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로써 내 나이 20살 이제 3개월 후면은 내 나이 21살 이미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성장해버렸다 지금으로 부터 약 10년전 나는 부유한 계층의 집안에서 나름 태어나 아동기 시절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항상 부러움을 받는 선망의 대상이자 가져보지 못한게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잘나가는 중소기업의 회장이셨다
직원도 350명 정도 있었으며 회사의 규모도 지하 2층 부터 7층까지 있었으며 그 당시 월 매출 30억 정도의 수입률을 꾸준히 유지하셨으며 집안 구조도 정원도 있고 여름에 수영도 할 수 있는 풀장 구조도 이루어져 있고 썬베드까지 있었으며 집 안에서 맛있는 음식도 해주시는 유명한 호텔 주방장까지 있으셨으며 아버지 차량이 그 당시 재규어다임러 벤츠 비엠더블류 5대가량 소지하고 계셨으며 1:1 영재 특강만 7개를 받았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그렇지만 행복은 잠시 10살이란 나이에 너무 큰 상처와 고통을 받았다 아버지의 회사는 부도 위기를 겪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당시 20일 만기가 돌아온 어음 300억 원을 결제하지 못하여 최종 부도 처리가 돼었으며 워크아웃할 기회조차 생기지 않았으며 결국 부도와 함께 파산이라는 불행한 길로 직멸하고 말았다..
부도가 난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달 사이에 남남으로 이혼을 하셨고 이혼 후 약 3개월이 지난 후 아버지께서는 실제로 자살을 하셨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와의 이혼 관계에서 위자료 및 모든 혜택에 권한도 받지 못한 채 홀로 통장에 1200만원이라는 돈만을 보유하신채
월 10만원짜리 1칸짜리 단칸방을 잡으셨고 이제는 어머니께서 가장이시기에 그 당시 9년 전 어머니께서는 작은 3평짜리 과일가게를 차리셨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새벽 2시에 취침을 하시며 새벽 5시에 기상하시며 과일 새물품을 구매하시기 위해 새벽 시장에 나가셔서 물건을 항상 고르셨고 하루 18~19시간을 항상 고되게 일하셨고 하루 5만원씩 벌으시며 자기자신은 식사를 거르되 자기 아들한테만큼은 하루 3끼를 절대로 굶지않게 꼬박꼬박 챙겨주셨습니다..그리고 어머니는 2번째 가정을 얻으시게 되었습니다 2번째 인생이 찾아온 계기겠지요.. 어머니께서는 새 아버지라는 분과 재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새 아버지의 직업은 사우나를 운영하신 분이였고 그래도 나름 먹고 싶은거 배터지게 다 먹을 수 있었고 어머니께서 예전같이 고생을 안하시며 이 삶에 만족하시고 행복해 있다는 어렸을쩍 순수한 생각에 정말 하루하루 기뻤습니다.어머니께서는 4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제 여동생을 낳으셨습니다 그것도 40이라는 연령에 자연분만 시도 하시려다 아이가 산도에 걸려 호흡을 못하여 사망할 뻔하였고,어머니께서도 자기 스스로 자연 호흡을 할 수 없는 위기에 놓으셔서 호흡 활동을 돕기 위해 안면에 씌우는 산소호흡기를 달으시고 끝내 유도분만이 이루어지지 않자 제왕절개 수술을 하셔서 2세인 제 동생을 낳으셨습니다. 그 때 당시 의사선생님께서 수술을 끝내시고 나오시면서 하신 글귀들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들립니다 시각은 새벽 4시 정확히 산모와 태아 둘 다 사망할 위기를 넘겼고 어머님의 의지가 확고했기에 기적같은 일이라구요..어머니는 동생을 낳으시고 산후조리를 하시며 서서히 기력을 회복시키며 건강을 챙겨가는 모습만을 보면서 앞으로 행복한 날만을 전 꿈꺼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행복이란 상상은 유리조각처럼 산산히 부서져 나갔습니다. 의붓아버지께서는 항상 저를 못 잡아먹어서 으르릉 거리셨습니다.
항상 하루가 멀다하고 어머니께서 안보이는 곳에선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너 같은 녀석을 아들처럼 대해주는 것을 고맙게 여겨라"이런 식의 문구를 남발하시면서 항상 저를 핍박하셨습니다 학교를 갖다오며 집으로 귀가했을시 항상 손으로 얼굴을 강타하셨고 하루하루 알코올에 쩌들으시며 하루 소주 5병씩 마시면서 알코올성 치매 판정까지 새 아버지는 받으셨습니다. 또한 친구들을 데리고오면 항상 "너가 뭔데 남의 집에 함부러 친구를 데려오냐면서 꾸짖으시는건 기본이시며 여동생이 생겨서 귀여워서 좀 만져보고 않아볼려고 시도를 해보았지만 내 자식 건들지말라 그러시고 항상 이런 고난 속에서 진짜 마음의 상처들을 받아오며 3년동안 지내왔습니다 물론 어머니께서도 항상 이런 문제로 의붓 아버지와 잦은 트러블과 마찰이 있으셔서 항상 싸우셨고요 그 현장을 매일 목격할때마다 전 눈시울이 붋어지고 항상 말없이 밖에서
울어야만 했습니다. 울면서 항상 다짐하고 생각했던 것이 이것은 행복이 아니고 불행이다 나는 단지 쓰레기일뿐이다라며 어렸을적 자아와 정체성은 이런 혐오한 마이너스 길로만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끝내 1년이 더 경과한 후 토탈 4년이 되겠군요 새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마찰은 이제 절정이라는 단계에 다달으셨고 결국 이혼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합의하게 이혼을 하시게 되었고 어머니는 위자료 1억 2천만원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이 1억 2천만원이 절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정말 큰돈인건 제 자신도 압니다만 저희 어머니께서 재혼후 받으셨던 고통과 저로인한 스트레스를 놓고보자면 이 돈은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44세라는 나이에 가정에서 휴식과 안정을 취하시며 여가생활의 즐거움을 느끼시며 보람되게 지내셔야할 나이에 다시 생계 유지를 위하여 사회라는 세상에 다시 뛰어드셨습니다 물론 1억 2천만원이라는 위자료를 받고 저희 어머니께서는 갈비집을 창업하셨고 하루매출 꾸준히 20만원씩의 소득을 올리셨고 우리 세식구 살 수가 있는 아담한 25평짜리 아파트도 있었습니다.그 때 당시 제가 이제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할 시기이며 여동생은 4살에 불과한 어린이에 불과했고 저에게도 사춘기라는 질풍노드의 시기가 찾아왔겠지요? 그 때 당시 정말 어머니에게 큰 죄들을 지었습니다 2년간 중학교 3학년때까지 항상 사고만 쳐왔습니다 솔직히 그 때 당시 보호관찰도 여러번 받아봤으며 소년원도 수감생활도 여러번해봤으며 항상 범죄라는 늪이 안좋은걸 알면서도 매일마다 재범하고 사고만을 쳤습니다.적어도 그 때 당시가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조금이나마 어머님의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 집에서 동생이라도 돌보며 동화책이라도 한 권 읽어주며 학업에 열심히 열중하여 어머니께 간소하게 나마 효도를 했어야 하는 것이였는데 항상 잦은 사고로 어머님을 경찰서와 법원 검찰청으로 소환하게 만들고 가장힘들 때에 한없는 고통과 스트레스만을 드린 제 자신이 너무나 후회스럽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16섯살이라는 나이에 6개월동안 소년원에 수감되었습니다. 항상 어머니께서 면회도 오시고 편지도 자쭈 써주셨으며 항상 폭넓게 영치금을 넣어주셨고 그 영치금으로 하루에 정해진 1만원 양의 메뉴들을 주문하여 음식물을 먹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러자 수감 생활 5개월 후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1주일에 4~5번씩은 오시던 어머니께서 3주일간 소식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무슨 사고가 났는지 너무나 궁금했고 소년원 내부에서 항상 혼자 시름하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출소 4일을 남겨두고 어머니께서 접견을 오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직계존속인 이모에게 보증을 서주시다가 이모가 파산신청을 신청하여 법적으로 파산신청에 해당되었고 보증서주신 채무자는 우리 어머니이기 때문에 항상 채무독촉에 시달리셔야만 했습니다 결국에 1억을 보증서주셨고 갈비집을 다른 분들께 양도하셨고 25평짜리 아파트도 분양을 하게 되었고 결국에 어머니께서는 1억원의 빛을 다 갚으시게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그동안 갈비집을 창업하시며 얼마안되게 꾸준히 모으신 자금으로 15평짜리 방2개달린 전세집을 하나 얻으시게 되었고 7~8평짜리 상가를 잡으시고 과일가게를 다시 여시게 되셨습니다 그때 당시 상가잡을 전세금이 엎었기에 월 25만원이라는 월세를 납부하시며 과일장사에 다시 열중하셨습니다.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던 저는 항상 굳은 다짐을 했습니다
꼭 공부 열심히 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좋은 대학교를 가서 장학금 받으면서 공부하기로 말입니다.그렇지만 말처럼 쉽게 물 흐르듯이 이루어지진 않았습니다 무심한 세상은 우리를 끝까지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어머니는 항상 일에 종사하셔야만 했고 동생과 저의 학교수엄비와 급식비 학원비 저희의 뒷바라지를 모두 감당하셔야만 했었고 상가월세및 모든 세금을 내셔적인 부분에도 어려움이 많으셨지만 어머니께서는 여러개의 카드에서 대출을 받으시며 카드 돌려막기를 하시고, 15평짜리 방 2개달린 주택 집의 전세금과 보증금까지 다 깎아서 생계유지를 위해 다 쓰셔야만 했고 결국에 빛은 3천만원까지 늘려지게 되었고 더 이상 어머니께서는 갚으실 여력과 능력 모든게 안되셔서 결국엔 회생신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회생신청을 하게되어 다행히 500만원까지는 빛이 탄감되었고 2천500만의 빛을 않고 월마다 달달이 40만원씩을 내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결국엔 학교를 고1때 자퇴를 하였고 오토바이 배달 알바와 새벽시간에 신문 배달 주유소와 서빙 공돌이 정말 안해본 일이 없이 8개월동안 돈을 개같이 벌었습니다.검정고시도 4월달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도했구요 그러자 전 자아를 찾았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까지 워킹푸어나 월급쟁이로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도 적어도 야망이 있고 꿈이 있습니다 어렸을적 옷에 관심이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그러자 한번 쇼핑몰을 창업해보고자 1년동안 정말 하루 4시간자면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포토샾 일러스트 HTML 웹디 드림위버 프로그래밍 컴터 학원까지 다니면서 자격증까지 무수히 따놓았으며 매일마다 동대문 시장의 거리를 새벽시간에 활보하고 다니면서 수첩과 볼펜 이 2가지를 챙기며 매일마다 유어스 디자이너클럽 뉴존 에이피엠 에리어식스 광희시장 올레오 아트프라자 제일평화 남평화 광장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해왔고 이젠 어느정도 배경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쌓이자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옥션이나 지마켓에서 물건을 올려 팔아봤지만 옷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습니다 그러자 놀라움을 제 자신은 감추지 못하고.이것 봐라? 재미있네?로 바뀌었고 그 때부터 동대문에서 이쁘다하는 옷들을 모두 골라 온라인에 올려봤습니다 그러다 곧 한 달에 2000만원이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상상치도 못했던 큰 돈이 들어왔습니다 항상 6개월 정도 뼈빠지게 고생해야 1천만원 모을 수준인데 한달만에 이런 액수가 들어오니 말입니다..그리고 본격적으로 앞날도 확실해졌습니다 좋아하는 것만큼은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제 성격도 한 몫한 샘이고 어머님께 효도하고 동생에게 좋은 오빠가 되어야겠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몇 달 동안 하루 4시간식 잠을 자며 옷을 사서 사진 작업을 하며 인터넷에 올리고 포장, 배송까지 눈 코 뜰 새 없이 해냈습니다. 정말 주소도 잘못 보내는 등 실수 연발이었고 몸이 너무 고돼 울기도 했지만 그래도 신바람이 나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도 였습니다. 이제 어느정도 자리 잡아 포장과 배송 일을 대신해줄 아트바이트생도 고용하고 같이 일할 웹디자이너나 패션감각이 뛰어난 엠디들도 구하고 이제 직원까지 고용할만한 어느정도 여력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어렸을때부터 고생을 많이해서 그런지 하늘에계신 소중한 아버님께서 저에게 행운을 주시는건지 사이트를 오픈하고 2년 동안 매출은 해를 거듭하며 상승했고 상승 곡선의 각도도 가팔랐습니다..금융위기라던지 그로 인한 경제 불황도 물 흐르듯이 잘 피해갔고
현제로써 저에게 꿈이 있다면 현지 테스팅과 틈새 시장을 완전하게 공략하여 독특한 전략을 통해 유럽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명품이란 벽도 뚫어보고 싶고 유명한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여태까지의 시너지 효과를 꼭 볼 것이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싶습니다 자신있습니다
여태까지 정말 수없이 피눈물 흘리신 어머니에게 정말 꼭 훌륭한 아들이 되겠습니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에게도 훌륭한 오빠가 되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느끼고 지내오고 살아온 과거들을 나열했습니다. 가족이란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족이란 요소가 없었다면 과연 지금 제 자신은 어떻게 일취월장했을까요..??
부모님께 효도하는 정말 자랑스러운 자식들이 됩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