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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가'에 대한 가장 주관적인 고찰

 

 

 

 

* 한시간이나 썼던 글이 한순간의 잘못으로 사라졌다. 비통하다.

 

 

 나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문화생활을 영유하는 新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내게 뮤지컬과 연극과 같은 문화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미지의 생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비로소 대학에 들어가고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먹고 사는 자급자족이 가능해질 무렵. 이 전설 속의 동물과의 조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미지의 생물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문화적 충격은 콜라병을 든 부시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우선 무조건적인 수용이다. 보고 또 보고 시간과 공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지갑을 열어야 한다. 눈과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행동과 음악을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수용은 폐단을 낳는다. 그것은 주체의식의 상실이다. 이런 순간이 찾아올때 우리는 그동안의 자신을 되돌아 봐야한다. 그리고 그동안의 내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오던 모든 것들에 대해 반성을 해야한다.

 

 나는 상당히 냉정한 비평가(?)다. 씹을 때와 씹지 않을 때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뻑파 비평가이며 작품의 숨은 뜻과 장치들을 찾아내려는 외로운 도굴꾼이다. 그런 내게 지난 10년간 보았던 작품들은 상당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잔잔한 내 인생의 수면에 자갈 하나를 퐁당 하고 던져준 작품이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었다. 헌데 곰곰히 아니 곰곰히 생각할 것도 없이 딱! 하나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종이에 천번 '감동'이라는 글자를 써도 느끼지 못했던 심연의 감동을 이끌어준 작품. 몸이 먼저 반응하여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고 기도했던 작품. 그것은 바로 <사천가>였다.

 

 수 많은 뮤지컬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의 강점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뮤지컬들 속에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남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듣도 보도 못한 고양이들의 이야기나, 유명해지고 싶어서 미친 시카고의 어느 여자 이야기나, 자기 버린 남친 찾겠다고 법대 간 금발녀나 모두 남의 이야기다. (물론 국내 창작 뮤지컬도 많이 있겠으나 상대적으로 유명하고 우리 나라에서 흥행이 잘~ 된 작품을 예로 들었으니 양해 바란다.) 그것도 외국 사람과 동물의 이야기를 말이다. 외국어로 된 작품은 아무리 예쁘게 다듬고 세련되게 깎아도 결국은 외국어라는 언어 속에서만 그 진정한 의미가 부여되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잠깐 훔쳐서 볼 수는 있겠으나 진정 우리의 이야기로 체득화 할 수는 없다. 그라지엘라의 '메모리'가 아무리 구슬프다한들 내 마음 속 생기는 벽을 허물 수는 없다.

 

 유치한 생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사실이다. 칸트를 사랑하는 사람이 집에 앉아 하루 종일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하지만 그의 인식의 한계는 독일인이 하루 종일 읽은 <순수이성비판>의 이해에 비한다면 매우 편협한 이해일 수 밖에 없다. 독일어로 쓰여진 글을 우리 글화 시킨 그 내면에 번역자의 의도가 개입되고 그런 글은 분명 칸트가 쓴 <순수이성비판>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수많은 번역서를 읽고 그 숨을 뜻에 대해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는 냉정한 것이다. 그 언어의 습득을 이루지 않고서는 그들의 생각과 사상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 했다고 하더라도 그 문화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 또한 반쪽짜리 이해에 불과할 수 밖에는 없다. 결국 내가 진정으로 이해가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은 우리의 말과 글로 쓰여진 우리의 소리일 수 밖에 없다. 근데 그런 것이 있기는 했던가? 우리의 소리라... 혹시 트로트?

 

 우리에게는 판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판소리나 국악은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전통에 대한 우리의 관념 때문이다. 전통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것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온전히 지켜내야만 한다. 그래야 그것이 진정 우리의 것이다? 웃기는 소리다. 물론 전통을 있는 그래도 지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이 외면하는 우리의 것은 공허한 것이며 결국 소멸하고 말 것이다.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에 전통이라고 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국악의 세계화. 어느 뮤지션은 테레비에 나와 국악과 힙합을 접목시켜서 세계인이 부담스럽지 않게 국악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유치하다. 그런 것이 국악의 세계화인가? 이것저것 아무 것에나 우리의 소리를 넣어보자. 그럼 뭔가 하나는 건지겠지? 왜 판소리가 세계화 되어야 하는가? 내 나라, 내 민족이 본체만체 하고 있는 국악이 왜 세계화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세계인들이 쉽고 편하게 국악을 들어야 하는가? 국악은 세계화 시킬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위치를 정립해야한다. 양키 코쟁이 들이 이해를 하건 못하건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 우리의 소리이니 어디까지나 우리가 듣고 이해를 해야한다. 이해.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우선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정답은 지금. Now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조선시대 이몽룡과 춘향의 시시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인가? 지금의 이야기를 하자. 지금 관객석에서 웃고 떠드는 그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자.

 

 <사천가>는 앞서 말한 나의 관점에 비추어 봤을때 상당히 고차원적인 시도를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국악이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와 같은 국악의 현대화에 앞장 섰던 사람들도 있다. 물론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쉽게 다가가고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국악은 더 이상 전통의 사슬에 얽매인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사천가>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독일 작가의 희곡을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사천가>에는 외국이 없다. 주인공은 '얀센'도 '포돌스키'도 아니며 (물론 원작의 배경은 중국이니 중국사람이 나와야 하겠지만 - 원래 주인공은 '션테'라는 중국인이다.) 비올라 소리도 바이올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안에는 순덕이 있으며 견식이 있고 재수가 있다. 또한 북과 장구가 있으며 우리의 소리 판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 옆동네 사는 순돌이 아버지가 "아니, 그 얘기 들었어?"라고 시작하는 이야기와 같이 아무런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노래. 거기다 포효하는 타악기의 충동과 100년은 더 살았을 것 같은 '이자람' 누님의 구성진 소리는 상상 그 이상의 전율과 희열을 경험하게 해준다.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2008년 나는 이 공연을 보고 몇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속된 심장의 두근거림을 멈출 길이 없었다. 이토록 우리의 소리가 즐겁고 나의 심연을 휘저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나를 너무나도 기쁘게 해줬다. 그리고 2009년.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망할 병원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아 1년이란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2010년 7월 7일. 드디어 꽃은 피었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은 희열과 감동으로 바뀌었다. 너무나 행복한 두시간이었다. 벌써부터 내년이 기대되니 11일까지인 공연이 끝나기 전에 한번 더 봐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10년 후, 20년 후에 아이와 아내의 손을 잡고 공연장에 앉아 사천에 사는 순덕이의 삶을 들을 기회가 나에게도 내 아내에게도 내 아이들에게도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그러려면 일단 우리 자람누님의 건강이 우선일테니... "자람누나, 항상 건강하셔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또 작품얘기는 쪼금만하고 주저리 주저리 쓸데없는 이야기만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놨는데... 사실, 말은 별로 필요가 없다. 이런건 가서 봐야한다. 아직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꼭 공연을 관람 할 것을 그리고 봤던 이들에게는 다시 한번 공연관람을 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판소리는 살아있더라고 얘기해주세요.'

자람누님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판소리는 살아있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판소리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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