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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 동생

나는, 눈뜨기 전에 선택한 그쪽 음원의 몸이
내 몸과 반대인 이성이라 알 수가 있었겠는가?
모든 아기는 자기 성별을 의식하지 않는다.
아기들은 소리의 방향들을 알고서
오직 방향들 사이에서 인격을 선택한다.
그리고 방향들은 누구나 둘이었다.


치우친다는 선택으로 한 쪽을 주요한 음원으로 기준하기는 하나
양 음원 사이의 수세적인 불균형성은
역시 마음에 불안정을 가져다준다.
비록 결과적으로 나는 부친의 쪽을 인격으로서 채택하였으나
모친의 모든 감정은 나의 바탕이 되어있다.
그 감정들에 간판을 달아주진 않으나
그것들은 언제나 내게 제동을 건다.
그것은 마치 정치의 여야 관계와 같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긍정적인 관점을 지향하며 말하려 했고
말하려 하는 내용은 항상 부정적 문제들이었다.
어떻게 혐오스런 것들을 긍정적인 수준에 끌어올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일환으로 성적자위도 했던 것이며 포르노도 보았다.
물론 성적인 문제들은 나로선 타인과의 사이에 일절 두지를 않는 것이나
워낙 사람을 싫어하는 나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평범하게 의식해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지금 난 물론 평범함이나 특별함을 구별하지도 않고 있으나
그건 어렸을 때엔 고민사항이었다.


어른들은 질서와 법을 빼고는 타인에게 별 관심 없지만
아이들은 서로가 특별함을 감시하고는 한다.
유독이 불행하여 보이는 나를 애들은 싫어했다.
질문을 혼자 무수히 하는 나에게 다른 애들은 항의했다.
이 점은 당연히 학교 교육에 문제있는 것이긴 하나.
매 수업마다 질문을 계속 해대는 애가 있다고 해서
왜 아이들이 기분나빠야 하는 것인가?
나는 감정적으로 살지 않았고
모든 감정바탕을 승화시켜 질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감정적으로 살았다면 그것은 물론 모친을 따른 것이겠으나
그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서 방탕스럼 자체인 어떤 정신을
언제인가 발견하였을 때에 난 이런 평가를 내렸음이 아닐까?
"이런 막 사는 동생같으니!"
나는 다스려가는 감정들을 이 자는 함부로 과장하니 그러하였다.
다스릴 감정들을 과장해 자랑함은 곧 방탕이다.
누구에 대고 어쩌려 과장하나 이 얘기이다.
감정은 어딘가에 담겨야 하고, 감정이 너무
커다란 경우에는 타인의 밥그릇도 위협을 한다.
타인의 몸이 감정에 치여 조기사망도 한다.
투척된 감정이란 일종의, 말하자면 에너지 폭탄이다.


때로는, 삶의 여유만만함으로 인해
감정을 과다 생산하기도 한다.
굶어라! 나아진다.
내 정작 배고픈 것은 그러한 잉여 감정은 아닌 것이다.


하여간에 차라리 나의 태초현실에 음원들이 셋이었다면
심한 불균형 탓에 조합이 깨질 지언정
과도하게 한 쪽이 피해를 보는 심각한 불균형은 없었을 게다.
음원이 둘이어서 그 사이 불균형들은
뚜렷하게 개념으로서 작용했다.
수세, 억압, 위선, 권력, 지배 ...
세 음원 조합이 깨진다면
뿔뿔이 흩어지지 않으면
서로 무탈한 방향들이 둘 남을 것이다.


인간 아니라 신을 개입시키면 된다.
천지창조 태초에 그러했듯
의식의 삼각형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순수해야 하겠고.
여기 순수함이란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이 없으라는 뜻이다.
그런 상태로 이제 새로운 창조물을 환영해달라.


다시 하여간, 어머니에 대해서 이미 이성이었던 나는
세계내 동일률이 아니라 세계 밖 동일률에 대해서
눈을 뜨고야 말았으니 이것은 겨우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 이전까지 그것을 위한 빈 자리만은
확실히 지켜오고 있었고, 바로 그 이름이란 이신理神이었다.
세계 밖 동일률은 다름이 아닌
세계를 통제하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신 너머
각개적 영혼들의 정화와 컴백홈을 애태워하며? 기다리는
사랑의 신으로서 어머니이다.
세계내에서는 신에게 심판받고
세계 밖에선 신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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