 햇살센터인가요?
2002년 봄에 햇살센터로 우리가 명명을 했고 작년에 경기도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이름을 약간 바꾸어서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가 된 거예요.
▶ 시작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5년 지났습니다. 사단법인이 된 것은 작년 가을이고 할머니들과 만나기 시작한 것은 5년 됐어요.
▶ 장소가 정확하게 평택 어디에 있나요?
평택 K6 미군부대 근처에요. 옛날부터 죽 미군부대가 50년 넘게 있었어요.
▶ 지난번에 말썽이 많았던 평택 대추리와는 거리가 얼마나 먼가요?
5분~10분 거리밖에 안 돼요. 입구와 입구 사이인데 우리 안정리하고는 5분이고 조금 더 깊숙이 가면 10분 정도 걸리죠.
▶ 현재 기지촌 할머니들이 몇 분이나 살고 계세요?
60여 분이 계세요. 동두천이나 의정부 말고도 안정리에만 거주하시는 할머니들이에요.우리 할머니들의 자치조직이 있는데 ‘국화회’라고 해요. 할머니들끼리 경조사를 나누고 나라에서는 관여할 수 있는 체제이기도 해서, 예전부터 이 조직이 있었어요.옛날에는 아픈 사람이 있으면 1천 원씩 모으기도 했고 또 시에서는 조직의 대표들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 대부분 생활보호대상자, 어딜 가나 소외대상자
▶ 평택에서 대추리 사건도 있었지만 미군 기지를 이전한다고 해서 굉장히 시끄럽잖아요. 땅 값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나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국제화 중심도시라고 해서 나름대로 애쓰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우리 할머니들은 젊어서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셔서 그나마 단칸방에서 살 수가 있는데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것이 확실시되면서부터 그 지역에 돈 있는 사람이 와서 옛날 집을 사서 허물고 새로운 빌딩들을 2천여 가구 이상 짓고 있어요.그래서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재래식 집들이 없어지고 좋은 집들이 생기는데, 할머니들이 좋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은 안 되고 옛날 집들이 없어지니까 옛날에 5만원, 7만원, 8만원 내던 월세 값이 15만원, 17만원에 육박하고 있어요. 그러니 할머니들이 생계비 30여 만 원을 받아서 방 값 내고 전기수도세로 20여 만 원을 내면 생활하는 게 힘들죠.
▶ 할머니들은 모아놓은 돈은 전혀 없으신가요?
나름대로 조금은 있지만 없는 분들이 더 많아요. 클럽에 있던 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들만큼 모을 수 있는 형편은 안 되잖아요. 구조 자체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고요.그리고 할머니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자기관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 그러면 대부분이 생활보호대상자이신가요?
70% 정도가 대상자세요.
▶ 햇살센터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햇살센터에서는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이미용서비스를 해드리는데 어떤 할머니가 우시더라고요.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교회를 다니다가 상처를 받으셨대요. 그러면 찬송가 부르자고 해서 부른 게 계기가 돼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자’고 했더니 좋다고 하세요.그래서 2002년 가을부터 계속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죠. 1주일에 1번씩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매주 화요일마다 모이고 있어요.
▶ 몇 분 정도 참석을 하세요?
2,30명 정도 됩니다.
▶ 교회에 가서 어떤 상처를 받으신 건가요?
할머니들 얘기가 자기들은 어딜 가나 양동이에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진 느낌이라고 하세요. 그런데 여기에 오면 같은 처지이고 봉사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니까 편안하다고 말씀하세요.
◇ 애국자를 가장한 정부의 부추김도 한 몫 했어
▶ 위안부 할머니들은 강제로 끌려가서 희생을 당하신 거지만 이 분들은 그 당시에 강제는 아니지 않는가, 또 구조적인 문제라고 하더라도 돈도 모을 수가 있을 것 아닌가, 그걸 왜 사회나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우리가 1969년도에 닉슨 독트린이라고 해서 주한 미군들이 많이 감축이 되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의 정권은 미군들이 한국에 더 머물게 하기 위해서 기지가 있는 곳에 클럽을 만들고 그곳에서 여성들이 일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여성들이 깨끗하게 미군들에게 바쳐지도록 성병검사를 하는 보건소를 기지가 있는 곳마다 만들어서 유방에다가 성병 검진에서 오케이 받았다는 표를 달고 일을 했다고 해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인해서 미군이 오면서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그런 걸 요구했고, 또 그래야만이 머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당시의 정권은 우리나라가 힘든 때니까 여성들한테 가서 일하도록 부추겼죠. 그래서 한국과 미국의 정치적인 희생양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동맹 속의 섹스>라는 책을 캐서린 문 여사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는데, 그 책을 보나 작년에 라는 프로그램에서 기지촌 할머니, 그들에게 누가 낙인찍었나?, 또는 MBC에서 기지촌 역사를 다룬 2003년 2월 초에 나왔던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나 당시에 일했던 사람들, 기지촌 여성들과 어우러져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는 너희는 애국자다,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다, 민간외교관이라고 부추겼습니다.애국자라면 애국자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하는데 다른 독거노인들처럼 단지 그런 수준에 머물고 있고 기지가 안 온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기지이전으로 인해 할머니들이 머리 누울 쪽방마저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굉장히 안타까운 가운데 있습니다.
▶ 6,70년대 어렵고 힘든 그 시절에 기지촌은 굉장히 성황이었고, 오죽하면 ‘동네 개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 이런 얘기도 있겠어요. 실제로 기지촌 여성들이 거기서 나오는 물건으로 장사도 많이 했어요. 냉정하게 따져보면 돈 좀 벌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뭐하고 지금 쪽방마저 얻지 못하는가, 안타까운 반면 속상하기도 해요.
몸이 아프니까 병원비로 많이 쓰셨어요. 제가 여기에 와서 장례를
3번 치렀는데 그 중에 최할머니 같은 경우는 그 일을 하다가 나이가 들면 클럽에서 청소, 설거지를 하는데 몸이 아프니까 그만두시더라고요. 보통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잖아요. 우리 할머니들은 그런 면이 더 많으신 것 같아요.그래서 몸이 아프니까 병원비가 싸게 들기도 하지만 큰 수술비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MRI, 치과 등에 대해서는 혜택이 안 가요. 결국 병원비로 쓰시다가 아파서 세상을 떠나시는데 장례식조차 아무도 오지 않는 거죠.
▶ 우순덕 원장님은 어떻게 그 일을 하시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학교에서도 가르쳤고 감리교여성연합회 총무도 했고 또 남편 때문에 미국에서 잠시 지냈던 적도 있었고, 여러 가지 일을 했었어요.그러다가 뒤늦게 40대에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을 들어가서 여성복지에 대해 공부하면서 성매매에 대한 리포트를 쓰게 됐어요. 저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서울여성의 전화에서 자원봉사를 2년 넘게 했었는데 그 일도 중요한 이슈이기는 하지만 성매매 리포트를 쓰다 보니까 갈수록 이 일은 필요한 일이고 이쪽 분야 일이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2000년 가을에 위스콘신에서 국제 결혼한 여성들의 모임에 가서 일주일 정도 지내면서 기지가 있으면서 센터가 없는 곳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두루두루 기지 주변을 다녔는데 평택 안정리에 할머니는 계시는데 센터가 없다는 걸 발견했어요. 당시에 안정감리교회 임준철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고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려주시고 6,70여분 계시다고 하셔서 그러면 일은 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지금도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고 있어요. 1박을 하기도 하고.
◇ 한 줄기 햇살로 다가간 ‘마음 문 열기’
▶ 햇살센터를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사무실이 있는데 제가 감리교신학대학을 다니면서 등록금이 없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공부시켜주시면 이 땅의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는 서원기도를 했어요. 2학년 1학기 때는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녔는데 2학기 때 등록금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2학기 때 학교를 못 가고 당시 기숙사 사감이셨던 방순자 목사님께서 교회로 연락해서 오라고 하세요. 등록금 다 해놨으니까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전체장학금으로 2년을 공부했는데 2학년 겨울 방학 때 신림동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공부시켜 주시면 이 땅의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기도를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한테 그래요. 기도할 때 기도를 잘 해야 된다고요.(웃음)
2000년 가을부터 평택에 가서 일하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하필이면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느냐고 하다가 2002년 봄이 되니까 당신 인생의 사명이 그 일이라고 느껴진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해서 편안한 가운데 일을 시작했고 그 당시 저한테는 꿈과 열정과 기도밖에 없었어요.몇 십 만원 정도를 빌려서 반지하를 얻으려고 그 동네를 몇 바퀴 돌아다녔어요. 거기는 예나 지금이나 전세가 거의 없어요. 결국 월세는 감당하기 힘들어서 전세 1,200만 원짜리 15평 반지하를 얻었어요. 그걸 4월 초에 얻어서 5월 초에 입주를 했고 6월 초에 개원예배를 드렸어요. 한편으로는 안정감리교회에서 국화회 회원 명단을 받았어요.
▶ 처음부터 선뜻 다가오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사무실을 마련하고 또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에게 전화해서 사회복지사인데 커피 한 잔 주실 수 있으세요? 그랬더니 어떤 할머니는 너무 머리가 아파서 귀찮다고 하세요. 제가 스포츠마사지를 배워서 머리 시원하게 해드리겠다고 하고 할머니를 만났어요.그때 60이 좀 넘으셨는데, 할머니들을 만나려고 스포츠마사지를 배웠거든요. 두피 마사지부터 해드렸더니 머리도 안 감았다고 하세요. 괜찮다고 나중에 손 씻으면 된다고 해드렸더니 너무 시원하고 좋대요. 그렇게 한 분, 한 분 만났어요.
7월 초경에 그 중에 국화회 회장총무 할머니가 계시는데 친한 분들끼리 햇살센터로 오시라고 했더니 7,8분이 오셨어요. 떡국과 수박을 대접했는데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시더라고요. 또 한 번은 8월 10일 전후로 해서 전화를 돌렸더니 34명이 오셨어요. 앉을 자리가 없어서 등 기대고 붙이고 앉으셨어요. 어떤 분이 옷을 주셔서 할머님들께 다 나눠드리고 8월 말에 봉사하시는 분이 오셔서 이미용서비스를 했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김할머니가 우셔서 그 다음 주부터는 매주 월요일마다 예배가 시작된 거예요.
▶ 소외감을 많이 느끼시는 분들이라서 마음을 쉽게 안 여셨을 것 같아요.
어느 방송사에서 혼혈아를 둔 어머니를 소개해 달라고 해서 제가 정성을 들인 P할머니라고 계셔서 할머니, 혹시 인터뷰를 하는데 얼굴과 이름이 안 나가는데 인터뷰하시겠냐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한테 뭐가 돌아오느냐고 해요. 사회적인 인식을 높이는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낙인찍으려고 나가느냐고 P할머니가 원장인 저랑 싸웠다고 2,3달을 그러고 다니셨다고 다른 할머니들이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모일 때마다 그 할머니도 오게 해 달라고 같이 기도를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오셨어요. 그날따라 아들을 찾은 배 할머니라고 계셨는데 이 분이 기도를 잘 하시는 분이라 그동안 안 나오셨다가 나오신 P할머니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배 할머니가 기도하시면서 “우순덕 원장님이 눈물 뿌려 아들 찾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기도를 하시는 거예요. 기도가 끝나고 나서 P할머니가 눈물을 닦으시더라고요. 마음을 여신 거죠.
◇ 대부분 자녀 입양, “내가 성공해서 엄마 꼭 찾으러 올게”
▶ 그분들의 자녀들은 입양된 거예요?
입양을 많이 보냈어요. 또 애기가 없는 분도 계시고 낳지 못하는 분도 계시죠.
▶ 자식들은 서울에 있지 않고 다 나가있는 건가요?
나가 있는 분도 계시고 없는 분도 계세요.
▶ 아들을 찾으셨다는 배 할머니 이야기 좀 해주세요.
배 할머니는 아들을 6,7살 때 보냈는데 TV에서 엄마 찾는다고 하면 숨고 싶으셨대요. 엄마로써 한 게 뭐가 있나 하고요. 할머니 말씀으로는 그 당시에는 공산당이 쳐들어온다고, 그러면 혼혈아들을 먼저 못살게 굴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애미가 아들이 힘들게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보겠느냐고 해서 그 마을에서 입양을 많이 보냈다고 해요. 미국이라는 것은 알지만 자세한 주소는 모르죠. 그래서 아들을 보내고 나서 일주일 동안 내가 살아서 뭐 하나 싶어서 약도 먹었는데 누가 살려내셨대요. 애기 아빠하고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였고요. 그렇게 보내고 34년이 지났는데 어떤 할머니가 아들, 딸 찾는다고 했더니 배 할머니도 그럼 나도 아들 찾고 싶다고 하세요.
배 할머니가 숨이 차셔서 센터에 오시기 힘들어하세요. 그래서 제가 방문을 가서 핸드폰으로 입양기관을 추적했어요. 어느 단체를 통해서 할머니 아들이 입양된 걸 확인했고 관련 자료를 4월에 보냈어요. 그랬더니 5월 말에 아들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아들이 40살 가까이 됐죠.할머니가 너무 행복해 하시더라고요. 편지를 들고 오셔서 이것 보라고, 아들을 만난 듯 기뻐하셨어요.
▶ 아들을 만나셨어요?
그 해 12월에 왔어요.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며느리는 독일 계통의 미국사람이고 영어선생님이고 아들은 건축가이고 9살짜리 손자가 똑똑해요. 지금도 서로 전화로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할머니는 뭘 바라고 싶지 않으시데요. 그저 잘 커 주고 못해준 게 너무 미안하고 잘 사는 것을 봤으니까 됐다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세요.
▶ P할머니도 자식을 찾으시려고 하신 거잖아요. 찾으셨나요?
못 찾았어요. 한국에 있는 입양기관이 미국에 있는 입양기관한테 소식을 전했고 그 기관이 아들, 딸한테까지는 편지를 전달했는데 아들, 딸로부터 연락이 안 와서 마음고생을 하고 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닌가 하고요.당시에 9살과 10살 남매를 보냈는데, “엄마, 안정리를 떠나지 말어. 내가 꼭 성공해서 엄마 찾으러 올게.” 그래서 전화번호도 안 바꾸시고 살고 계세요.
▶ 다른 할머니들도 가족들과는 전혀 연락이 안 되시나요?
되시는 분들도 몇 분 계시지만 대부분은 연락을 끊고 사세요. 돈이 있을 때는 여러 가지 혜택을 나눠주었지만 만나서 동네에 알려지는 게 가문의 수치로 여겨지는 걸 감당하기가 어려운 거죠. 돈 벌어서 생활비를 부칠 때는 좋았는데 지금은 가난하고 아프고 하니까요. 아까 병원비라고 말씀드렸는데 병원비뿐만 아니라 동생들, 엄마 생활비를 갖다 주고 오빠, 동생 공부시키고, 당시에 사는 게 힘드니까 다 퍼 준 거죠.
▶ 기가 막힌 사연들을 갖고 계시는데 한두 분 정도 사연을 말씀해주세요.
어떤 분은 6.25 때 부모님을 잃어서 정말로 있을 곳이 없었대요. 그러던 중에 아는 언니가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시는데 그 집에 가면 그냥 재워주고 밥도 준다고 해서 언니 따라서 그 집에 갔대요. 언니가 하는 말이 내가 며칠 어디 다녀올 테니 여기서 지내라고 해서 언니가 올 때까지 며칠을 기다렸대요. 1주일, 2주일이 지나고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는데 그 와중에 백인, 흑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무서워서 아주머니한테 아는 언니도 없고 무서워서 가겠다고 했더니, 가기는 어딜 가냐, 네가 며칠 동안 여기서 먹고 잔 거 내놓으라고 하더래요. 돈이 어디 있어요. 없어서 거길 갔는데. 본인도 모르게 팔려 온 거죠.몇 날 며칠을 거부하다가 하루만 미군과 같이 잠을 자라는 요구에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건장한 남자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어느 날 하루 미국남자와 잠을 잔 것이 시작이었고 스스로 나는 이제 버린 몸이라는 감정과 더불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거죠.
▶ 그런 분들 중에서도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신 분도 있잖아요.
가신 분들도 계세요. 다시 돌아오신 분이 할머니들 중에 한 분 계시고요. 남편의 학대로 못 견디고 다시 오셔서 지금 이곳에 사세요. 말도 안통하고 하니까 위자료도 못 받고 돌아오신 거예요.
또 다른 할머니는 아이를 못 낳으셨어요. 그래서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다가 쫓겨나셨어요. 그래서 외삼촌이 소개한 미군부대 근처 식당에서 일하다가 미군을 만나서 아기도 생겼어요.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여자인데, 어느 날 아기를 끌어안고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와 남편 앞에서 내가 낳은 아기라고 젖을 먹였대요. 그러니 이 할머니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요. 물론 그 아기도 입양이 됐고요. 요즘 같으면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기를 못 낳으면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 이 분이 지금 77세인데 지금 살아 계세요.
◇ 가족조차 외면한 장례식...내 죽음인 것 같아 마음 아파 더 못 가
▶ 거기서 사시다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자녀랑 연락이 되면 모르지만 대부분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같이 살던 언니라든지 그 분들 외에 저와 읍사무소 직원과 기사, 이렇게 한 분의 장례식을 셋이 갔었어요. 화장장 장례식을 3번 치렀는데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어요.한 번은 읍사무소 직원이 바쁘다고, 제가 사회복지사니까 가서 잘 부탁한다고 해서 저랑 기사랑 둘이 갔어요. 당시에 제가 초창기라서 할머니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더니, 할머니들 마음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죽음이 내 죽음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서 더 쓰라리고 스산해서 발걸음이 못 떨어지시는 거예요. 마음은 아프지만 못 가시는 거죠.또 한 번은 저랑 기사랑 할머니 한 분이 동행했던 적도 있어요.
▶ 장례식 치르실 때 마음이 어떠셨어요?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죠.
▶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 보셨어요?
가족이 있는 분들이 없었어요. 장례식장에 제일 많이 왔던 게 5,6명이었어요. 친자매처럼 지내던 할머니가 계셔서 몇 분이랑 같이, 한 번은 이장님도 같이 가셨었어요.
▶ 편찮으시면 의료보험 혜택은 되는 건가요?
큰 수술을 해야 할 경우에는 그 수술비를 혼자서 감당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제가 갔을 때만 해도 3천 만 원인가 4천 만 원정도 있었는데 심장판막 수술을 하면서 천안의 단국대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술비 내야지, 같이 돕는 사람들한테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돈을 주고 감사표시를 하다 보니까 약값으로 다 날리고 지금은 돈이 없어요.
▶ 햇살센터를 운영하시면서 정말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으실 텐데, 현재 햇살센터에 가장 필요한 게 어떤 건가요?
미군기지가 다시 평택으로 안 오면 모르지만 평택으로 오기 때문에 안정리 주변의 주거현황이 새 건물과 옛날 재래식 건물이 공존하고 있거든요. 대추리 분들이 직접적인 피해자라면 우리 할머니들은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해서 그 집을 내놓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마을의 변화로 인해서 마음고생을 하고 계시잖아요. 옛날에 애국자라고, 민간외교관이라고 이야기를 했으면 그에 대한 나름의 보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한소리 운영위원회를 하면서 우리 할머니들을 미군 위안부라고 부르자고 했어요. 왜냐하면 일본과 관계된 할머니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인 희생양이라면 이 할머니들은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인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한소리 운영위원회에서 말하기를 기지촌 할머니라는 용어보다는 미군 위안부 할머니라고 이름을 붙여보자는 이야기도 같이 했어요. 이러한 정치적 맥락 속에서 우리나라 경제성장도 25%나 일으켰고 지역경제도 60%를 부양했다는 자료가 <동맹 속의 섹스>라는 책 속에 나타나있는데 그 당시에는 경제성장을 일으킨 애국자라고 일컬었다면 현재 주거문제로 마음고생을 하고 계신 것에 대한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세를 지급해주든지 할머니들에게 집을 빌려주든지 아니면 땅이라도 빌려주든지, 아무튼 할머니들이 사시는데 편히 사실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 꼭 평택이어야만 하나요?
할머니들에게 선택권을 드릴 수도 있죠. 그런데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기가 살던 고향을 못 벗어나는 특성이 있거든요.
◇ ‘순할 순, 큰 덕’ 이름처럼 살고 싶어
▶ 우순덕 원장님은 순할 순자, 덕 덕자를 쓰시는데 정말 이름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처음에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옛날 드라마에 순덕이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나중에는 제 이름을 좋아하기로 했어요. 순할 순, 큰 덕. 이름을 사랑하고 이름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고향은 어디세요?
서울이에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보통 분들이셨어요.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6남매 중의 제가 맏이에요.
▶ 학교 다니실 때 모범생이셨을 것 같은데 어떤 학생이셨어요?
착하고 온순하다는 말이 성적표에 늘 있었는데 나중에는 이런 말이 싫더라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일괄적으로 이런 말이 있는 게 싫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일의 책임자는 결단도 해야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도 해야 하고, 그런 면이 필요하더라고요.그래서 요즘은 나름대로 그런 면들이 일을 통해서 개발되어가고 있습니다.
▶ 어릴 때 누구랑 싸워보신 적 있으세요?
매번 지고 왔던 기억이 나요.(웃음)할 말을 못하고 집에 와서야 그때 이 말을 했어야 하는데 왜 못했을까 많이 그랬어요.
▶ 맏이로서의 책임감도 강하셨을 것 같아요.
그렇기도 한데 제 밑에 여동생이 있어요. 여동생이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잘 감당해주고 있어요.
◇ 가족의 열렬한 지지는 내 삶의 축복
▶ 어릴 때 장래희망이 뭐였어요?
여러 가지가 있었죠. 좋은 약을 개발하는 것도 생각했었고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가면서는 고등학교 때 김활란 박사님의 이야기를 설교 시간에 들었고 그 분에 대한 역사적 부정적인 평가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지만 그 분의 자화상이 저한테 와 닿아서 그런 기도도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그래서 신학대학교에 가신 거예요?
신학대학은 그 당시 목사님께서 소개를 해 주셔서 갔었고, 그렇다면 이런 일들을 신학대학을 통해서 공부를 하면서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27살에 했어요.
▶ 남편도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남편도 신학을 했죠. 지금 목사님이세요.
▶ 혹시 남편께서 어려운 여성들도 많은데 왜 기지촌 여성이냐고 하지는 않으셨어요?
미국에서 남편과 같이 공부를 했고 열린 생각으로 있었기 때문에 저보고 항상 하는 말인데요. 이런 자료는 다 컴퓨터와 씨름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 거 컴퓨터와 씨름하지 말고 라디오 인터뷰도 나가지 말고 그런 시간 있으면 할머니 한 분 더 만나서 손 잡아주고 웃고 하나님 나라 경험을 시켜드리는 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냐고 해요.(웃음)
▶ 혹시 일이나 성격 때문에 부부사움을 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부부싸움을 한 적은 있죠. 제가 일주일에 한 두 번은 평택에 있는 햇살센터에 가서 자야 하니까 제가 빚진 게 많잖아요.(웃음) 그래서 싸움을 잘 못 걸죠.
▶ 자제분은 어떻게 되세요?
아들 하나 있는데 지금 27살이에요.
▶ 아드님도 엄마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이해하고 도와주고 있나요?
춤 테라피로 할머니들 치료 프로그램을 할 때 강사랑 같이 와서 도우미 역할을 몇 차례 했었어요. 그래서 필요한 일이라고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 같아요.
▶ 그렇게 가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시는 걸 보면 우순덕 원장님이 축복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렇죠. 보통 아내나 엄마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일 때문에 비우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이 필요로 한다면 가서 열심히 하라고 해 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감사하죠.
▶ 할머니들의 사연을 들으시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함께 울어보신 적도 있으실 것 같아요. 갖고 오신 책 속에 어느 할머니가 인터뷰를 하셨는데 내용을 잠깐 소개할게요.‘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배운 것도 없고 똑똑하지도 못해서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재워주고 먹여주는 다방 술집 같은 일이었다. 나는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낳을 때 힘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나도 아이 아빠한테는 연락이 없고 주변 사람은 아이 혼자 키우면 뭐 하냐, 입양 보내라. 그래서 입양을 보냈다.’현재 할머니들의 가장 절절한 소원이 뭔가요?
건강하게 남은여생을 사시는 거죠. 주거의 불안 없이. 월세를 더 내라고 하면 힘드니까 그런 불안 없이 건강하게 사시는 게 소원이에요.
◇ “나 정말 행복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 현재 햇살센터에서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무일푼의 상태에서 할머니들과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면서 식사를 드릴 수 있었어요. 매주 화요일마다 모였고 작년에는 경기도 사회복지 공동모금에서 프로젝트를 받아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모였어요. 그 외에도 치과연계, 법률상담연계, 푸드뱅크에서 음식을 주시면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갖다드리기도 하는 푸드뱅크연계, 또 혼혈아동 프로그램, 지역의 어르신들을 가끔씩 모시고 있고 국내외 연계사업도 하고 있어요.앞으로 할머니들이 사시는 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사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 지원이 된다면 할머니들이 사실 수 있는 집이 되어서 “나 정말 행복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그래서 앞으로도 할머니들을 위해서 치료 프로그램과 예배를 같이 드리고 식사도 제공하고, 가능하면 일주일에 두 세 번이라도 같이 하면 좋겠는데 이건 정부에서 후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 여러 가지 일을 하시면 필요한 게 자금인데 어떻게 마련을 하세요?
제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선후배를 통해서 하고 있고 시아주머님도 목사님이셔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도 합니다. 그리고 이슈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나 개인의 후원금으로 지탱을 하고 있어요.
▶ 이런 기회에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031-618-5535입니다. 햇살을 ‘오오사모’합니다로 기억해 주세요.(웃음)작년에 저희가 소식지를 낼 때 평택 온정리가 평당 200만원 정도여서 200분의 1평이라도, 1만원이라도 후원해주셨으면 좋겠다 싶어서 ‘1만원 10만 명 운동’을 펼치고 있어요.일 자체가 많아서 발로 뛰어야 하는데 어디 후원해 달라는 말을 못 하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후원감사편지를 써서 영수증과 활동한 거 보내드리는 정도에 미치고 있습니다.저희가 CMS도 하고 있으니까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