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물론 행복했던 기억.
한 사람이 완전한 내 편이 되었다는 환희의 순간. 매일 아침을 고역스런 순간으로 맞이하는 당신을 금요일 아침을 맞이하듯 가뿐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연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에 심장을 잃고 뛰어다녔던 연애 초기의 설렘. <500일의 썸머>를 보면서 이별의 슬픔보다는 연애가 줄 수 있는 삶의 에너지가 생각났다. 그건 내가 현재 사랑을 하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는 만남에서 이별까지의 과정이 날 이루는 훌륭한 부속품임을 느끼게 한다. 난 사랑하면서 커 왔으니까.
내가 어렸을 적엔 사랑이란 진지하다 못해 아주 슬픈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가벼운 사랑을 하는 날 탓했었다. 무지하게 가벼운 성적 호기심과 여자에 대한 환상이 뒤범벅된 학창시절의 사랑은 끔찍했고, 진지하게 사귀어보려던 친구들은 잔인하게 내게서 돌아섰다. 하지만 지금 와서 느끼는 바는 그 아이들과의 이야기들이 현재의 날 심심치 않게 한다는 점이다. 내가 추억할 수 있는 연애담은 언젠가 꿈속에서 미소 짓거나 울어버리게 하곤 했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내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고 같이 감탄사를 보낼 수 있었을까? 창밖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을 때 꺼내놓을 이야기 하나가 없다면 얼마나 슬플까. 내가 결론짓기에 연애란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내 감정이 풍부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언제나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깔깔 웃어대고 통곡하며 울어대며 내 감정을 모두 꺼내어 놓는 사랑은 건강하다. 그 당시의 죽을 것 같이 슬펐던 기억도 또 다른 사람을 통해 마치 사계절이 순환하듯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그 나쁜년이 너무나 그립지만 당신에겐 그 년보다 더 좋은 사랑을 하게 해줄 인연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녀와의 이야기는 한편의 소설처럼 당신의 추억에 저장된다. 이번 사랑은 꼭 성공하길 바라면서. 영화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랑도 결국엔 현재의 날 이만큼이나 성장시킨 약과 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500일의 썸머>에서 톰의 기억 속 그녀는 언제나 멋진 음악과 함께 등장한다. 톰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곡이 연주되고, 그 속에서 그녀는 톰과 추억을 연기한다. 이 영화에 성장영화의 냄새가 난다면 바로 그녀와의 기억을 추억하며 결국 미소 짓는 톰의 얼굴에 있다. 그리운 그녀와의 사랑했던 기억. 멋진 음악이 연주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각자의 추억에 잠기게 된다. She's like the wind. 음악이 나올 때 이 영화가 가장 멋져진다.
500일의 썸머엔 배우들이 특히 멋졌다. 내가 남자이다 보니 ‘드샤넬’의 목소리에 푹 빠졌다. 동양적인 모습도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내가 봤을 때 이번 영화로 국내 팬을 상당수 보유하게 될 것 같다.(물론 지금도 해프닝과 예스맨으로 그녀에 푹 빠진 분들이 상당하다.) 그녀의 크림치즈와 같은 고소한 목소리와 줄리아 로버츠보다 우월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행복해진다. 그리고 진짜는 바로 이 남자다. 조셉 고든-레빗. 박용우와 조규찬을 섞어놓은 듯 어눌한 무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는 무표정 속에 서로 다른 감정의 모습을 투영할 줄 아는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얼굴을 보면 기분 좋아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너무나 흔해빠진 로맨틱 코미디가 범람하는 죽은 멜로의 사회에서 <이터널 선샤인> 이후로 가장 상큼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만난 것 같다. 마치 수학공식처럼 정제된 이 시대의 사랑이야기는 더 이상 사랑을 이야기 하지 못했다. 나와 당신의 이야기는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은 아주 의외의 구석에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음악취향, 목 뒤의 점, 웃는 모습, 무릎의 모양까지.. 당신의 사랑을 구성하는 복합체는 규격화 할 수 없다. <500일의 썸머>를 보면서 독창적이라고 느꼈던 점은 이것이 이 세상에 하나뿐인 연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썸머는 하나뿐인 세계다. 그래서 21세기 버전 <애니홀>인 <500일의 썸머>는 로맨틱 코미디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한동안 단골 메뉴로 등장할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다. 비겁하게 이것저것 재고 싶지 않다. 현실이라는 무게에 짓눌리기 보다는 감정을 모두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길. <500일의 썸머>가 소중한 이유는 너무나 연애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하고 싶다. 이 영화를 모두가 보았으면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