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옥류천을 구경하고 시간이 남는 것같았다.
창덕궁 옆 현대빌딩 올라가는 골목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어있었다.
창덕궁 담벽을 따라 위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예전에도 북촌한옥마을을 몇번 가 보았지만 지역이 넓다보니 가야할 포인트를 잘 정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이렇게도 가보고 저렇게도 가보는 수밖에 없다.
예전에 윤보선 전 대통령집 기웃거리다가 쫓겨난 적도 있었고 여름에 서울 페스티발 때 걸어가 본 적도 있는 것같다.
그 골목으로 쭉 올라가니 길이 막히었다.
그리고 담밑으로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는데 그게 아마도 창덕궁에서 내려오는 것같다.
밑에 사람이 통과 못하도록 철망을 쳐 놓고 있었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니 집 앞에 무슨 안내판도 있고 아주 그럴듯한 한옥이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백홍범가 정도 되는 것같았다.
대문이 열려 있기에 들어가 보았더니 어떻게 왔냐고 물으신다 그래서 집 구경 좀 해도 되냐고 하니 일언지하에 개인소유라서 곤란하다고 거절을 하신다.
할 수 없이 돌아서 다시 중앙고등학교 쪽으로 가는데 기와 수막새가 재미있다.
거북이 표시를 하고 그 옆에 온천 표시 같은 것이 있다.
오래 살기를 염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같았다.
중앙고등학교 정문쪽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듬성 등성 관광하고 있었고 예전에 거기서 영화 촬영하던 기억도 난다.
중앙고등학교 정문 근처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그 앞집에는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파는데 아마도 일본인 관광객이 모여 있는 것같았다.
그 집이 아마도 겨울연가의 촬영지쯤 되는 지 그런 느낌이다.
그 곳에서 다시 언덕을 넘어 가니 외교관저 밀집지역 같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눈에 띠는 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이다.
거리의 풍경이 단풍이 군데 군데 물들어 보기가 좋았다.
거리 풍경을 사진을 찍는데 웬 사람이 나타나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외교관저라서 보안상 찍지 말라고 한 것이겠지, 풍경을 찍었다고 하고 그 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갔다.
경복궁 옆 길이 아니고 그 전 길 같은데 언덕위에 있는 길인데 전망이 아주 좋다.
인왕산도 아주 그럴 듯하게 보이고 북악산도 풍광이 좋게 보인다.
연인인 듯한 남녀가 그 곳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사진을 몇장 찍었다.
장신구 박물관인지 뭔지 하는 곳이 있었는데 더 이상 위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이제 내려가기로 했다.
여자 일본인 관광객 3명이 여기 저기 기웃 거리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장신구 박물관도 보이는 것같고 점점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같았다.
그러고 보니 거리 풍경이 아주 미술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사진찍는 사람도 많이 나타나고 구경꾼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았다.
윈도우의 진열된 상품도 아주 미적 감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게의 다양한 모습과 가로수의 색깔이 자연스럽게 어울린 것같았다.
거기로 내려오니 길을 건너니 인사동이다.
아래 내용은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북촌지역은 예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 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조선왕조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조선성리학에 기초하여 배치된 궁궐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뛰어난 자연경치를 배경으로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하여 전통 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00년 역사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원서동,재동,계동,가회동,인사동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당시로서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 곳곳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몇 채의 한옥들은 이때의 명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이 지역은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잘게 나뉘어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 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도심주거형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개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근대화 시기의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들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전의 대형한옥이 고급자재와 전문 목수(도목)에 의해 설계, 시공되고 건물의 배치가 성글게 놓여진데 비해 이 시기에 지어진 도심 한옥군은 필요에 의해 대규모로 생산되었으며, 중정을 갖는 전통배치를 유지하면서도 좁은 공간 속에서 최대한의 공간활용을 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여러 채의 한옥이 지붕처마를 잇대고 벽과 벽을 이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풍경은 우리들이 잊고 살았던 따뜻한 정과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해준다.
북촌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움 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서구의 네모 반듯한 도로가 아니라 마치 물이 흘러 내려가듯 가지에 가지를 치는 도로체계는 이 지역의 오랜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인사동길은 원래 청계천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형성되었으며, 삼청동과 가회동의 길 또한 북한산의 지류를 따라 형성되었다. 때론 지나는 이웃의 어깨가 닿을 듯한 폭에서 옛 우마가 지날 듯한 골목은 미로처럼 연결되어있으며, 좁아졌다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곤 하는 골목의 연결을 따라 옛 한옥들이 맞닿아 있는 풍경은 이 지역의 맛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북촌지역은 한옥들로 이루어진 전통한옥군 이외에도 수많은 사적과 문화재, 민속자료를 가지고 있는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으로 불리워 진다. 이러한 역사문화 자료들은 북촌지역의 한옥과 골목과 함께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는 우리의 민족 문화이다. 지역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보존되어 온 지역의 역사 자료들은 지역의 곳곳에 숨겨진 보물처럼 남아있다. 조선시대로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유적과 문화재들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이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 해 주고 있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서울에서의 최상지는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니 이 궁궐을 연결하는 선상의 지역, 북악과 응봉을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서 현 율곡로 좌우측 일대는 주거입지 즉, 양기풍수상(陽氣風水上)의 최길지(最吉地)였으며, 이 지역은 이른바 북고남저(北高南低)로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될 뿐 아니라 남쪽은 넓게 트였으며, 안산(案山)인 남산의 전망도 좋아 정침(正寢)이나 사랑(斜廊)이 항상 남면(南面)할 수 있는 장점도 지녀 이 일대에 그때마다의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이 모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곳에 집거함으로써 자기들끼리의 대면을 통한 정보 교환이 가능했으며 그들의 지배를 언제나 합리화하고 장기화하기 위한 유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물론 그 내부에 있어서는 오히려 분파활동(分派活動)을 활발하게 하는 요인도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서울에 있는 북촌(北村)의 형성 과정이다.
한편 당대의 권문세가가 아닌 하급관리들이라든가 양반의 자손이기는 하나 현직의 고급관인이 아닌 자들은 남산 기슭인 이른바 남촌(南村)에 살았다. 그곳은 음지(陰地)이기는 하나 배수가 잘 되고 지하수가 풍부하여 취수에 편리했으니 오늘날의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으로,
『매천야록(梅川野錄)』권1 상에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老論)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少論)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泉野錄)』권1 상은 고종 원년(1864)에서 동 24년(1887)의 일을 두루 적었는데 이 당시 북촌에는 노론만이 거주하였고 소론과 남인 북인은 설령 고급관인일지라도 남촌에 섞여 살았다고 한다.