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매거진T "김현진의 이상한 나라의 TV
사실 난 대한민국의 아버지 가장들을 별로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나에게 뭐 좋은 짓을 해 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뭐 우리 아버지도 아니고, 술을 먹이려고 하거나 술을 먹는다고 야단을 치거나,
내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거나 내가 담배를 피운다고 뻑뻑 소리를 치거나,
짧은 치마를 입는다고 호통을 치거나 짧은 치마를 입었다고 만지려고 하거나,
무턱대고 오랫동안 알 수 없는 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거나
그 이야기를 전심전력으로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뭐 그런 식이었다.
갑자기 꼰대들이 가여워진 푸르르르르 광고
10억이 되어 돌아온 내 남편.
남은 인생 동안 웬만하면 그들을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나의 소박한 목적이었으나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웬일로 그들을, 대한민국의 아버지 가장들을 가엾게 여겼던 것이다.
그건 다 보험사 때문이었다.
한때는 보험이란, 혹시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맞아 두는 예방 주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요즘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보험광고 소리는 마치 필연적 불운을 예언하는 검은 까마귀 소리처럼 요란하다.
까악까악! 네가 언제까지 멀쩡할 것 같냐! 까악까악! 너는 간암에 걸리는 게 아주 확정이야! 까악까악... 그러므로... 네 아이들은 굶어 죽을 것이 확정이야! 어서 죽어서 10억이 되라며
가장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던 모 광고는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어떤 아버지들은 죽어서도 자식을 유학 보내고 결혼시키고 학비를 댄다면서 다정하게 말하지만,
사실 그 광고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준비하세요’가 아니라
살아 있는데도 자식 학비를 못 대주고 유학 못 보내고 결혼 자금 못 대주는 아버지들을 하염없이 부끄럽게 한다.
황소처럼 일하다가 죽으면 10억이라도 되던가, 죽어서라도 학비와 유학자금과 결혼비용을 뱉어내라니 이건 뭐 아버지들은 무덤에 들어가서도 돈을 내놔야 하는 것이다. 까악까악 죽어서 얼른 10억이 되라는 강령처럼 초강수도 있지만 조근조근 약점을 공격하는 사려깊은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이토록 험한 길 보험이나 추천해주소
죽어서도 내 자식 대학은 보내야 하는 아버지.
근래에 들어본 광고 카피 중에 가장 섬뜩하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 자식들은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습니다... 까악까악... 아비에게 이것보다 효과적인 협박이 어디 있으랴,
흔해빠진 과자 하나 못 먹는 제 자식을 상상하게 만드는 보험 광고는 이쯤 되면 광고가 아니라 협박이다. 말 그대로, 이러한 것을 하면 당신에게 득이 된다고 알리는 것에 모자라 보험광고들은 아예 미래에 대한 근심을 팔아먹는다.
근심이 없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근심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보험을 들어놓으면 유사시에 좋다는 게 아니라, 음울한 예언을 하는 흑마법사 같다.
안 들겠다고...? 자네 간도 크군... 이 수정구에 나오는 굶고 있는 당신 자식이 보이지도 않나...?
휴일에 보험광고만 10번쯤 봤더니 순식간에 염세주의자가 될 판이었다.
멀쩡한 사람한테도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제발 광고를 하란 말이다, 협박은 하지 말고.
한국사회가 지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상품을 파는데 선전이 아니라 협박까지 하게 되는 걸 보니 그 기차의 행선지가 더욱 확실해지는 기분이다. 그 협박들 덕분에 오늘 같은 날은 그토록 미워했던 꼰대 아저씨들도 어차피 이 기차에 동승한 탑승객이라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동병상련의 기분이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들은 나를 여전히 싫어할 테지만,
이쪽에서도 알 게 뭐람. 보험사들은 아저씨들을 윽박지르고, 아저씨들은 나를 윽박지르고. 다들 윽박질러서 살기 무서워 죽겠다. 보험이라도 들어야 하나. 누가 윽박지를 때 유용한 종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