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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여왕’ 연수영 」1영류태왕의 대당 저자세 굴욕외교 (2)

조의선인 |2010.10.24 11:44
조회 163 |추천 1

● 영류태왕의 친당정책과 주전파의 불만

 

요동반도의 남쪽 해상에 자리잡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은 모두 통틀어 장산군도(長山群島)라 부르는데 고구려의 해안 요충인 비사성(卑沙城)과 함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거점으로 거론되었다. 서기 633년 봄 어느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빛을 냈으며, 넘실거리는 파도가 백사장(白沙場)에 밀려왔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하고 해변에서부터 멀리 수평선까지 수많은 초록빝 꽃잎들을 흩뿌려놓은 듯 절경을 이루며 늘어앉은 섬들은 보는 사람의 정신을 탁 트이게 했다. 

 

요동의 어느 해변에서는 기이하게도 전라(全裸)의 젊은 여인 두 명이 백사장에서 수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 바닷물로 몸을 적신 듯 두 여인의 피부는 물기로 인해 번들거리고 있다.

 

첫번째 여인은 체격이 크고 키가 무려 칠척(七尺)이나 되는데 오랫동안 무예를 수련한 듯 그녀의 팔과 다리와 복부는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 있다. 마치 큰 수박을 둘로 쪼개 엎어놓은 듯한 큼직한 유방(乳房)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팽팽한 탄력감을 유지했고, 허리는 버들가지와 같이 좁았으며, 보름달을 두배로 증폭시켜 놓은 듯한 둔부(臀部)의 곡선은 탐스럽기 그지없었고, 살이 탄력있게 올라 있는 허벅지는 근육질로 덮여 있어 한아름은 족히 되어보인다.

 

두번째 여인도 가히 매혹적인 육체를 지녔다. 동그렇고 가녀린 어깨, 농익은 수밀도(水蜜桃)를 연상시키는 풍만한 젖가슴, 그 위에 맹토라진 자매같이 반대쪽으로 달린 두 알의 자줏빛 유실(乳實), 그 아래 팽팽하게 당겨진 미려한 복부(腹部), 급격하게 확산된 둔부(臀部)의 탄력성은 폭발적인 탄력감을 보여주고 있다. 두 여인의 벌거벗은 몸매는 그야말로 농염하고 뇌쇄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두 여인은 비록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이었지만 전혀 거리낌이 없이 오히려 당당한 자세로 해변에 서 있었다. 비록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절세의 미모(美貌)는 아니었지만 여인들의 이목구비(耳目口鼻)는 선이 뚜렷하고 단정하게 생겨서 시원시원해 보인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허공에서 밀려와 두 여인의 뇌살적인 나체(裸體)을 애무(愛撫)하고 지나간다.

 

“금화(金花), 요동의 바닷물에 몸을 담가보니 어떤가?”

 

육감적이고 근육질의 몸매를 지닌 첫번째 여인이 청초한 느낌의 두번째 여인을 돌아보며 묻는다.

 

“저는 어린 시절을 국내성(國內城)에서 자라와서 바다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요동의 해수(海水)로 몸을 씻어보니 참으로 시원하고 마음이 상쾌합니다.”   

 

금화라는 이름으로 불린 두번째 여인이 마치 상전(上典)을 모시듯 첫번째 여인을 존대(尊待)하며 대답했다.

 

“그런가? 천하의 어떤 나라에게도 바다는 중요한 자원이야. 나는 이 요동의 바다가 하늘이 우리 고구려에게 내려준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하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갑술년(甲戌年:서기 614년)의 일을 생각해보게. 그 당시 수장(隨將) 내호아(來護兒)는 우리 나라가 바다를 소흘히 하는 틈을 이용해 이 요동의 바다를 가로질러 비사성을 점령했어. 자고로 바다를 개척하지 않는 나라는 절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룰 수 없네.”

 

“옳은 생각이십니다.”

 

“나는 단순히 동부가(東部家)의 규수(閨秀)인 연수영(淵秀英)이 아니라 우리 수군을 지휘하여 바다를 지키는 장수(將帥)가 되고 싶네. 내가 그 동안 추요선(秋要璇) 사범과 유대룡(柳大龍) 집사에게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무예를 수련한 것은 단순히 호신용으로 쓰려고 한 것은 아닐세. 여자도 전장(戰場)에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네.”

 

자신을 동부가의 규수 연수영이라 밝힌 여인의 눈매에는 의지가 깃든 안광(眼光)이 번뜩인다. 그녀가 바로 요동 해상에서 불멸의 전설을 만들어낼 여걸이 될 것이란 사실을 그때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연수영의 아버지는 동부대인(東部大人)으로서 고구려의 재상(宰相) 자리인 대대로(大對盧)를 역임했던 연태조(淵太祚)였고, 첫번째 오라버니가 바로 여당전쟁(麗唐戰爭)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며 중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두번째 오라버니는 연개소문의 세 아들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을 이간질하여 고구려 멸망의 단서를 제공한 간신 연정토(淵淨土)였다. 

 

연개소문이 언제 출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김용만 한국역사문화연구소장은「갓쉰동전」이란 전설을 인용하여 서기 607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태조는 나이 쉰 살을 바라보던 나이에 첫 아들을 얻었다고 해서 연개소문을 ‘갓쉰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노령인 미흔이 넘은 나이에 출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늦둥이를 낳자마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4년 뒤에 연태조는 새 부인을 얻어 둘째 아들 정토를 낳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젊은 나이였던 정토의 생모도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이내 죽고 말았다. 수영은 그 뒤 세번째 부인을 들여 낳은 딸이었다. 아버지 연태조가 죽을 때 연개소문은 스물한 살, 둘째 연정토는 열일곱 살, 막내 연수영은 열두 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태조가 벼슬에서 물러난 것은 영양태왕(嬰陽太王)의 이복동생 고건무(高建武)가 새 태왕(太王)으로 즉위한 직후였다. 나라를 위해 무슨 건의를 해도 전혀 받아주지 않고, 국사(國事)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해 벼슬을 버리고 은퇴한 직후였다. 연태조가 그렇게 불만을 품고 은퇴하여 노후를 보내다가 죽자 태대형(太大兄) 고웅백(高雄栢)·조의두대형(鳥衣頭大兄) 도병리(都丙利)·의후사(意候奢) 고묘복(高苗福)·대사자(大使者) 고승(高勝) 등 친당파(親唐派) 대신들은 영류태왕(榮留太王)에게 이렇게 주청했다.

 

“폐하, 연태조의 아들 개소문은 천성이 사나워 남과 다투기나 좋아하는 자이오니 동부가 대인의 지위를 세습치 못하게 하소서. 아예 이참에 동부가를 폐문하심이 가할까 하옵니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각부 대인의 관작(官爵)은 세습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죽은 연태조가 태왕의 외교정책에 반기를 들다가 벼슬을 버렸으니 그 아들 개소문에게 세습을 허락하지 말고, 아예 멸문을 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연태조가 생전에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로가 큰데 멸문을 시킨다면 아직도 세력이 만만치 않은 반당(反唐) 주전파(主戰派) 무장들의 불만이 커질 것을 우려해 영류태왕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영류태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연수영의 나이 갓 두 살 되던 618년 무인년(戊寅年)으로,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략에 의해 일어났던 여수전쟁(麗隨戰爭)이 완전히 종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기였다. 612년 수나라의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이 고구려의 병마원수(兵馬元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치밀한 계략에 빠져 살수대전(薩水大戰)에서 30만 대병력을 잃고 패퇴하기 전에 영류태왕은 당시 태제(太弟)의 신분으로 수군원수(水軍元帥)의 직책을 맡아 평양성에 접근한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의 수군(隨軍) 10만명을 거의 살상하는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었다. 이렇게 뛰어난 전쟁유공자(戰爭有功者)였건만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이상할 정도로 예전의 패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사람이 아예 바뀐 듯했다.

 

영류태왕은 즉위 이듬해인 619년 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즉위를 알렸다. 그리고 4월에는 나라의 첫 수도(首都)였던 졸본성(卒本城)으로 행차하여 국조(國祖)인 추모성왕(皺牟聖王) 고주몽(高朱蒙)의 사당에 즉위를 고하는 제사를 올리고 5월에 도성(都城)인 평양성(平壤城)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영류태왕은 자신의 즉위를 조상들에게 고하기에 앞서 당나라의 조정에 먼저 알리는 역순(逆順)을 저질렀다.

 

이후 영류태왕의 대당(對唐) 외교는 저자세 유화책으로 일관했다. 해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는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황제가 되기도 전이었고, 그의 아버지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아직도 불안한 제위(帝位)에 있을 때였다. 불안하다고 하는 것은 그때까지 당나라가 중국 전토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후계자 문제 등 왕실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내정이 좀 더 안정되고, 지난 네 차례 수나라와의 전쟁 후유증도 빨리 극복하여 군사력을 회복했다면 그 기회에 아예 중원으로 쳐들어가 대륙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좋은 기회를 아깝게도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류태왕은 당나라의 비위를 맟주기 위해 선제공격이 아닌 비굴한 유화책으로 선수를 치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고구려를 만만하게 본 고조는 서기 622년에 이런 내용의 국서를 보냈다.

 

"짐(朕)이 공손히 천명(天命)을 받들어 천하에 군림하여 삼가 세 신령[天地人]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고 있는 바, 온 천하 백성이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일월(日月)이 비치는 곳은 모두 편안하게 하려 하노라. (고구려)왕이 요동(遼東)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변방(藩邦)의 지위에서 정삭(正朔)의 예를 받들며 조공(朝貢)의 직책을 다하여 왔으며, 짐짓 사신을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표시한 데 대하여 짐은 매우 기뻐하노라.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무사태평하여 예물들이 내왕하고, 도로들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길이 굳건히 하면서 각자 자기의 영역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장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 다만 수나라 말년에 전쟁을 계속하고, 재난을 만들어 차고 싸우던 곳에는 각각 자기 백성을 잃어버려 드디어 부모와 자식이 서로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서 허다한 세월이 지나도록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도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매 우의가 막히거나 다른 점이 없게 되었도다. 이 곳에 있는 고려(고구려) 사람들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왕이 놓아 보냄으로써 백성을 편히 기르는 방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길을 서로 확대시키기 바라노라."

 

국서를 받은 영류태왕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전에 수나라와의 전쟁 때에 포로로 잡혔던 중국인 가운데서 제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 1만여명을 찾아서 당나라로 보내주었다. 그런데 당나라에 남아 있는 고구려인 포로들을 조사하여 돌려보내기로 했다는 고조의 말은 완전히 공수표였다. 해가 가고 달이 가도록 돌아오는 고구려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여수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수들은 이를 갈며 분개했다.

 

고조에게 황당무계한 사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태왕은 그 이듬해 12월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고, 또 그 다음해인 624년 2월에는 사신을 보내 책력(冊曆)을 반포하여 줄 것을 간청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한 것도 그러했지만, 책력을 요청한 것은 이제부터 고구려의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속국이 되어 당나라의 연호와 달력을 똑같이 쓰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고구려의 사신을 맞은 당나라는 이게 웬 떡이냐는 듯이 반색했다. 언젠가는 힘으로 굴복시켜야 할 오랑캐로 간주하던 고구려가 제 발로 찾아와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고조는 예부상서(禮部尙書) 심숙안(沈淑安)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당나라의 책력과 함께 영류태왕을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으로 봉한다는 칙명을 보냈다.

 

뿐만 아니었다. 고조는 심숙안이 가는 길에 도교의 도사들을 딸려 보내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전하도록 했다. 당나라의 도사들이 고구려 수도 장안성 안학궁에서 노자의『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할 때는 영류태왕과 왕족들도 자리를 함께 하여 그 강의를 영류태왕과 중신들도 자리를 함께 하여 그 강의를 경청했다.

 

영류태왕은 이듬해인 625년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더 많은 도사를 보내어 노자의 도교를 가르쳐주도록 청했다. 고조는 고분고분한 고구려의 임금 고건무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더 많은 도사를 보내주었고, 덤으로 불교 승려들도 함께 고구려에 파견했다.

 

이러한 한심한 꼴을 보고 있는 무장들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626년 7월에 당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 고조가 둘째 아들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쫓겨나는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변란’이 일어났다. 이세민이 친형이며 황태자인 소왕(巢王) 이건성(李建成)과 잠재적 경쟁자였던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아버지 고조(高祖)를 협박하여 황제 자리를 강탈한 사건이었다. 이런 천하의 패륜아가 뒷날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 역사에서 으뜸가는 성군(聖君)이라고 칭송하는 당(唐) 제2대 황제 태종(太宗)이다.

 

그 해에 백제와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조공을 못 하게 길을 막고 자주 침략한다’고 하소연하자 태종은 산기시랑(散騎侍郞) 주자서(朱子薯)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백제·신라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칙서를 보냈다. 이에 영류태왕은 즉시 사신을 통해 ‘참으로 황공하오며, 앞으로는 백제·신라와 화목하게 지내겠나이다’는 비굴한 내용의 사죄 국서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 꼴을 바라보는 고구려 무장들의 심장은 금세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무장들의 울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류태왕의 당나라에 대한 짝사랑은 계속되었다. 628년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태종이 돌궐(突厥)의 지도자 힐리가한(詰利可汗)을 복속시킨 것을 축하하는 한편,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던 것이다. 나라의 강역을 세밀하게 그린 지도를 바친다는 것은 우리 나라는 귀국의 속국이므로 언제든지 쳐들어와도 좋다는 항복문서를 바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참으로 일국의 제왕으로서는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추태였다.

 

타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그보다 한 달 전인 그해 8월에는 신라군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인 낭비성(娘臂城)을 쳐서 함락시킨 일도 있었다. 이래저래 장수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그리고 631년에 마침내 운명의 경관파괴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경관은 여수전쟁(麗隨戰爭) 때 수군(隨軍) 전사자의 시체를 한 군데에 모아놓고 봉분을 만들어 전승기념탑을 세운 것이다. 영류태왕의 계속되는 굴욕적 저자세 외교에 고구려를 한없이 얕잡아보게 된 당나라는 그해 정월 광주사마 장손사(長孫師)를 사신으로 보내 이 경관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경관을 아예 헐어버렸던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운 용사들을 표창하고, 침략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쌓은 경관을 당나라의 사신이란 자가 하루아침에 무너뜨려버리려고 하자 고구려 무장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마침내 을지문덕(乙支文德) 휘하에서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에 참전해 군공(軍功)을 세웠던 해승유(解昇裕)와 임유(林裕) 두 사람이 무장들을 대표하여 어전에서 상주했다.

 

“경관을 허문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인 줄 아뢰오!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폐하, 통촉하소서!”

 

장수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반대한다. 영류태왕이 허연 수염 속으로 입을 비틀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경들은 자중하라! 이는 오로지 제국의 백년대계를 위함이노라! 짐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사하고 숙고한 끝에 내린 구국의 결단인 것을 그대들은 어찌하여 불평만 하고 반대만 하는고?”

 

“폐하! 무슨 이유로든 경관을 허물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수나라의 오랑캐와 싸우다 죽은 우리 군사들과, 부형과 자제를 잃은 그 가족들을 생각하소서! 경관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제국의 빛나는 공적을 허사로 돌리고, 열성조(列聖祖)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 되옵니다. 이제 경관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린다면 앞으로는 더 많은 서토 오랑캐들의 침범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소서!”

 

“저들은 포로로 잡혀간 우리 군사를 찾아서 보내준다는 전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사옵니다!”

 

“당나라의 오랑캐를 믿지 마소서!”

 

장수들이 절규하듯 아뢰었으나 영류태왕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아, 너무나 시끄럽구나! 그대들은 모두 물러가라! 이제부터 짐의 구국의 결단에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자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노라!”

 

그렇게 해서 강경파 무장들은 모두 어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비분강개한 무장들은 을지문덕의 측근으로서 전공을 세웠던 해승유와 임유 장군을 중심으로 뭉쳤다. 그리고 두 장수의 결단을 촉구했다. 결단이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반정(反正)이었다.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 목숨 걸고 일어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류태왕은 비록 지나칠 정도로 당나라에는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아주 얼간이는 아니었다. 자신의 왕권 안보를 위해 병적인 집착을 보였던 영류태왕은 사방팔방에 거미줄처럼 정보망을 심어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승유와 임유 장군을 비롯해 반정을 모의한 무장들을 모두 체포하여 사약(死藥)을 마시게 하는 음독형(飮毒刑)을 내리거나 변경으로 유배를 보내는 등 모조리 숙청해버렸던 것이다.

 

영류태왕은 즉위 초부터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버리고 은퇴했던 연태조의 첫째 아들 연개소문이 가장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겉으로 당나라나 거란 등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감독 책임을 연개소문에게 맡겼다.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보다는 대군을 동원하여 당나라를 정벌하는 일이 더 낫다는 의견을 올렸으나 영류태왕은 대노하여 발을 구르며 이렇게 호통을 쳤다.

 

“개소문, 네놈이 참으로 방자하구나! 짐은 네놈이 강보에 쌓여 있을 때 이미 수나라 군사를 격퇴한 적이 있느니라! 전에 네 아비가 죽은 뒤에 중신들이 모두 너희 동부가를 폐문시켜야 한다고 상주했을 때에도 짐은 너의 부조(父祖) 2대의 공로를 생각하여 너의 세습을 허락했던 것이야! 너는 다시는 무도하게 성지를 거역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즉시 요동으로 떠나도록 하라!”

 

제2차 여수전쟁 당시 영류태왕이 패수대전(浿水大戰)에서 승리할 때에 사실 연개소문은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일곱 살짜리 소년이었다. 그 때, 수군원수 고건무의 작전 계획에 따라 장안성을 텅 비우고 내호아의 수나라 군사 10만을 유인할 때 연개소문도 걸어서 대성산성으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을 쌓고 중원 세력의 침략을 막으려는 소극적인 방어책보다는 차라리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재물과 노력을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정복하자는 대담한 생각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천손왕국(天孫王國)인 고구려의 임금답지 않게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이 심각한 수준인 영류태왕과 그의 주변에서 사람의 장막을 치고 있는 나약하고 비겁한 친당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주장을 일축하고 그에게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맡겨 요동 지역으로 쫓아버렸던 것이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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