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에게 피살당한 이복희
만주의 여러 독립군 부대가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지도력과 용병술을 중심으로 뭉쳐 필승의 의지와 죽음을 각오한 결사항전으로 일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이룩했으나, 병력과 장비가 여전히 열세였기 때문에 수만명의 병력과 중화기(重火器)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벌일 수는 없었다.
김좌진 장군은 이제부터 일본군의 추격을 가급적이면 피하면서 전투력을 보존한 채 안전하게 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마찬가지로 소(蘇)·만(滿) 국경지대를 목표로 부대를 행군시켰다.
16세부터 50세까지의 연령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의 장병들인들 고향의 가족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고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도 고향에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동생 김동진의 생각도 나지만 워낙 먼거리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고 만주에 와서 우연한 인연으로 자신의 가족이 된 이복희가 머리에 떠오르면서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이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두고 온 처 이복희를 마음 속에 떠오른 김좌진 장군은 그녀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심복인 강인수(姜寅秀)를 찾아 은밀히 지시했다.
“내 개인의 사정이지만 나를 위해 수고해주실 수 있겠지요?”
강인수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호를 백서(白棲)라 했으며 한때 동우회(同友會)란 조직에서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었다. 김좌진은 비록 자신의 부관이지만 연령으로는 열살이나 위였기에 강인수를 존칭어(尊稱語)로 대했다.
“말씀하시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령관의 분부라면 뭐든지 하겠소.”
“고맙습니다, 형님. 지금부터 서대파구로 가서 내 집사람을 찾아 데려와 줄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하겠소. 그런데 사모님을 어디로 모시고 오면 되겠소?”
“소·만 국경지대에 밀산(密山)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지요. 우선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했으니 일단 제 집사람을 그곳으로 데리고 오십시오. 만일 우리 부대가 그곳에 없거든 교포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부대가 그곳에 우선 도팍하여 상황을 판단하고 기지를 이동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지요.”
“잘 알겠소. 꼭 사모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밀산으로 가겠소.”
강인수는 김좌진의 분부를 받자마자 곧바로 왕청현 방면으로 떠났다. 김좌진은 이복희를 두고 떠날 때 일본군과 벌였던 치열한 전투로 이복희를 염려할 여유도 없었으며 그녀를 다시 찾아 데려올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전투를 독립군의 승리로 이끌고 민족의 생존권을 생각하면서 대책을 세우다 보니 때마침 이복희 생각이 났던 것이다.
1920년 10월 26일에 안도현(安圖縣) 황국령(黃國嶺)을 넘은 김좌진 부대는 11월 초순 소·만 국경을 얼마 남지않은 밀산에 당도하여 군수장비를 풀었다. 인적이 드문 황량한 벌판에서 한편으로는 막사를 짓고, 또 한편으로는 인근의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고, 모든 부대편성을 전투체제에서 수련제체로 바꾸면서 군량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사냥과 고기잡이를 해야 했다. 쌀쌀한 날씨는 독립군 장병들의 몸을 얼려 굳어지게 만들었으며 가장 큰 문제는 군량이 부족하여 주린 배를 채우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 무렵 김좌진 장군이 총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뿐만 아니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안병호(安秉鎬) 휘하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경비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허근(許根)의 의군부(義軍府) 구국단(救國團), 김성극(金星極)·홍두식(洪斗植) 등이 이끄는 광복단(光復團), 이청천(李靑天)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도 속속 밀산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군사단체들이 만주에서 일체 자취를 감추자 일본군은 심각한 인명피해만 입은 채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된 점에 분통해하면서 꿩 대신 닭이라도 잡는다는 생각에서 간도의 조선 민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김좌진 장군의 처 이복희를 데리러 갔던 강인수가 힘없이 돌아왔다. 김좌진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혼자 돌아오다니...”
강인수는 분을 삭이며 이를 악물었다.
“사령관, 이렇게 하늘이 진노할 일이 벌어질 수 있소? 내가 서대파에 당도해 보니 우리 북로군정서 군영이 자리잡고 있던 일대가 잿더미로 변한 광경을 목격하고 신변의 위험을 느껴 밀림 속에서 어둠을 기다렸다가 인근의 잘 알고 지내던 인가에 찾아들어가서 그 경위를 물어보았소. 그런데 우리 부대가 이동한 이틀 후인 9월 19일에 일본군 수색대가 친일파 집단 보민회(保民會)의 회원들을 앞세우고 와서 우리 군영을 불지르고 북로군정서의 요인을 색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었소.
이 때 보민회원 하나가 민가에서 사모님을 찾아내 일본군에게 넘겼다고 하오. 보민회원으로부터 북로군정서 사령관의 처라는 말을 듣고 놈들은 사모님을 대로변에 끌고 나가 죽창으로 마구 찌르고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길바닥에 뿌리는 잔인한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사모님은 임신중이었다고 하오. 일본군 수색대가 사라지자 주민들은 밤을 틈타서 사모님의 시신을 매장하고 돌로 비석을 세워 표석으로 삼았소. 나는 지금 그 묘소의 위치를 확인하고 오는 길이오.”
김좌진 장군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이복희가 일본군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날부터 수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일체 타인과의 접촉도 끊었다. 김좌진은 무장투쟁으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가족을 고향에 두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의 사령관이 된 자신을 만난 탓으로 이복희가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생각에 죄책감으로 크게 괴로웠다. 그러나 참모장인 나중소(羅仲昭) 장군이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을 위로하고 함께 사냥을 가서 노루와 멧돼지를 총격하여 잡아 온 이후부터 슬픈 마음을 다잡고 다시 북로군정서의 군무(軍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밀산(密山)에서 무장 독립군의 여러 부대가 모여들어 군세(軍勢) 확장을 꾀하자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미 청산리 일대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해 많은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조(朝)·만(滿) 국경지대에서 새로운 병력을 증원받지 못하면 토벌작전(討伐作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주차군사령부로서도 국내 철도와 항구 경비, 국내 독립운동 단체 색출 등으로 병력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자 일본군 우라시호[浦沽月] 부대는 중국의 군벌 장학량(張學良)을 협박하여 1개 연대 병력을 차출하도록 했다.
결국 장학량이 일본군 측의 강압에 굴복하여 병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우라시호 부대는 소련의 혁명군과 막후 접촉을 통하여 일본군과 중국군이 독립군을 협격하면 흑룡강을 건너 소련 땅으로 도망칠 가능성이 있으니 소련군이 출동해 강을 건너가는 독립군을 섬멸할 것을 주문했다.
이의 대가로 소련에서 적백전(赤白戰)이 벌어지면 일본군은 적계군(赤系軍)을 지원하겠다는 요지의 밀약(密約)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선언한 바 있는 소련 공산당(蘇聯共産黨)의 원동정부(遠東政府)는 일본군과의 밀약을 배반하고 비밀리에 독립군 진영에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즉 일본군과 중국군이 연합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서고 소련군까지 참전시키려고 하니 독립군이 소련 땅으로 넘어온다면 무기와 식량을 공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각 독립운동 단체 책임자들은 회의를 열어 모든 군사조직을 통합, 하나의 군단으로 편성하고 그 본영을 만주에서 소련으로 이동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의군부(義軍府)·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신민단(新民團)·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10개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창설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의 수뇌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편제로 이루어졌다.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 김규식(金奎植)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여단장 이청천(李靑天)
제1중대장 김창환(金昌煥)
제2중대장 조동식(趙東植)
제3중대장 윤경천(尹警天)
제4중대장 오광선(吳光鮮)
당시 소련의 연해주(沿海州) 일대에는 한국인이 약 50만명 정도 이주하여 그 곳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만들어 상당한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소련 연해주의 50만 교포들은 독립군의 강력한 후원자가 될 것이므로 모든 것이 어려운 밀산에서 일본군의 위협을 받으며 굶주림을 참기보다는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기는 편이 독립군에게 유리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비록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당시 소련군 측은 한국의 독립군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소련 공산당의 적색혁명(赤色革命)을 세계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약소민족의 해방을 부르짖고, 그것을 적색혁명의 선전 도구로 삼기 위하여 독립군을 돕겠다는 뜻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의지할 곳 없는 대한독립군단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또한 그 동안 각자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여 여기저기에서 나름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지만 이제는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으로서 소련으로 들어가는 것이 원동정부와 모든 교섭에 있어서도 편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아무 이견없이 통합체를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이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은 대표자들이 결의된 내역대로 군영기지를 만주에서 소련 땅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그 해 혹한의 겨울, 일본군 우라시호 부대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얼어붙은 흑룡강을 건너 소련 땅 연해주에 도착하는 대이동을 완료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