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지휘관들의 당시 증언

망치 |2010.06.23 14:53
조회 167 |추천 0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당시 지휘관들의 증언
50년 6월 25일 미명, 적의 포격은 새벽 4시부터 개시되었다. 그러나 전면공세라고 판단된 것은 상오 7시께였다. "서부전선 서단 옹진반도 까치산에 포진하고 있었던 우리는 5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적 1개 여단의 침공을 받았다"고 당시  12중대장이었던 정규한 장군은 회상한다. 적정의 이상을 눈치챈 것은 6월 23일. 위장된 적 전차가 관측되었고 전에 없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지호지간에서 대치하고 있었던 적과 아군은 늘 메거폰을 통해 "처남" "매부"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23일께부터는 이쪽에서 말을 걸어도 무응답이었다는 것.
기사원문: 1973. 6. 22 [경향신문]

인천 상륙 작전…한국전을 증언한다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참패하고 있던 50년 7월 중순 일본 도쿄 사령부의 맥아더 원수는 적의 후방을 부술 작전을 구상했다. 바로 인천 상륙작전이었다. 인천의 장악은 서울탈환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이 전략에 대해 해군과 해병 전략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 해군 측은 인천항의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 최대인 32피트나 돼 간조 때는 해안 접근이 불가능함을 들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서울탈환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밀어붙이듯 결정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기사원문: 1986. 7. 12 [경향신문]

6.25 남침 소련서 직접 지시 '스탈린 극비 전문' 확인
암호 전문들 중에는 소련군사 고문단이 50년 5월 초 6.25전쟁 개시 작전계획을 작성, 인민군에 시달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주는 기밀문서가 포함돼 있어 6.25가 구소련의 사주에 따른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음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7.27 정전협정 체결 39주년을 맞은 27일 본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공산 세력이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들어간 50년 2월부터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공산군 측에 불리하게 기울기 시작한 같은 해 10월 사이 김일성은 스티코프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과 수차례 극비 암호전문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원문: 1992. 7. 27 [동아일보](네이버옛날신문)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