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을 데낄라로 마감했다. 아직도 술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치 내몸이 석유를 뿜어내는 아랍의 사막처럼, 무한의 알콜이 샘솟는 구멍이라도 된 느낌이다. 이런 와중에도 지난 밤의 빌어먹을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먹색을 띈 하늘은 저녁부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후였을 지도 모른다. 내가 그 전날 '꽐라'의 상태였으니까. 어김없이 고교동창 A는 주말을 알리는 친절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정확하게 매주 여덟 시 쯤에 전화를 하며, 나와 함께 클럽을 가는 걸 사랑한다. 내가 지칠 때, 신날 때 구분없이 요구한다. 이 한없이 애뜻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온 내용은 응당 주말을 불태우자는 내용이었다. 또다른 맴버로 B가 있다. 녀석은 나랑 동네에서 10여 년을 함께한 녀석이다. 술, 게임, 여자, 운동, 여행 등을 같이 즐기며 때로는 진지한 고민을 나눴던 친구다. 물론 이런 걸 함께할 만한 사람은 어쩌면 많겠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B만한 사람은 드물었던 것같다. 뭐 아무튼, 우리는 늘 그랬듯이 그날 역시나 함께 모이자며 부산을 떨었다.
정확하게 토요일, B는 클럽이 조금 식상했는지 술이 고프다고 했다. 단 여자와 함께. A와 나는 성향 상 클럽이 매우 땡겼지만 그동안 쭉 달려온 탓에 지친 감도 있고, 그래서 그날은 별 수 없이 B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마침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특이한 '주' 씨 성을 쓰며, 적당한 화장에 스모키한 눈을 가진 스물 두 살의 그녀는 지난 목요일 H나이트 4번 룸에서 내 옆에 앉아있던 여자다. 나는 친구들과 약속을 정하는 와중에 번쩍하고 나타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때마침 친구들과 집 밖에 있다며 우리와의 만남에 적극적이었다. 대충 밤 열한 시 즘으로 약속을 정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A는 집에서 출발했고, 나는 우리집 앞으로 픽업하러 온 B의 차를 타고 출발했다. 비 내리는 주말 밤의 만남이 쉽게 결정되며 시작은 좋았지만, 불쾌한 사건의 씨앗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재미없는 축구시합의 스코어처럼, 우리는 4:4 였다. 그리고 첫 자리에서부터 이미 파트너는 정해져 있었다. 사귀는 것도, 그렇다고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스 주는 내 여자였다. 아마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지난밤 클럽의 룸에서도 내 옆에 있었고, 함께 적당한 리듬감으로 춤도 췄으니까. 몸놀림도 그럴싸하고 음악의 비트를 수용할 줄 아는 그녀의 직업은 바텐더다. 이날은 검정색 니트에 같은 색상의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이 꽤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여자라도 혈기가 왕성할 테니 무채색 톤의 옷으로 자신의 붉은 열정을 중화시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그냥 좋게 생각했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게임을 했다. 대학생 시절에 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너무 재미가 없어 술 맛이 떨어지는 수준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게임들만 골라 했다. 랜덤게임 랜덤게임 너 너 너, 뭐 이런 거. 참 다행스러운 건 삼육구는 안했다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의 알콜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껏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수준이 아니었다. 주방장이 직접 만든 이런저런 인스턴트 안주가 무슨 이름인지, 청하와 소주와 오백이 몇 대 몇의 비율로 테이블에 깔려 있는지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상석에 앉은 스물 여덟의 바Bar 매니저가 사용하던 게 최근에 신상으로 출시된 디올Dior 파우더라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 파트너에 대한 자연스러운 스킨십의 횟수는 점점 늘었다. 허리와 어깨를 감싸앉아 술을 마시고, 간혹 게임을 하다가 노끈 풀린 볕집처럼 머리가 산만해지면 손으로 잘 정리도 해줬다. 그렇게 시나브로 더욱 가까워지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마흔의 정신줄 놓은 어느 중년처럼 다리를 쓰다듬는 다던가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주점에서 파트너의 시간을 돈으로 지불하고 마시는 술맛 같을 테니까. 그런 건 내몸의 위로부터 토가 쏠려 올라오는 듯하니까.
그자리에 있던 여자 셋에 친구 A와 B 그리고 후배녀석 C까지, 나와 내 파트너의 관계에 의심하는 듯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들의 눈빛은, 오늘밤 달리고 새벽 즘에 그녀와 함께 잠을 자겠군, 이라는 자유해석을 약간 내비칠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와 한 침대에서 육체미 쇼를 할 생각은 없었다. 게이가 결코 아닌 나는 너무 희안하게도 그짓거리가 땡기질 않았다. 나는 오감말고 직감이란 게 참 발달했는데, 이상하게 그날 파트너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테이블 건너편의 A를 바라보는 눈빛, 특히 그와 함께 다트를 하며 그다지 불필요한 내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 직감은 맞아 떨어졌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A는 딱히 자신의 취향에 적합한 여자도 없었으니, 그 자리는 한여름의 그늘없는 아스팔트 같았을 거다. 게다가 내게 술도 사준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영 탐탁치 못하니 지출도 아쉬운 부분이었을 거다. 그래서 새벽 다섯 시가 되면 일어날 거라며 내게 말했다. 그런데 그가 정한 시간이 된 찰나, 내 파트너의 오버가 시작된 거다. 잠깐 무릎에 덮고 있었던 A의 캐주얼 셔츠로 입을 가리더니, 냄새가 좋다며 어떤 향수를 쓰냐며 게다가, 주기 싫다며 난리는 치는 거였다. 친구 A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향수따위 사용치 않았다고, 그냥 피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건 결코 피존의 향이 아니라며, 이 향은 원초적인 어떤 향이라며 완전 자기 취향이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A는 난처한 표정이 역력했고, B는 이건 뭔가 싶었으며 후배 C는 내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와중에 상석에 있던 매니저 언니라는 친구가 잠깐 거들먹거리며, 미X년, 왜그래. 정신줄 놓지마, 라며 질책했다. 그 장면은 불이 붙을 기미를 보였던 내 직감이라는 장작에 기름을 뿌리는 것과 같은 거였다.
말도 안되는 알콩달콩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정신줄 놓은 내 파트너는 A를 따라 술집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은 상상도 못한 반전이었다. B가 내게 말했다. A의 거절 못하는 모습에 실망스럽다, 라고. 시원스런 성격의 나는 A에게 말했다. A야, 이건 좀 아니잖아, 라고. 그러면서 난 B에게 말했다. 나쁘게 보지 말아줘. 너나 A나 내게는 둘도 없을 친구야. 너네 없으면 남은 친구도 별로 없어, 라고. 내 서운함을 알았는지 A는 다시 들어와 상황을 설명했다. 그 여자가 자기에게 자꾸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고, 자기는 데려다 줄 마음 없다며 자신을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와중에도 그녀는 땅바닥에 떨군 정신줄을 챙기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서있었다. 마치 '꽐라'가 된 마냥 네이티브 스피킹을 중얼거리며.
피곤한 A가 귀가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순간 사교의 매너란 동네 개나 줘버린 그녀도 가버렸다. 남은 우리는 술을 마셨다. 아니, 술이 우리를 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내몸이 포르말린 병에 담겨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나이트클럽에서 알게된 사람이었다지만, 적어도 여럿이 모여 함께 즐기는 자리에서, 이미 파트너라 공언된 술자리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며 가버릴 줄은 몰랐다. 바텐더라고 하길래 그래도 표면상의 교양은 갖췄겠지라고 생각했건만, 그건 내 오산이었다. 내가 A를 따라나서는 그녀를 보며 황당한 시선으로 멀뚱거릴 때, 매니저라는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가 아직 어리잖아요. 그러니 이해해야죠, 라고 내뱉던 말. 그래, 이해해야지. 근데 그건 당신들 수준의 생각이니 안드로메다에서나 그렇게 생각 하라지.
때로는 여자를 만나는 게 약간 귀찮은 정도로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날이면, 여자와 술을 푸느니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이나 가는 게 최고라는 확신이 선다. 적어도 우리집 개는, 공원에서 산책할 때 나말고 다른 사람에게 꼬리치며 침흘리며 달려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적어도 파트너를 존중하는 교양을 지켜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는 몰랐다. 물론 청춘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그냥 그녀는 그날 발정이 났었던 거겠지 싶었다. 아무튼, 그동안 살면서 이보다 더 역겨운 날은 없었다. 정말 대박이다.
PS
B는 술에 한껏 취한 날 집 앞에까지 모셔다줬다. 그리고 얼마 후 파트너 주 양에게 연락이 왔다. 난 됐다며 끊었고, 다시 걸려온 전화는 그냥 꺼버렸다. 집에서 지구의 자전을 느끼며 침대에 누워있었을 때, 이번에는 문자가 왔다. 내용은 대략, 오빠가 이렇게 하면 자기가 어떻게 A를 만나겠느냐, 였다. 거기에 내가 물었다. 키스의 의미가 무었이냐고. 그녀가 말했다. 그건 뽀뽀에요, 라고. 그래서 나는 말했다. 쿨하지 못해 미안해,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