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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 충절의 고장 영주의 금성단

금성단 |2007.11.09 15:13
조회 99 |추천 0

중앙고속로 풍기IC에서 순흥, 부석쪽으로 15분거리에 소수서원이 있습니다.

소수서원에서 200m정도 거리에 금성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선비의 고장 영주! 충절의 고장 영주의 금성단을 소개합니다.


   금성단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7년12월 1일부터 금성대군 신단으로 국가 사적으로 승격 된다.

조선 세조 때 단종임금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름 유(瑜), 세종임금의 여섯째아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의 넷째동생)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금성단(錦城壇)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임금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삭령(朔寧)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시켰었다.

이듬 해 성삼문 (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대군은 다시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금성 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을 짓게 하여 은밀히 순흥고을로 모여들게 하였다.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가던 세조 3년(1457)가을 어느 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廢府)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고,  이어 숙종45년(1719) 고을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알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단 소(壇 所) 

  

금성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의 소청에 의하였으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  오른쪽 편에 부사 이보흠 위(位),왼편에 무명 의사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순의 비(殉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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