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동희 / 스포츠춘추-
심상호(60) 씨는 10년 전 중국 광저우로 이민 왔다. 화장품 도매업을 하는 심 씨는 이민 초기 통신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말도 마십시오. 그때만 해도 이곳 사람들은 삐삐(무선통신기)들을 차고 다녔어요. 휴대전화 있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한두 명밖에 안 됐어요. 또 중국인들이 좀 느긋해요. 삐삐 치고 한참을 기다려야 통화가 됐어요. 왜 사업이란 게 시간을 다투잖아요.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구나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젊은 층 사이에선 누가 어떤 휴대전화를 쓰느냐가 최대 관심사다. 만약 삼성의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면 그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한 한국 야구 대표팀 역시 출전국들엔 선망의 대상이다.
지난 13일 광저우 아오티구장에서 열린 야구 예선 B조 첫 경기 타이완전에서 한국은 6대 1로 승리를 거뒀다. 메이저리거를 포함한 국외파가 대다수인 타이완을 맞아 한국은 추신수의 홈런 두 방과 류현진의 호투로 첫 고비를 훌륭하게 넘겼다.
경기가 끝나고서 타이완 예즈시엔 감독은 “한국야구의 뛰어난 경기력에 박수를 보낸다”며 “다시 한번 한국야구가 강하다는 걸 느꼈다”고 고백했다.
타이완 선수들도 한국야구의 우수성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날 타이완의 주전 3루수 린즈셩은 류현진을 상대로 2안타를 뽑았다. 타이완이 기록한 1점도 린즈셩의 방망이에서 나왔다.
하지만, 린즈셩은 “류현진을 포함한 한국 투수들은 공략하기 매우 어려운 공을 던진다”며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한다”고 털어놨다.
광저우에 모인 미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평도 비슷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야구가 세계 최정상급”이라고 입을 모은다. 공·수·주 어디 하나 떨어지는 게 없다는 게 이유다. 특히나 작전수행능력과 팀워크는 메이저리그보다 낫다는 평이 많았다.
15일 아오티구장에서 만난 태국과 홍콩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이야말로 우리의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지도자들 역시 자국선수들에게 “한국 선수들처럼 플레이하라”고 강조했다. 이유는 간명했다. 한국야구가 곧 야구의 표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한국야구는 이제 삼성의 휴대전화처럼 모든 야구인의 선망 대상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잠시 삼성의 휴대전화와 한국야구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먼저 과감한 도전이다. 삼성전자는 1969년 탄생했다. 탄생 직전까지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한 고 이 회장의 결심으로 삼성전자는 우여곡절 끝에 빛을 봤다.
하지만, 정작 휴대전화 분야에 참여한 건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였다. 1992년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노하우와 기술력이 태부족했다. 그러나 앞으로 휴대전화를 비롯한 통신업이 융성할 것이란 예상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도전했다.
도전은 통했다. 불과 10년 만에 삼성 휴대전화의 외형이 무려 100배 이상 불어난 것이다. 지금은 명실 공히 삼성의 휴대전화가 곧 세계의 휴대전화가 됐다.
야구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야구는 1990년대 중반까지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조금씩 인기가 떨어졌다. 2006년엔 30대 이상이나 보는 ‘올드한 스포츠’가 됐다. 그해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타이완과 일본 사회인 야구팀에 지며 동메달을 땄을 땐 인기가 바닥을 쳤다. 야구계에선 공공연히 '프로야구의 위기'가 논해졌다.
하지만, 이때 한국야구는 과감한 도전에 나섰다. '도하 참패'의 이유를 차분히 분석하고 나서 스트라이크 존을 줄이고, 공인구 크기를 늘렸다. 여기다 대표팀 선발 시 감독에게 지나친 권한이 가지 않도록 기술위원회를 신설했다.
가뜩이나 관중이 주는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존 축소와 공인구 크기 조정은 자칫 득점력 약화로 이어져 전체 프로야구에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한국야구는 2007년부터 관중이 조금씩 늘더니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이후 급속도로 불어났다. 올림픽 금메달은 도하 참패 이후 국제용으로 조정한 스트라이크 존과 공인구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현재 한국프로야구는 연평균 관중 600만 명을 눈앞에 둔 빅리그가 됐다.
두 번째 공통점은 끊임없이 기술력 향상에 애쓰는 자세다. 1990년대 중반 삼성은 국외 바이어를 만나면 곧잘 휴대전화를 벽에 집어던지곤 했다. 바이어들이 놀란 건 당연할 터. 하지만, 삼성 직원은 휴대전화를 주워 “우리가 만든 휴대전화가 얼마나 견고한지 확인했느냐”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내구성은 휴대전화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비단 내구성만이 아니었다. 삼성은 해마다 최첨단의 휴대전화를 출시해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선도했다. 삼성전자 휴대전화 사업부가 끊임없이 기술력 향상에 힘쓴 결과였다.
한국야구도 기술력 향상이 없었다면 아시아 야구의 롤모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야구는 1991년 한일 슈퍼게임 때만 해도 ' 우물 안 개구리'였다.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했지만, 일본 투수들이 던지는 포크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투수들도 일본 타자들에게 금방 약점이 노출돼 크게 고전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 투수들이 던지는 다양한 변화구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 등 젊은 대학선수들이 미국에 진출하며 메이저리그 붐이 일었을 때도 단순히 부러워하는 차원을 벗어나 미국야구의 장점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야구는 일본의 쟁쟁한 투수들이 던지는 다양한 변화구를 손쉽게 받아쳤다.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것 같았던 고난도의 수비도 척척 해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기술력 향상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세 번째는 한국의 특수성을 세계화한 것이다. 1993년 한국 휴대전화 시장은 다국적 기업 모토로라가 독점했다. 시장점유율이 무려 70% 이상이었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전자가 ‘거대공룡’인 모토로라를 이기려면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특히나 국산 제품에 불신을 갖는 소비자의 마음을 끌려면 세계 유명 브랜드를 능가할 회심의 카드가 필요했다. 이때 삼성이 들고 나온 카드가 있다. 바로 ‘한국지형에 강하다’였다.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임을 고려한 삼성은 처음부터 국내 전파환경을 고려해 휴대전화를 생산했다. 외국제품보다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마케팅도 꾸준히 펼쳤다. 덕분에 국내 소비자들은 어느새 외국제품 대신 삼성 휴대전화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한국지형을 고려해 열띤 연구를 펼친 까닭일까. 삼성 휴대전화는 이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가장 잘 터지는 휴대전화로 우뚝 섰다.
한국야구도 세계야구의 장점과 흐름을 받아들이는 만큼 한국야구만의 강점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선보인 빠른 발을 이용한 ‘기동력 야구’와 치밀한 ‘작전 야구’는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야구로 평가받고 있다.
미 메이저리거처럼 체격이 크지 않고, 일본 프로선수들에 비해 타격기술이 떨어지는 단점을 기동력과 작전으로 극복한 것이었다. 올림픽에서 한국에 패하고 일본야구계는 한국야구의 장점을 받아들여 ‘기동력 야구’를 펼치기 시작했다. 타이완 야구계도 ‘한방’에만 의존하던 단조로운 타격에서 벗어나 ‘기동력 야구’를 선보이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휴대전화와 야구가 이제 세계 휴대전화 시장과 야구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제공=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