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왔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출근길이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하늘은 뿌옇고 날씨는 습하고, 버스에서 내려 회사까지 걷다보니 셔츠 안으로 축축함이 느껴졌다. 하루 시작부터가 불쾌했다. 그래도 나름 강남구 샐러리맨이니 오른 손에는 우산이, 반대편 손에는 별다방 모닝커피가 들려 있었다. 맛있게 마시지는 못했다. 우산때매.
< 사무실의 한 켠, 자신의 책상을 두고 골머리 돌려가는 게 가능하다는 건 일상의 행복이다 >
그래도 뿔난 기분을 누그러뜨릴 수(는) 있었다. 별 거 아닌데, 주말부터 어제까지 시도했던 전화가 연결되지 않은 채, 상대방으로부터 자기가 하겠다는 회신으로만 끝났고 이내 난 기대심리가 발동됐으니까. 그 전화가 오늘 저녁 즘이었다. 물론 (당연한 거지만) 지금 이걸 끄적이는 이 시간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뭐 괜찮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한두 번도 아니니, 익숙하다. 아무튼.
사무실에서의 오전은 꽤나 상콤했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는 거지만, 주간 조례 겸 일일 회의가 오전 여덟 시 반에 5층 회의실에서 있었고, 일주일(?)만에 뵙는 회사 분들의 얼굴이 너무 보송보송했으니까. 나까지 그런 얼굴이 된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알아들어 줄라나.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말하는 바이지만, 십오 분이면 마치는 회의를 이십 분만에 끝낸 후 나는 남자 직원분들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담배태우러 1층으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이건 내게 비로소 하루를 알리는 반복동작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그리고는 회사 정문 바로 옆, 흡연자만을 위한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남자 여럿 모여서 인공구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오, 경빈씨. 오늘 쌈빡한데?"
"..." (뭐가?)
"오, 경빈씨. 주말 뭐했어?"
"잤어요."
"오오, 누구랑?"
"탱자랑요."
"탱. 탱자?"
"애완견요."
"..."
'뻐꿈뻐꿈' (나라고 내 처지를 알겠수)
오전의 시작은 바쁘지 않았다. 같은 홍보실의 L씨에게 업무 몇 가지에 관해 인수인계하는 것, K선배님께 일에 필요한 기술을 전수받는 것 빼고는 특별한 게 없었다. 그렇게 흘러보내는 오전의 시간은 꽤나 빠르게 흘러갔다. 지하철 1번 승강장에서 내 쪽으로 달려와서는 '슝'하고 지나가는 전차를 여념없이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잽싸게 느껴졌다. 뭐, 내게는 물리적인 시간이 긍정적으로 소비되는 과정이었지만. 그렇게 그렇게, 열두 시 반 즘에는 청담동에서 내놓아라 하는 백반집에서 글로벌하게 미국산 제육볶음을 오천 원이나 주고 사먹었다. 맛있을 줄 알고 시켰다가 싸움날 뻔했다.
오후에는 신제품 촬영이 있어 탕비실에서 카메라와 놀아줬다. 그리고는 광고, 카달록, 사보, 홈페이지 등등등에 쓰일 용도이므로, 포토샵을 죽어라 했다. 그러다가 세시 쯤? 미국의 클래리티사社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인터내셔널비즈니스 매니저, 진-크리스토퍼의 프리젠테이션이 있었다. (갑자기 외국어가 막 튀어나와서 단락정리가 안되는데) 그는 우리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역시 미국인스럽게 자사의 신제품인 렛캠RetCamIII에 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것도 쿨하게 결론부터 시작하며. 대략 그것이 세계의 관련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술의 장비라는 둥, 와중에 레이저로 망막을 쏴서 신생아부터 유아기의 조기망막증을 확인할 수 있다는 둥, 어서 우리회사의 홈페이지 하단에 자기 회사의 로고가 파트너십으로 등재되길 바란다는 등의 얘기를 알아듣기 어려운 '프랜치' 잉글리시로 설교해댔다. (헉헉헉) 다행스러운 건, 내 특유의 '초심'을 발휘하여 험난한 그 시간을 졸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도 나는, 나름 프리젠터 제이씨에게 "당신네 제품이 귀사를 통해 한국시장에 유통될 때, 시각홍보물을 통해 어떠한 점이 유저에게 어필되길 희망하는가"라고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하지 않았다. H부장님이 L차장님께 조용히 건내는 말을 옆에서 들었으니까.
"저거 이번에 우리가 들여올 O사社와 경쟁제품 아냐? 우리 아직 저거 어찌될 지 모르는 거지?"
"맞습니다."
내 자리로 돌아와 시계를 봤을 땐 대략 오후 다섯 시였다. 한 시간 반이면 퇴근일테니, 슬슬 눈치봐가며 홍보관련 제품사진을 보살피고 있었다. 내 느릿한 손동작에 뿔난 K선배는, "경빈씨, 오늘 야근할 계획인가봐?"라고 말했고,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이 좋아서 함께 하려구용". 안 통했다. 그래서 삼십 분 야근했다.
아무튼, 대략 횡설수설한 오늘의 노는 일상은 여기까지다. 많은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막상 적어내려가니 별 일 없었다. 지금 즘에서의 내 감성은 그냥 일상적인 하루였다는 거. 그나마 그게 위안거리다. 이렇지 못한 사람도,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데. 비록 하루살이 인생이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를 숨쉬며 내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나는 진심으로 햄볶는다. 팍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