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시협약(三矢協約)
김좌진이 신민부(新民府)를 건설한 것은 무력(武力)을 길러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때문이었기에 신민부 발족 때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복벽주의자 등 각기 다른 노선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조국의 자주독립이란 대전제하에 굳게 뭉쳐 항일투쟁(抗日鬪爭)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하였고 또한 지성인이 갈구하던 ‘시대적 경향에 가장 적합하게 시대사조에 순응하여 병진(竝進)한다’는 선언을 한 바 있었으므로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내외 인사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
초창기에는 신민부의 중앙기관이 유하현(柳河縣)의 교포 부락인 소량자(小亮子)에 설치되었고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爀)과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등은 각기 약간의 소속직원을 데리고 각 기관과의 연락과 기타 업무처리에 분주했다. 이 때 일제(日帝)는 신민부 요원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주목하면서 간부들의 몸에 거액의 현상금까지 내걸고 암해(暗害)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사상개념이 다르다 보니 민족해방과 무장투쟁은 다음 순서로 제쳐 놓고 실권 다툼으로 조직력이 흔들리며 갈등과 불화의 조장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을 느낀 군사부위원장 김좌진(金佐鎭)은 1925년 4월에「신민보(新民報)」를 창간하여 신민부가 창설된 원래 목적을 강조하고 무장투쟁을 통한 일제 타도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한국인사회에 호소하였다.
신민부가 창립 당시부터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조직된 것과 같이 이「신민보」역시 한국 독립에 관한 내용이면 어느 누구의 원고든지 등재했고 등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일성(一星)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 김봉환(金奉煥)이 소설가 강경애(姜敬愛)와 함께 쓴 원고가 일본을 모욕하는 글이라고 트집을 잡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경찰대를 보내 흑룡진(黑龍鎭)에 있던「신민보」출판소를 습격하도록 하여 선전부위원장 최성묵(崔聖默)과 경사국장 이광진(李光鎭)이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신민부의 기관지였던「신민보」가 폐간되었던 것이다.
1925년 6월 11일에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가 봉천성 경찰청장 우진(于珍)을 매수하여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작림(張作霖)과 협정(協定)을 맺었다. 장작림 휘하에 있는 군사들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일본영사관에 넘기고, 포상금의 일부를 직접 체포한 관리에게 주도록 할 것 등이 삼시협약(三矢協約)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군경 뿐만 아니라 만주의 중국 관헌들까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25년 4월에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어 조봉암(曺奉岩)·김철훈(金哲勳)·윤자영(尹滋瑛)·김찬(金燦) 등이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설립했고, 그 해에 조선공산당 북만주총국(朝鮮共産黨北滿洲總局)의 영도하에 영안현(寧安縣) 일대에 대진청년회(大震靑年會)와 중서청년연맹(中西靑年聯盟)이 결성되었으며 일본 도쿄에서 ‘막스·레닌주의’ 사상을 토대삼아 재일공산주의자연맹(在日共産主義者聯盟)이 구성되고 자칭 ‘ML파’를 만들어 이에 반대하는 구서울파와 상해파가 협력하여 ‘서상파’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도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통합하여 북만조선인청년총연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하고「농군(農軍)」이란 간행물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무산계급의 이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하였다.
일제의 모략과 중국 관헌에 대한 매수, 공산주의 세력의 증대라는 상황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도 김좌진은 신민부의 계획된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원래 계획은 첫번째 영안지방을 비롯한 유하·흑룡·밀산·요하 등의 지역에 행정조직을 강화하고 각 지방마다 총판을 두어 동포들의 자치를 실시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액목·돈화·안도현 지역에도 행정조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릉현과 밀산지방에서 민중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신민부의 시책에 잘 따르지 않아 이같은 계획은 난관에 부딪쳤다.
김좌진을 비롯한 신민부의 지도자들은 자체의 행정구역을 중동성을 중심으로 백두산에서 흑룡강까지 미치는 지역에 총판 15개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장백산맥의 산림지대를 후보기지로 결정하고 이강훈이 이끄는 별동대원들을 개척단으로 파견하여 산악지대인 안도현에 신민부 산하조직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교포들의 마음이 엇갈리는 상황을 판단하여 교육사업을 통한 교포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이것은 동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고 더 나아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반일의식을 심어주고 민족주의 사상을 키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신민부의 총회에서 결의한 바 그대로 100호 이상의 마을은 물론 30호 이상의 마을에도 사립학교를 세우는 계획에 착수하는 한편 성인교육기관으로 노동강습반과 보통강습반을 설치했다.
그러나 신민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신민부의 모연대장(募捐隊長) 황일초(黃一樵)와 최진만(崔眞滿)·채모우(蔡謨優)·박병찬(朴秉贊) 등이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관들에게 체포되었고, 설상가상으로 1927년 2월에는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하여 경리부위원장 유정근과 본부직원 김윤희(金潤熙)·한경춘(韓慶瑃)·박경순(朴慶淳), 중앙집행위원 남중희(南重希)·이정화(李貞和) 등이 중국군 헌병대와 일본 경찰관들의 습격을 받아 피체되어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유치되었다.
신민부가 존폐위기에 직면하자 김좌진은 즉시 중앙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우리 신민부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졌소. 우리의 목표인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 군벌의 소행에 항의하고 비밀요원들이 국내에 침투하여 총독부의 주요 관리를 암살하고 그 여세를 몰아 국지전을 펼치면서 다시 북만지역으로 퇴각하는 것이오.”
이렇게 결단을 내린 김좌진은 군사부위원 황학수(黃學秀)를 중국 동북군정의회 참모부장 왕상덕(王相德)에게 보냈다.
“우리가 군사력을 기르고 조선인들의 자치행위를 하는 것은 장차 준비가 끝나면 본국으로 쳐들어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함이었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일본인들의 편에 서서 우리 독립군의 요원들을 체포하는 것이오? 중국도 일본의 침략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는데 나라를 잃은 우리를 동정해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일본을 돕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오. 일본의 침략본성은 당신네 나라까지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왜 모르고 있단 말이오? 이러고도 중국이 진정한 대국이라고 할 수 있소? 당신네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독립군은 필요한 존재요. 우리를 돕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앞으로 모르는 척만이라도 해 주시오.”
왕상덕은 변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묵묵히 황학수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김좌진은 4~5명의 대원들을 뽑아 특수공작대를 조직하고 이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국내진공작전에 사용할 수 있게 지도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 특수공작대는 3개 노선에 따라 국내로 잠입했는데, 제1노선은 압록강을 건너서 강계를 경유하여 평양까지, 제2노선은 백두산으로부터 함경도·강원도·경상도의 산맥을 타고 전라도의 지리산까지, 제3노선은 두만강을 건너 경성을 경유하여 충청도까지 답사하도록 하였다. 이처람 3개 노선으로 잠입한 공작대원들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무사히 귀대하였다.
★ 신민부의 내홍(內紅)
1926년 초여름부터 신민부의 관할구역인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는 수시로 원인 모를 집단폭력난동이 일어나 선량한 교포들을 괴롭히고 피해를 입히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교포들을 괴롭히는 무리는 신민부 의용군의 이름을 팔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 하며 교포들의 재물을 강탈해 가고 반항하는 교포를 구타하거나 심지어 잔인하게 살해하는 등 신민부 의용군의 체면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현지 교민들의 반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겸 민사부위원장 박관해(朴觀海)와 법무부위원장 최호(崔灝)는 군사부위원장 김좌진(金佐鎭)의 집무실을 찾아와 “군사부위원장은 군대의 행동을 철저하게 단속하시오! 매일 교포들로부터 항의와 진정이 들어오고 있으니 이거 견딜 수 없소. 군대를 어떻게 통솔하기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라고 질책했다.
이 말을 들은 김좌진은 화가 났지만 애써 태연한 안색을 보이며 “중앙집행위원장의 말씀은 듣기 좀 거북하구려. 물론 흠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 신민부의 의용군이 그렇게 문란하지는 않을 것이오. 더욱이 이곳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어 군사부가 잘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과격한 행동까지 취해가면서 스스로 무덤을 파겠소? 마침 법무부위원장이 계시니 군사부의 책임자로서 사태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겠소. 물론 나로서도 별도로 조사해 보겠지만 공연한 일로 고생만 하고 있는 군사부의 동지들이 사기가 꺾이지 않게 법무부위원장의 선처를 부탁하오”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박관해는 끝까지 김좌진에게 책임 추궁을 하려고 느닷없이 언성을 높이면서 “참으로 어이가 없소. 군사부의 동지들이 아무 잘못이 없다면 우리 민사부가 마치 일을 꾸민 듯 말씀하시는 듯 한데 군사부위원장이 어떻게 감히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라고 대들었다.
김좌진 장군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의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관해와 최호를 똑바로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좋소. 참고 있으려 했지만 박 위원장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말이 나온 김에 나도 몇마디 하겠소. 두 분이 오시기 전에 나로서는 이미 조사할 만큼 조사해 두었으니 그리 아시오. 우리 군사부의 이름을 팔면서 민가에 침입하여 폭력과 강탈을 일삼던 무리가 바로 박 위원장이 고용한 왈짜들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면 당신들도 좀 마음이 섬직할 거요. 그렇게 해서 우리 신민부 내부에 분란을 일으켜서 당신들에게 돌아갈 이득이 도대체 뭐요?”
그러자 박관해와 최호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오히려 김좌진에게 참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김좌진 장군은 부관들을 시켜 두 사람을 쫓아내도록 하여 돌려보내고 군사부 지도자들을 긴급히 소집, 강경한 지시를 내렸다.
“동지 여러분이 수고해준 덕택으로 우리의 이름을 팔아 양민을 괴롭히는 간악한 무리들에 대한 조사는 끝났을 줄 믿소.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그 무리를 잡아들여서 철저한 문책을 하시오. 나의 이 지시는 우리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이나 그 밖의 어느 명령으로서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오늘 밤 안으로 행동에 옮겨 시행하고 그 결과를 즉시 보고하시오.”
그 무렵 이범석(李範奭)이 김좌진의 전보를 받고 급히 신민부의 군사부로 달려왔다.
“이범석 장군, 반갑소. 이렇게 다시 만나니 수천의 병사를 얻은 것보다 더 마음이 든든하오.”
김좌진은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해 주고 이범석에게 협조를 당부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다니... 괘씸한 놈들! 이제는 칼자루를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사부로 쳐들어가서 파괴분자들을 요절냅시다. 시간적 여유를 주면 줄수록 군사부의 위치는 위태로워집니다.”
이범석이 흥분하여 결단을 내리길 촉구하자 김좌진은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이 장군,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나도 이 장군을 오시라고 할 때는 그만한 생각이 있었소.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에 동족끼리 다툰다면 일본의 군경에게 이로울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우리의 힘만 약화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오. 분하기도 하지만 참아야 하오. 내가 이 장군을 오시라고 한 것은 이러한 피상적(彼相的)인 사태에 대치하고자 해서가 아니고 좀 더 근본적인 개혁을 도모하기 위해서요.”
이에 이범석은 김좌진을 도와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3부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정의부(正義府)에서는 각 부의 내홍(內紅)을 거울 삼아 민족주의 진영이 주체가 된 3부의 대동단결을 부르짖고 나서면서 신민부(新民府)에서도 협의에 응할 것을 종용해왔다. 그러나 아직도 대동단결이란 개념도 모호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내부분쟁을 조장하려는 반역자들을 배격한다는 정도로써 3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범석 장군이 우리 민족주의 진영의 최선봉이 되어 파괴분자들의 책략을 막아 줘야겠소. 그들이 가는 곳마다 물을 흐려 놓고 있으니 서로 이간되어 있고 그 흐름을 타고 자기들 세력을 뻗쳐 나간다면 우리 독립운동 단체들은 얼마 안 가서 중대한 사태에 불착하게 될 것이 뻔하오.”
김좌진은 자신의 고민을 이범석에게 전했다. 그때 정의부의 제의에 따른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는 결성되기가 무섭게 내부분열도 심한 균열이 일어났다. 이에 김좌진은 이범석을 내세워 촉성회의 방향을 바로잡아 순수한 민족주의 진영의 단합체로 만들 계획이었다.
“김 장군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미약하지만 최선을 다해 장군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범석도 김좌진의 뜻이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이 있는 판단으로 알고 이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성취시킬 계획이었다.
1927년 3월에 신민부는 본부를 유진(柳鎭)에 옮기고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조직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이 때 군정파(軍政派)의 영향력 행사로 분쟁을 일삼던 계열은 최대한 배제하고 새로운 중앙집행위원회의 개선에서 민정파(民政派)를 제압하면서 일단 군정파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주권 다툼에서 실패한 민정파에서 군정파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민정파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의 명의로 만주 전역에 성토문을 돌렸는데, ‘민족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이며 매족적(賣族的) 주구(走拘)인 김좌진(金佐鎭)과 정신(鄭信)을 처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신민부내에서 또 다시 파벌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정의부에서는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란 이름의 3부 통일회의 개최 준비에 분주했고 그 해 7월중에 회의를 다시 열기로 했다는 통지가 신민부에 전달되었다. 이 공문을 놓고 다시 신민부에서는 민정파와 군정파 간에 대표권을 놓고 다투었으니 분파 투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는 군정파의 대변인격으로 활동하던 이범석이 대표권 장악에 실패함으로써 민정파가 신민부를 대표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3부 통일회의를 주도할 정의부에서도 내홍이 일어나 마침내 회의는 개최하지도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는 성과를 거두지도 못한 채 신민부의 분쟁만 가중시킨 것이다.
이처럼 독립운동 단체들이 내홍에 휘말리고 있을 때 동양정복의 야욕을 품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점차 그들의 마수를 만주에 뻗치고 중국군을 매수하여 독립군 소탕에 나섰으니 우선 생존의 문제와 일·중 군경의 위협이 두려워서 많은 한국인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친일(親日)경향으로 기울어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같은 내홍에 몰려 사분오열(四分五裂)되고 있었으니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 3부 체제가 차츰 기울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