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건 싫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나온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그들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경쟁하다가 처참히 나가떨어졌다. 사회주의의 실험은 실패했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품 속에서 태어난 복지국가가 사회주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형편이다.
제 2세계의 붕괴 이후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되고 있다. 세계화라는 슬로건 아래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사람 손 닿는 곳 어디에나 스며들고 있다. 한 세대 전에 세상을 움직였던 것은 이념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다.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며 어떤 사람들은 환호한다. 인간성의 말살, 빈부격차의 심화, 환경오염을 모두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리며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무너뜨려야 할 절대 악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 그 정 반대에서 자본주의의 미덕을 찬양하고 경쟁력과 효율성을 위해 더욱 더 자본주의 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어떠하던 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가까운 시일 내에 자본주의가 멸망하거나 소멸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갖는 논리와 시스템은 생각보다 단순치 않아서 생각보다 강력한 내구성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내구성과 생명력이 어떻건 간에 그것이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즉 비인간적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때려부수던지, 아니면 고치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 자본주의는 비인간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말한대로 무언가의 행동을 해야 한다. 선택지는 두개. 때려 부수던지, 아니면 고치던지.
이에 저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이 책은 목적이 다르다. 나는 사기업의 미덕을 설파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자유무역의 경이로움이나 정부개입의 부당함에 관한 단순 무쌍한 설교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자본주의 체제를 편치 않게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유지되고 있는 체제보다 더 나은 대안을 우리 손으로 마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 조지프 히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13쪽.
여기까지만 보면 여타의 책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저 한 좌파 지식인이 자본주의의 내구성을 인정하는 선에서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내보이는 책?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경제학을 중요시한다.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딸랑이들한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비판자들에게도 중요하다. 게다가 나는 자본주의의 비판자들이 경제학 공부를 게을리해왔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기 시대의 "주류"경제학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파악했지만,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좌파 내지 "급진적"이론가들은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 ... (중략)
이런 현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두 가지 결과가 초래된다. 첫째는 보수파가 자기들 견해의 근거로 내세우는 쓰레기 같은 논거를 대부분의 좌파들이 제대로 지적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중략)
좌파의 경제학적 무지가 부르는 두 번째 문제는, 의도는 좋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없거나 돕고자 하는 수혜자에게 실상 도움이 되지않는 정책을 만들고 선전하느라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사실이다.
- 조지프 히스, 위의 책, 13~14쪽.
저자는 이렇게 비판을 한다. 우파들의 잘못, 좌파들의 잘못, 그 어느 하나 넘기지 않고 사정없이 비판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언어는 철저히 논리적이고 그 논리는 매우 튼튼해서 쉽사리 반박할 수 없다. 더욱이 그는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모든 비판을 수행하면서도 경제학 비전공자의 이점을 살려 충분히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모순점을 하나하나씩 파헤쳐준다. 고등학교 경제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인 나 역시 때로는 깊게, 다시 읽으며 생각할 부분도 있었지만 무리없이 소화할만한 내용이었다. 즉, 난해한 경제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경제학에 입각한 합리적인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포스트잇을 수십개도 넘게 붙여가며. 그만큼 체크해둬야 할 부분, 기억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포스트잇을 붙인 모든 부분을 소개하지 않고는 못 배길것 같아서 가장 인상깊은 한 부분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공정무역 관련 문헌을 읽으면 땅주인, 로스트 업자, 중간 상인, 다국적 기업들이 커피 농민을 뻔뻔하게 착취하는 가슴 아픈 야기로 가득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 보다 커피가 1,000만 자루나 더 생산되는 상태라면 적절한 해결책은 생산을 중단하는 것이다.... (중략)
옥스팜과 기타 공정무역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선진국 소비자들이 생산자에게 커피 가격을 높게 지불해서 공급과잉을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증상만 슬쩍 완화시키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참혹할 정도로 어리석은 제안이다...(중략)
공정무역으로는 커피의 공급과잉이라는 근본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옥스팜은 자선적 가격 정책을 제안함과 동시에 "정부와 기업"이 커피 원두 500만 자루(예상 비용은 미화로 약 1억달러)를 구입해 폐기 처분할 것을 권고했다.
이게 바로 "원조가 아닌 무역"으로 초래된 결과의 적나라한 본모습이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금전적인 원조를 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누군가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농산물을 기르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필요도 없는 작물을 기르도록 물건 값을 지불한 뒤 구매한 물건을 폐기처분 하는 것이다.
- 조지프 히스, 위의 책, 205~206쪽.
이것은 일례에 불과하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받아들이기 싫은, 그러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 책 가득하다.
그래서 원하는게 뭐냐? 양비론이라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빠르고 간단한 해결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는 해피엔딩이 없다. 세상은 자본주의를 그렇게도 미워하고 의심하지만 자본주의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란 지독히도 어렵다. 지금까지 우리가 찾아낸 최선책은 일련의 개선안 및 그 밖에 또 어떤 개선이 가능할지 궁금할 때 필요한 지적 도구 몇 개 뿐이다. 근대 경제학의 가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발휘된다.
- 조지프 히스, 위의 책, 357쪽.
자본주의를 뒤엎으려든 자본주의 천국을 만들려든 일단 자본주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실 자본주의에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무얼 하려고 해도 어설픈 지식과 성급한 마음만 앞서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동안 우리가 어떤 오해를 해왔는지를 알기 위해. 더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위해.
저자의 말 대로 빠르고 간단한 해결책은 없다. 자본주의를 뒤엎는다고? 혁명? 말은 쉽다.
그러나 어떻게? 과연 자본주의보다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자본주의란 현실에서, 어떻게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